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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May 06. 2024

[짧은 일상] 사연의 흔적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음 겪어보는 일은 아니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두통 같은 감정이 또 나를 찾아왔다. 1차선 도로에 빽빽이 채워진 자동차들 사이의 간격은 몹시 좁았지만, 마른 소년이 지나다니기엔 무리가 없었다. 운전석 옆으로 다가온 소년은 깡통만큼의 동정이면 충분하다는 듯, 걸친 옷차림만큼이나 녹이 슨 깡통을 들고 있었다. 친절하게 우리의 짐을 실어주었던 기사는 소년에게 손을 휘저었다. 아마도 매일 소년을, 소년들을 보았을 기사의 손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닐라는 우리가 머무는 내내 따듯했으나, 그 순간 나는 잠깐 알 수 없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창문을 열어 소년에게 동전을 건네줄 용기도 없었으면서 글을 써 내 마음은 달래고 싶은 나의 비겁함이 두통의 원인일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 물어보지 못한 그들의 사연을 감히 상상해 적는 것으로 그들을 잠시 잊어낸다. 웃고 떠들며 걷던 길에서 마주쳤던 노숙인의 냄새와 그가 나에게 남긴 말들은 짧은 소설로 남았고, 마닐라에서 만난 소년의 눈빛은 이 글로 남았다. 나에게 쓰는 일은 그렇다. 쓰고 싶어져서 쓰는 글보다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게 되는 글이 대부분이다. 풀지 못했던 수많은 의문이 활자로 옮겨지면서 제 나름의 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결국 내게 완전히 잊히는 사연은 없다. 새로운 사연이 다시 과거의 사연과 맞닿는다. 이전에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다 쪽방촌의 평당 임대료가 서울의 평균 평당 임대료보다 한참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평 남짓한 방에 살아가는 이들이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보다 더 높은 평당 임대료를 내고 있다. 좁은 면적일수록 평당 임대료가 높아지는 게 당연한 이치라지만, ‘아, 아무리 그래도.’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살며 누구나 비싼 임대료를 낼 때가 있다. 칼같이 따져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리가 나오는 일들이 있다. 그저 성실히 살아왔을 뿐인데 찾아온 우울, 평생 모아온 돈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불행,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받는 오해, 더 많이 일했음에도 다른 사람이 받는 인정. 나에게 그런 사연이 생길 때, 나는 누가 내 사연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막고 있던 돌덩이 하나가 치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다른 돌이 아무리 가득하더라도 하나의 돌덩이가 치워지면, 마음에 빈틈이 생긴다. 틈 사이로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자기 전 침대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나, 점심 이후에 먹는 달콤한 디저트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상들이 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감히 그들의 사연을 짐작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가장 위로 받고 싶은 방법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서인가 보다. 짧은 글을 마치며, 잊히지 않는 사연 속에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어디선가 당신의 깊은 사연도, 당신의 심심한 일상도 알고 싶은 이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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