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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정완 Nov 15. 2024

다수라는 폭력

다수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라는 폭력 Tyranny of the majority,  acrylic on canvas,  97.0X145.5,  2024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국가의 국민에게 있다는 정의를 기본으로 이뤄진 통치 체제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인 만큼 각 개인에 대한 주권이 보장된다. 그중 가장 큰 권리 하나가 바로 참정권이다. 참정권은 국민이 국가의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며 선거권, 피선거권, 공직 취임권, 정치적 의사 표현 등으로 행사할 수 있고 그중 가장 보편적으로 행사되는 것은 바로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이다.


선거는 특정 국가나 지역, 조직, 단체, 기관의 대표를 구성원 스스로가 의사표시를 하여 선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표된 표들을 종합하고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그 결과를 확정한다. 여기서 다수결의 원칙은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인 결정을 가능하게 함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원활한 운영에 기여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주의가 가진 가장 큰 한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다수가 항상 옳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고, 다수의 선택이 곧 정의라는 믿음 때문에 소수의 권리와 이익이 침해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 들어가면 개인은 자신의 의식적 인격을 잃고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 봉의 저서 [군중심리]의 핵심적인 구절로 군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같은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대중을 이루게 되면 집단적인 동질화 경향을 띠며 집단에 가려진 익명성으로 인해 각 개인의 개별적인 책임감과 정체성이 약화한다. 동시에 집단적 압력이나 분위기에 휩싸여 개인의 생각보다는 집단의 의견, 결정을 무비판 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의견들에는 공격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때때로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한다. 이런 군중의 특성이 다수결의 원칙에 결함을 만드는 것이다.

1989년 6월 5일, Jeff Widener가 촬영한 탱크맨

'다수라는 폭력' 작품은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건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탱크맨의 사진 구도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천안문 사건은 당시 중국의 개혁과 민주화의 지도자였던 후야오방의 죽음에 대한 추모 집회로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부패한 중국 정부에 변화를 촉구하고 개인의 권리와 민주화를 염원하는 중국 국민의 시위로 번졌고, 이를 정부가 군부를 동원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위 사진은 학살이 벌어진 다음 날에 찍힌 사진으로 도로를 지나가는 탱크들을 한 남자가 단신으로 막아서는 모습이다. 위 상황은 영상으로도 남아 있는데 남자는 일렬로 쭉 늘어진 탱크 앞에 다가가 길을 막아서고, 탱크가 옆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그 앞을 다시 막으며 길을 방해한다. 그러다 탱크 위에 기어 올라가기도 하는 등 실로 믿기지 않는 대담한 모습을 보여준다. 잠시 후 그의 안전이 걱정된 주변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서둘러 도로를 떠나게 된다. 그 후 그의 근황에 대한 여러 추측이 나왔지만, 정확한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비록 천안문 광장의 시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지만, 위 사진은 당시 억압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유를 열망했던 중국 시민들의 용기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 않은 국가에서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대는 기존의 권력을 쥐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 권력이라면 민주주의가 들어선 국가에서 상대는 다수의 선택을 힘에 업고 그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래도 민주주의가 좋은 점은 언제나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군중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선택에 대해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잘못된 점을 고쳐나갈 수 있느냐 일것이다. 대중의 변화는 개인이 변화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중의 대다수가 자기 선택의 잘못을 인지하고 그 잘못을 고쳐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면, 분명 그 사회는 더욱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갈 것이다.


먼 미래에는 언젠가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에 대한 정의가 이해되지 않는 시대가 오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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