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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Jun 14. 2023

퇴사 직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8년 전 우연히 토요일 저녁 TV 예능을 보다가 생각했다.


- 오늘 OOO에 이력서나 넣어볼까?


그날 저녁 아이가 잠들자 고민 없이 이력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공기업 냄새가 풍기는 기업이기에, 80년대 스타일 이력서를 작성했다. '어린 시절...'로 시작하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스타일이었다. 쉽게 썼고, 한 번만 퇴고하고 그날 밤 제출했다.


운 좋게 서류 합격했고, 면접도 평범하게 끝났다. 과정은 쉽게 풀렸고,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아 편안하게 노를 젓다 보니 이직이 현실로 다가왔다. 면접 전형 프로세스는 유행했던 복잡한 구조화된 면접이 아니었고 면접관도 지원분야 전문가가 아니었다. 대면면접, 과제 & PT, 임원면접으로 단순했다.


의외는 레퍼런스 체크였다.


최종 합격 전에 회사는 평판 조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쉽게 쓴 이력서처럼 평판 조회도 고민하지 않았다. 현직 동료, 선배들 10명의 이름을 레퍼런스 체크 인터뷰 대상자로 올렸다. 보통, 평판 조회는 현직이 아닌 퇴직자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물론, 평판 조회는 내가 보낸 리스트에서 일부를 인터뷰하고, 인터뷰한 사람이 리스트에 없는 사람들을 추천해 인터뷰한다. 리스트에 넣지 않았던 동료, 선배들이 '너 퇴직하냐고?' 내게 물어왔었다.


평판 조회는 컨설턴트가 매뉴얼대로 진행했다. 다만, 그들이 인터뷰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레퍼런스 체크에 대한 불만이 나에게 쏟아졌다. '인터뷰 정말 못 한다.' '인사담당자를 인터뷰하는 사람들이면 경력 있는 사람으로 배정했어야지', '질문지를 읽는 수준의 초보자다.'


합격 통보와 함께 건강검진 요청 메일이 왔다.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건강검진은 마지막 단계이고, 건강검진을 이유로 보통 불합격 통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검진 몇 주 후 최종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고, 입사 일정을 1개월 뒤로 조율했다. 이 모든 과정이 3개월 정도 걸렸다.





퇴사 전 -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주 업무]


이직 채용 프로세스가 진행 중일 때, 난 M&A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다. 유럽 유명 기업이 거의 망하면서 떨어져 나온 작은 회사였다. 그 회사가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있어 M&A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인사담당자가 필요했다.


- 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부했다. 내가 이직 채용 프로세스를 타는지 모르는 동료가 놀란 눈으로 '왜?'라며 따져 물었다.

부장은 막무가내로 나를 담당자로 배정했고, 난 한 명 더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 전 영어도 못하고, 제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닙니다.

- 니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야~, 인수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까지 참여해


인수 적정성을 검토하는 단계까지만 투입하겠다고 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싫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해당 기업 인수 주요 HR 이슈에 대해 첫 CHO 보고를 끝낼 무렵 본격적인 Task가 꾸려졌다. 첫 TASK 모임에서 갑론을박이 있었고 결론은 인수 검토로 이어졌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이직 '마음'도 숨길 수 없었을까?


회사의 M&A팀에서는 미지근한 내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도 이유없이 내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 OOO 과장님, M&A에 대해서 잘 알아요?

- 아니요(나)

- 그럼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나요?

- 아니요(나)

- 근데, 왜 이 M&A에 합류하셨어요?


아주 도발적이고, 싸가지 없는 M&A팀 맴버 두 명이 나를 무시하듯 질문을 던졌다.


- 저도 왜 배정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제 부장에게 담당자 바꿔 달라고 하세요~(농담조)

- .....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싸가지 없는 질문에 정성스러운 대답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모욕이 그땐 괜찮았고, 난 농담으로 받아쳤다. 다만 지나고 나니 엄청 열을 받았다. 며칠이 지나, 그 두 싸가지 M&A 팀원 인사기록을 째려 보았는데, 대단한 스펙도 아닌 그냥 자존심만 센 쓰레기들이었다.  


이직할 회사의 레퍼런스 체크가 진행될 무렵이었다. 나는 계속 TASK에 HR 멤버 1명을 더 붙여 달라고 부장에게 떼를 썼다.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이걸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발동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난 열정도 없었다. 다음 달이면 내가 이 업무에서 떠나는데, 회사에 미안함이 들었다.




[일상 업무]


또 하나의 복병은 일상 업무였다.


일상 업무 중 하나는 임원 리포트다. 각 임원에 대한 사업, 내부 업무, 조직관리 등에 대해서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매주 1개의 리포트를 인사담당자가 돌아가면서 쓴다. 내가 빠지면 누군가가 그걸 해야 한다. 일상 업무 중의 하나이지만, 구성원 인터뷰, 내부 개발 상황 확인, 관련 사업 조사 등 여간 까다롭지 않다. 대충 쓸 수도 있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는 것이 사람 힘들게 한다.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상 업무다.


퇴직한다고 동료들에게 먼저 통보했을 때, 한 동료가 임원리포트 쓰고 가라고 엄포를 놓았다.

부장은 일상 업무 대한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퇴직할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생기면.... 동료들을 위해서 업무를 미리 해 놓게 된다. 지나고 보면 미안할 일도 아니지만, 퇴직 전 야근까지 하면서 업무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정성을 다 해도 남겨진 동료들은 당분간 힘들다.


동료들은 내 공백이 커다란 무게로 다가온다. 갑자기 빠진 업무에 누군가의 일상 업무로 부가되기 때문에 그저 싫다. 동료의 이직을 축하하면서도 저 업무 어떡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회사 일을 다 잘 돌아가, 걱정하지 말고 이직 준비 잘해~ 하는 부장은 없다.


당장 자기 성과에 금이 갈까 봐~

조직관리 못한다고 욕먹을까 봐~




[회유]


퇴직 소문이 돌았을 때, 선배들의 부름이 많았다. 술을 먹이면서 왜? 라는 질문을 던졌고, 차를 마시면서 '거길 왜 가?' 회유했다.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고, 걱정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이직은 힘든 과정이니까. 완전히 다른 분야로 이직할 때 막연한 불안감에 공감해 주는 분들은 더욱 고마웠다.


CHO가 우리 조직에 내려왔다. 나뿐만 아니라 1명이 옆 부서에서 퇴직하면서 저녁 회식 명목으로 참여했다. 그는 퇴직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밥 한 끼 사주러 온 것이다.


그때 나를 설득했던 몇 분들은 3년도 되지 않아 이직했다. 첫 회사에서의 비전에 아쉬움이 남고, 선배들의 회유에 흔들리고,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하는 이유는 내 인생을 결정하는 냉철한 합리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첫 회사의 불만보다 타 회사로 이직하는 확실한 '장점'이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회유와 유혹을 이길 한 마디가 있다. 8년 전 어느 날 회의실에서, 호프집에서, 소줏집에서, 흡연실에서, 임원실에서 그들이 반박하지 못할 마지막 대답은 '정년' 이었다.


- 이직하면 거기서 비전 없을 수 있어요, 그래도 거기는 정년을 할 수 있어요.

- .... ('어쩔 수 없지' 하며 고심하는 눈빛)


새벽 1시까지 줄기차게 술잔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나를 회유한 선배가 '정년' 한마디에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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