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당근 Sep 24. 2024

어차피 부활하니까?

어차피 부활하니 십자가 사건은 별 게 아닌 거 아니냐

Intro


공감 능력이 부족할 때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을 쉽게 여기는 게 바로 그것이다.


한 번은 동기 중에 이런 녀석이 있었다. 자기가 가장 힘들고, 다른 동기들은 군생활 쉽게 한다는 거다. 즉, 내 고난을 극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고난을 폄하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겪었던 일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게 되고 난 후의 말을 더 우스웠다.


"왜 얘기 안 했냐?"


이야기는 했다. 다만, 상대가 들을 생각이 없었을 뿐. 하지만 생각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꽤 많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경우, 대개는 학습이 덜 되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배우거나 알고 나면 이해하고 또 더 나아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부활하니까


어렸을 적의 이야기이다. 나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 크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곧 부활하지 않은가? 그런데 십자가 죽음이 그렇게 심각한 어려움이었을까? 어차피 최후에 승리하는 걸 아는데, 지금의 고난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물론, 이건 내가 어렸을 적, 매우 무지했을 때의 생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비기독교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결국 자작극 아니냐는 거다. 이걸 좀더 쉽게 이해하면, 어차피 부활하는데, 십자가에 달리는 게 그렇게 크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는 거다.




어차피 전역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군대 가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군대를 갔는데도 그런 소릴 한다면 좀 한심하게 느껴지긴 한다.) 같은 논리를 펼치자면, 어차피 전역하면 군생활 쉽지 않겠는가? 이건 마치 페미니스트들의 논리와 똑같다. 자기가 겪지 않는 고난이라고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을 내려치는 거다.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군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군생활이 힘들 때가 전역하기 전 일주일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그렇게 안 간다는 거다. 미칠 거 같다며 힘들어하는 선임들을 보며, "아니 곧 전역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 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 군대에 들어가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눈을 가리게 한 뒤 "깜깜하지? 그게 앞으로의 니 군 생활이야"라는 말과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을 위로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결국 전역이 예정되어 있어도 지금 너무 힘들다는 거다.


전역이 확실하다고 해도 군생활은 힘들다. 군대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군생활이 그렇게 쉬웠다면 그들이 자살했을까?




어차피 졸업하니까


졸업도 마찬가지다.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어차피 졸업하는데" 라는 말도 학창생활이 쉬운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졸업이 예정되어 있어도 지금 힘든 건 힘든 거다.


그리고 이게 요즘 점점 중요하게 여겨진다. 전교조의 발흥으로 교사가 학생들을 케어하지 못하고 있다. 아래의 영상을 보면, 일진들이 선량한 다른 학생들을 괴롭혀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전부 막혀있다는 거다. 일진을 지도했다가 자칫하면 아동 학대가 될 수 있기도 하다. 뭐, 학생들의 인권 소리를 그렇게 주장하던 전교조가 일반 선량한 학생의 인권을 땅에 떨어트리고, 일진들의 세계를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는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요즘 왕따 이야기가 점점 심각해질까? 뭐, 결론적으로 전교조 때문인데.. 교사가 일진을 막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거해버린 전교조 때문에, 한 명의 일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몇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한 명의 일진이 끽해야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지금은 한 명의 일진이 반에서 절반 이상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20년 전에는 끽해야 10%의 아이들이 일진의 두려움을 몸소 겪었다면, 지금은 50%의 학생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일진에 대한 미움과 왕따를 시키는 것에 대한 혐오가 이전보다 훨씬 공감을 일으키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일진에 의해 왕따 당하고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어차피 졸업하면 해방되는데 힘들 게 뭐가 있냐"고 한다면 헛소리로 밖에 여겨지지 못할 거다. 개뿔도 모르면서 헛소리 작작하라고 말이다.






사족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우리 시대에 계속에서 보게 되는 미디어들은 점점 일진에 대한 참교육과 왕따 이야기로 점철될 것이다. 왜냐면 점점 더 심해질 테니까.


뭐, 이건, 몇 년 전에 여교사 성추행 영상이 그렇게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도 눈과 귀를 덮은 전교조가 학생 인권 운운면서 점점 더 교사의 권위를 무너트려서 생긴 일이기는 하다. (학생 인권을 생각하며 교사 인권을 뭉갠 것은 상서중학교 성추행 의혹 교사 자살 사건만 봐도 참 기가 막힌다.)



그래서 교사를 향한 성희롱은 계속 심각해지고 있다.



물론 성희롱만이 문제는 아니다.



이런 교사의 교권 문제는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뭔가 일어날 거 같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





부활이 있다고 해도


승리가 눈 앞에 있다고 하면 물론 우리는 좀더 잘 견딜 수 있다. 승리 앞에서 우리의 고난은 값진 것이 될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의 노력이 값지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광복이 주어진다고 해도, "어차피 광복이 될 텐데 뭘 굳이 그렇게 고생했냐" 라는 말은 욕 먹을 일이다. 마찬가지로 "어차피 전역하는데 뭐 그렇게 힘들어하냐"나 "어차피 졸업하는데 왕따가 그렇게 힘드냐" 같은 소리는 한심하게 여겨져도 할 말이 없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부활하는데 십자가가 힘들 게 뭐가 있냐는 소리는 저 소리들과 똑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