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해든미술관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
55년 지기 친구,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고 초중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직장까지 같은 곳에서 시작했던 친구.
생일마저 같은 우리는, 그야말로 인생의 대부분을 나란히 걸어온 사이다.
3년 전 그는 강화도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와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오늘 나는 그 친구 N을 조금 특별한 장소로 불러냈다.
바로 강화도 해든 미술관이다.
먼저 도착한 나는 티켓을 끊고 천천히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었고, 잠시 뒤 N이 들어섰다.
강화도에 살면서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는 곳.
미술관에서의 만남은 생각보다 더 색다르고, 더 새로웠다.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 하나씩을 고르기로 하고 전시장을 걸었다.
혼자였다면 그림만 보고 지나갔을 텐데,
친구와 함께 바라보는 그림은 또 다른 결을 가진다.
감정의 선이 함께 이어지고, 서로의 시선이 작품 속에서 조금씩 겹친다.
관람객이라고는 우리 둘 뿐인 미술관.
적막하되 불편함은 없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공간.
지하 갤러리를 둘러본 뒤 1층으로 올라와 따뜻한 차 한 잔씩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고, 10분 동안 글을 써보자.”
친구 N은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함께 앉아 펜을 들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와 함께 글을 써보고 싶었다.
식당에서, 술집에서, 카페에서 나누는 익숙한 대화가 아닌
조용한 공간에서 그림을 앞에 두고 마음을 기록하는 일.
오늘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텅 빈 카페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각자의 글을 읽어주었다.
N이 고른 그림 – 이강화 작가의 〈청연〉
이강화작가의 "청연" 작품을 보았다.
연못이나 저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들과 들꽃 몇 송이가 검푸른 배경의 물안개 위에 피어난 듯 묘사되어 있다.
비슷한 질감과 색상이 겹쳐진 듯 하지만 들풀과 꽃망울이 주는 강렬한 존재감이 눈을 아롱지게 한다.
이 그림의 시간은 밤일까?
처연한 듯 보이지만 어두워 보이지는 않다.
우리 눈에 비치는 빛과 어둠은 결코 색상으로 한정 짓지 못하는가 보다.
친구는 짧지만 분명한 주관으로 그림을 응시했고 그 느낌을 잘 표현해 주었다.
나도 내가 마음에 들었던 작품과 글을 소개했다
내가 고른 그림 - 이계원의 The Heritage
켜켜이 쌓인 세월의 결이 한 장의 캔버스 위에 놓여 있었다.
어떤 해는 깊은 파랑으로, 어떤 해는 밝은 노랑으로, 내 삶은 늘 서로 다른 색을 덧입으며 겹겹이 쌓여왔다.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색색의 계절들이었다.
앞으로 어떤 빛깔로 나의 남은 삶이 채색될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에 닿는 결 한 줄만큼은 온화하고 따뜻한 색이기를 소망해 본다.
누군가는 붉게, 또 누군가는 푸르게 생의 마지막을 칠한다.
그 안에 흩뿌려진 무수한 색조들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현재가 천천히 과거가 되는 날,
스며드는 색을 바라보며
미래가 조용히 현재가 되는 날,
다시 원하는 색이 퍼지기를 기도하며 우리는 하루를, 그리고 한 해를 이어간다.
오늘 강화도 해든에서 만난 이 그림 한 점은
내가 걸어온 생을 다시 펼쳐 보게 했다.
겹겹이 쌓인 세월의 단면이 마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유산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알록달록한 찬란함으로
내 남은 삶을 물들이고 싶다.
그래서 이 그림을 한 점의 빛으로 품어본다.
오늘 우리는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림 앞에 앉아 글을 쓰는 10분은
5년보다, 10년보다 더 오래 기억될지 모른다.
강화도의 바람은 한층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유난히 따뜻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