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망각
망각이란 얼마나 필연적이며, 또 얼마나 인간을 허무하게 만드는가.
오늘 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팔 년 전,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엄마를 떠나보낸 날. 그날의 절망을 기억하며 매해 12월을 버티던 나는, 정작 오늘이 그날인지조차 잊은 채 하루를 보냈다.
누나의 짧은 메시지 한 줄이 그 망각의 끝에서 나를 붙잡아 세웠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던 날들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효도나 습관이 아니라, 부모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관계의 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분이 모두 떠난 뒤, 전화를 걸 곳 없는 하루를 맞이하며 나는 관계가 사라진 자리, 즉 부재의 무게를 처음 배웠다.
그 후의 삶에서 나는 조금씩 적응했고,
적응은 무디어짐을 낳고,
무디어짐은 마침내 잊음을 불러왔다.
오늘의 망각은 그 과정의 가장 극적인 증거다.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바로 그 ‘망각의 체계’ 안에 놓인다.
기억하는 자가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그 존재는 완전한 부재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결국 도달하게 되는 실존의 마지막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 마침내 사라지는 것.
그렇다면 무덤의 봉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의 풍화 속에서 형태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잊히는 구조 앞에서
기념(記念)의 형식은 얼마나 덧없고 취약한가.
존재는 ‘기억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억마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므로
부재는 실존의 최종 상태가 된다.
오늘, 엄마의 기일을 잊어버린 바로 이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존재의 구조를 더 깊이 사유하게 된다.
부모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너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