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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Jun 21. 2024

회사 빌런(들킬 도둑)

멍청한 짓

2024년 봄이 지나고 더위가 일찍 몰려왔다. 

20~30대에는 봄이 겨울 찬기울에서 벗어나 꽃도 피고, 나무가 푸릇해지는 좋은 계절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자,  '이번 봄은 그냥 보낼 수 없어.', '올 봄 꽃 구경은 꼭 해야 해.', '드디어 라운딩 시작이다!', '올해 봄엔 운동을 시작해야지.' 등 결심의 계절이다. 결심한 야외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형외과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직장의 봄에는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상황을 자주 접한다.

20~30대 직장인의 봄에는 친구, 후배, 동료의 결혼 소식이 잦고, 40대~50대 직장인의 봄에는 슬픈 소식이 많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 알게 된다. 봄에는 특히 친분이 거의 없는 직장 선후배과 마음을 나눌 때가 많고, '축의금'과 '조의금'은 마음과 별개로 현실적인 부담이다. 다시 말해, 매번 경조사마다 '얼마를 내야 하나?' 고민이단 말이다. 


- 어떡하지? 

- 가야 하나?


경조사 '금액'을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거나 그들과의 친분을 고려해 적정하게 정한다. 아마 직장인들마다 경조사의 기준을 정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장례식을 찾아갈 지도 정해야 하며, 직접 가지  못할 때는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한다.




이 틈을 노린 회사 빌런이 있었다.


2010년 초 난 회사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신설 조직으로 차출되었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사실상 내가 지원했었다. 회사는 지주사의 작은 계열사를 흡수하여 하나의 사업본부로 신설했다. 그 계열사는 해체된 대기업에서 퇴사한 직원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다. 난 그 회사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아무튼 회사의 흡수 합병은 진행했고, 이질적인 조직이 합쳐져 있는 하나의 사업본부가 생겼다. 인사조직도 합병되어 15명 정도 되는 인원이 서먹서먹하게 일했다. 그 중 막내가 경조사계의 빌런으로 숨어 있었다.


막내 빌런 O는 워크숍에서 총무 역할을 했었다. 총무는 돈을 관리하기 때문에 약간의 우수리 이익을 갖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총무로 고생하는 막내에 대한 수고비와 같은 성격이다. 그것마저 칼같이 계산을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약간의 "삥땅"은 알면서 웃어넘기는 거다.


다년간 막내 총무를 하면서 쌓인 노하우와 담력으로 빌런 O는 좀 더 큰 "삥땅"을 시도했다. 경조사 축의/조의금에 손대기 시작한 거다. 처음에는 들키지 않았다. 누가 얼마를 내는 것에 누가 관심이 있으랴? 경조금의 많고 적음은 따지지 않는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통과의례: 결혼 축의와 부고 조의


나의 결혼은 인간관계를 한번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결별하기도, 오래 연락이 끊기 친구와 이어지기도 했다. 성인이 될 때 무슨 말인지도 몰랐던 통과의례의 의미를 결혼으로 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때문에 축하, 위로하며 정을 쌓는다. 게다가 회사에서의 경조사 챙김은 업무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특징이 있다. 직장의 경조사 문화는 정의내리기 참으로 어렵고, 애매하다. 이번 이야기는 경조사 이야기가 아니니까~ 빌런 이야기로 돌아가자~


빌런 O는 부의금에 손대기 시작했다. 부고를 늦게 들었거나, 업무로 인해 직접 전하지 못한 조의금은 부서로 모이는데, 총무 O는 조의금에서 몇 장을 빼돌렸다. 아마 처음에는 적은 금액이었을 것이다. 부고를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경조금액은 중요하지 않고, 봉투가 중요하다.' '누가 마음을 전했는가'가  중요하고, 경조금액은 단지 당사자의 빚으로 남는 '정보'일 뿐이다. 확인하지 않는 금액 '정보'의 틈을 빌런은 노렸다. 그 틈을 노린 점은 영악했지만, 빼낸 금액으로 볼 때 O는 멍청했다. 아마도 빌런 O는 조의금에만 손을 댔다면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빌런 O의 악행이 들킨 계기는 결혼 축의금을 빼돌리면서부터였다. 결혼 후 답례할 때, 주로 떡이나 답례품을 돌린다. 친한 사람은 모아서 밥이나 술을 산다. 답례품은 돌릴 때 "감사하다." 정도 인사만 하지만, 밥이나 술을 사면 결혼 전후 이야기와 선배 기혼자의 고충을 토로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행복을 자학으로 표현하는 재미있는 자리가 된다.


- 축의금이 왜 8만 원이야? 잘못 넣은 거지?

결혼한 친구가 친한 동료에게 물어본다. 


- 뭐야? 10만 원 했지! 무슨 8만 원이야?

빌런 O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실수-우연이 누적되면 의심이 시작한다.


어느덧 빌런 O에 대한 결혼 축의금 도둑질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빌런 O를 통해 축의금을 전달하면 금액이 달라진다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심지어 봉투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결국 빌런 O에게 맡긴 축의금 봉투 금액을 결혼 당사자에게 직접 물으면서 빌런 Lee가 봉투에서 돈을 빼거나 전달하지 않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빌런 O는 결혼 축의금이 3, 5, 10으로 증액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을까?

1~2만 원을 빼면 금액이 애매해진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


빌런 O의 악행이 밝혀졌는데도 과거 누구의 것을 얼마나 훔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일이 조사할 수도... O에게 맡긴 기억을 모을 수도... 없었다.



마음을 훔친 빌런! 로맨틱한 단어지만, 썩어 문드러질 나쁜 빌런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결혼과 조사의 축의금과 부의금은 '마음을 전한다'고 표현한다. 봉투나 기록이 남아 있다면 그건 다행인 거고, 봉투와 기록이 아예 사라졌다면 그건 큰~일이다. 내가 전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전한 마음을 받지 못한 거다.


멍청한 빌런이 1~2만 원(혹은 그 이상)을 빼면서 "봉투"를 전했기를 바라지만, 빌런 O가 앗아간 그 마음이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다. 전달되기는 커녕 오해만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빌런 O의 악행 사건은 크게 비화하지 않았다. 경조금의 독특한 문화가 아마도 그런 의미를 묻어버렸을 수도 있다. 지나간 일이다. 


빌런 O는 얼마나 훔쳤을까? 왜? 경조금 훔칠 생각을 했을까?

당한 사람들은 O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나도 당했겠지? 

부서에 이런 미친 놈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왜 화내지 않았을까?


- 지나간 일인데 뭐~


내가 보낸 경조금이 2만원, 6만원 이렇게 전달되었을텐데... 

결혼 이후, 동료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진 이유가 그랬을 수도..


- 화가 난다.

2만원, 4만원, 13만원 경조금 봉투에 담긴 이상한 금액에 대해서 당사자는 보낸 사람에게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 혹시......

빌런 O가 멍청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려 급하게 돈을 빼다보니 경조금액이 애매해진 것이 아니라, 빌런 O가 정말 미쳐서, 알고도 애매하게 금액을 뺐을 수도 있다. 


- 헉! 

어두운 회의실에서 경조금 봉투를 깔아두고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돈을 빼내는 빌런 O를 상상해 본다. A부장의 10만원 봉투에서 4만원을 빼내고, B과장의 5만원 봉투에서 2만원을 빼고, 빌런 O와 사이가 좋지 않은 C과장 5만원 봉투에서 1만원을 빼내면서 웃고 있는 빌런 O가 떠오른다. 


진실은, 빌런 O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빌런 O는 지금도 잘살고 있다. 다만 O에게 아무도 총무나 경조사 봉투를 맡기지 않을 뿐이다. O는 아마 학생 때부터 부모님의 지갑에서 손을 대었거나 직장 총무로서 공금에 손댄 것으로 도둑질을 시작했을 것이다. 점점 대담해진 악행은 돈보다 더 큰 사람의 마음을 찢고 말았다. 그러나 빌런 O는 지금도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알면서 그랬나? 


- 에잇 모르겠다. 


빌어먹을 금방 들킬 도둑 빌런이 나와 같이 회사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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