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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메르트리 Mar 05. 2024

09. 행동이 씨가 됐다.

행동습관의 나비효과


범이가 성장 호르몬 치료를 받은 지 2년이 넘어갑니다.

분기별로 대학병원 성장센터에서 진료를 받고 있어요.

성장 곡선 1% 아래에 맴돌던 범이가 이제는 13% 위로 올라왔네요.

아직은 갈길이 멀지만 튼튼하게 자라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기적으로 엑스레이를 찍습니다.

뼈 나이를 가늠해 보고 성장판을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1년 반 이상 어린 뼈 나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순조롭게 치료가 잘 되고 있나 싶었는데, 교수님이 척추 사진을 보고는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아이고~ 척추가 많이 휘어졌네. 당장 조치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지만 경각심을 가지는 차원에서 한 번 진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소아 정형 외래 처방 줄 테니 진료받아보세요."



아~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제 척추까지 신경 써야 하네요.


코감기 다 나으면 중이염 걸리고, 중이염 겨우 다 나으면 발가락 다치고.

키가 잘 크고 있다 싶었는데 정형외과 진료도 가야 하네요.


원래 아이 키우는 거 이런 거 맞죠?

엄마 심심할까 봐 계속 신경 쓸 일을 만들어 주는 아들인가 봅니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나 진료 예약일이 되었습니다.

범이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소아 정형으로 유명하신 교수님이셨고, 왠지 쌀쌀맞을 것 같다는 저의 편견과는 다르게 굉장히 친절히 진료를 봐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실은 진료실 들어가기 전부터 범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제가 너무 속상한 나머지 병원 오기 전 살짝 겁을 줬었거든요.

"너 계속 누워서 책 보고 다리 꼬면 수술해야 할 수도 있어!"라고요.

그동안 자세 똑바로 하라고 수차례 이야기 했지만 전혀 고칠 마음 없는 아이였기에 괜히 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수술이라고 하면 질색하는 아이예요.

혹시나 의사 선생님이 뭔가 대단한 조치(?)를 취할까 봐 잔뜩 겁을 먹었더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진료를 기다리는 중 허리에 큰 보호대를 차고 나타난 형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저에게 바짝 더 다가옵니다.

"엄마, 나도 저 형처럼 하고 다녀야 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긴장 상태로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소아 전문이셔서 그런지 아이에게 천천히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셨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바지 걷어서 다리 모양 체크하시고 상체를 숙여 척추 모양을 확인했습니다.


척추 측만 증상이 있는데 당장 교정이 필요한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건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비타민 D, 인산염, 칼슘 등 수치도 확인해야 한다네요.

소아 정형에서는 영양학적으로도 처방이 필요하면 나간다고 하면서 피검사와 추가 엑스레이(유연성 추가 확인)까지 하고 가라는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범이, 눈이 불안합니다.

(피... 피검사라니 ㅠㅠ 아마 이런 생각이었겠죠?)



제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소파에 누워서 책 보는 걸 포기하지 않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꼬는 습관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내 인생에서 피를 몇 번이나 뽑는 거야!"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울상으로 말합니다.


호르몬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도, 진료 볼 때마다 정기적으로, 작년에 다른 질병 의심으로 또 두어 번 뽑았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많이 뽑긴 했네요.


"범아! 너는 왜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은 거야."

"몰라~ 나도~ 아이고 내 인생~~"

"엄마가 아무리 얘기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더니 의사 선생님이 말하니까 이제 누워서 책 안 보더라?!"

"왜 내가 엄마 말을 안 들었을까? 아~~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채혈실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탔습니다.

바늘로 팔을 찌를 순간이 다가오니 범이는 생각이 많아지나 봅니다.


"엄마,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 난 행동이 씨가 되었네."






아이 말에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평소에 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니 기왕이면 긍정적이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하자고 하거든요.  


보드게임을 할 때조차도 질 것 같으면 "안 해, 난 어차피 못 이겨."이런 말을 하며 심술이 난 아이들에게 말이 씨가 된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 보라고 하거든요. 실제로 막판에 역전도 많이 되었고요.


"엄마 말 안 듣고 편한 자세만 계속하다가 이렇게 되다니..."

아이 입에서 직접 이런 말이 나오다니, 저에게는 감동의 순간이 아닐 수 없어요.


채혈실에 도착했습니다.

대기 인원이 적어서 번호표를 뽑자마자 바로 이름이 불리네요.

긴장을 느낄 새도 없이 엉겁결에 피 세 통을 뽑은 범이.

씩씩하게 잘 해냈습니다.


검사 결과는 2주 뒤에 나온다고 합니다.

행동이 씨가 되었지만 더 큰 치료 없이 일상 습관을 바꾸는 정도에서 치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아이도 이제는 평소 자세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니까요.


오늘도 범이는 정자세로 바르게 앉아 책을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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