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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Feb 05. 2024

무지갯빛 매력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를 읽고

위트앤시니컬에서 박연준 시인의 에세이 수업을 듣고 있던 때였다. "다들, 신간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는 작가가 있지 않나요?" 시인이 물었다. 잡히는 데로 책을 읽던 터라, 게다가 독서량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던 터라, 나에게 그런 작가가 있었던가 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왠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에 '저는 OOO 작가님 책 좋아해요. 무조건 산답니다.'라는 말이 바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땐 바로 답하지 못했지만,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책을 버리고 애착이 가는 책을 남기면서 나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편성준&윤혜자, 에밀졸라, 아니 에르노였다.


아니 에르노의 책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 읽기 시작했으니, 이미 유명인사가 된 후 알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그녀가 글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하기 전에 나는 이미 알아봤어라고 글과 작가를 알아보는 나의 고고한 안목을 자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책을 계속 사모으게 된 것은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글의 매력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글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당당히 서 있었다. 늘 그런 모습이었다. 변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살결은 햇빛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근사한 단어가 떠오르진 않지만,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앙리마티스의 초상화처럼 무지갯빛 형형 색깔로 다채롭고 현실적이지 않은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이전에 읽은 그녀의 책에서는 부끄러움을 디딘 당당한 솔직함에 용기를 얻었었다. 남들이 보면 뭐 그리 비극이냐 싶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회사 Lay-off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어 이유도 모른 체 황망히 퇴사했던 그때는 아무리 떳떳하려 해도 나 자신이 왠지 부끄러웠고 주변의 시선이 두려웠다. 아니 에르노는 그랬던 나에게 솔직해져도 괜찮다 용기를 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수동필름카메라의 매력에 푹 빠지고 나서 그녀의 책, <사진의 용도>를 집어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책은 편성준&윤혜자 선생님이 워크숍 중에 공동집필의 예로 소개해주신 것인데, 나에게는 그게 큰 행운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요즘 사랑에 빠진 수동필름카메라는 자동디지털카메라와 다르게 심사숙고해서 찍을 수밖에 없다. 필름값과 현상비가 부담스럽고, 그에 반해 적절한 노출과 초점을 잡기가 수월하지 않고, 찍은 후 바로 확인이 어렵다. 그래서 시선이 가는 곳, 호흡이 멈추는 시간의 흔적을 담기 위해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그 시간과 장소는 내 소유가 되고 착각과 감정이 들어가 원래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된다. 사진 한 장에 의미가 생기고 그걸 따라 짧은 글을 쓰거나 제목을 붙이는 순간 다시 살아있는 새로운 세계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나에게 사진과 사진을 찍는 행위는 대략 그렇다. 물질화하기 힘든 것을 사진 찍기라는 행위를 통해 소유하려고 하고, 사진은 그 치열한 전투의 승전물과도 같았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와 당시 연하의 연인인 마크마리가 (섹스 후 남겨진) 물건들을 사진 찍기 시작하면서 탄생했다. 그 사진들을 열렬한 사랑의 흔적이라고 단순화해서 보기는 어려웠다. 사진은 그녀와 그를 각자의 과거로 이끌기도 하고, 로맨틱한 현재에 몰두하게 하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녀가 느끼고 발견한 것들은 사진마다 다르면서도 한 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내가 그간 보아온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를 통해 작은 경험과 기억에 거대한 의미를 만들다가도, 그 글이 끝나는 순간 다 타버린 재처럼 소멸하거나 끝나버린 영화처럼 공허하거나 어딘가에 가두고 잊어버릴 듯이 그 글과 단절되었다. 그건 죽음이기도 했고 새로운 탄생이기도 했다. 암투병을 통해 실제 죽음과 탄생을 겪은 그녀는 극대화된 그 감정들을 사진을 통해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녀의 사진은 곧 글이었고, 존재의 증거이자 기록이며, 멈춤과 고립이지 않았을까. 책의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그래서 사진의 용도가 무엇 일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에르노가 생각한 용도가 내가 추측한 것과 달라도 상관은 없다. 내용과 상관없이 나는 이 책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간 그녀의 책에서 느꼈던 솔직함, 부끄러움, 멋짐과는 다르게 사진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긴 그녀의 글들이,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은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 강렬해졌다. 사진을 보는 시선과 표현은 더 섬세해졌고, 드문드문 그녀는 귀여웠고 (특히 질투!), 사진에 대한 생각이 일부 나와 겹치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뒤엎어버렸다. 존재를 찾는 듯했던 사진은 가짜가 되었고 결국 죽어버렸다. 그러한 엔딩은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깊이 공감되었다.


이래서 아니 에르노를 끊을 수가 없다. 다음 책으로는 <칼 같은 글쓰기>, 혹은 <빈 옷장>을 볼까 생각 중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천천히 숨 쉬며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녀의 글들이 참 고맙다. 


쓰고 나니 공동저자인 마크마리에게 괜히 미안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미 아니 에르노의 팬이므로 편파독서를 할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아니에르노가 아니라면 마크마리라는 사람의 존재마저 나는 몰랐을 것이다.



<100자 평>

사진 한 장으로 이렇게 깊이 사고하고 근사한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솔직함과 당당함이라는 바탕 위에 피어오른 자유로운 사고와 섬세한 표현은 아니 에르노를 사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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