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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Mar 29. 2024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나는 믿는다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를 읽고

Women@ Korea lead, 전 직장에서 본업무 외 맡았던 역할 중 하나이다. 회사에서는 DE&I (Diversity, Equity & Inclusion - 다양성, 공정성, 포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모든 근무환경과 업무에서 성, 인종, 종교, 연령, 장애 등 각자의 고유특성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해왔다. 그런 일환 중 하나로 커뮤니티 활동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Women@과 Disability@이라는 커뮤니티가 있었고 해외에는 이에 추가로 Black@도 있었다.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각각 여성, 장애, 흑인 등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공정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특징 및 계층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커뮤니티들이다. 나는 거기서 퇴사 전까지 Women@ 한국 리더를 맡았었다.


이직할 기회가 있다면 한국회사보다는 글로벌 회사를 좀 더 선호했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DE&I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문화가 대체로 글로벌 회사에서 먼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발언권을 존중해 주는 문화이기에 나는 리더십그룹에 해야 할 말들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눈치 볼 일이 적었다. 그래서 연차가 쌓이면서 Women@ Korea Lead를 맡은 것은 내 성향과 선호, 그리고 회사 문화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이기도 했다. 세계 여성의 날을 전후해서는 다양한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는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을까?'라는 제목으로 최윤정 여성 미술가 (팝키즈 작가)를 모시고 강의를 듣고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었다. 


그랬기에 서울시립미술관 아카이브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자연스럽게 손이 갔고, 책장을 넘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는 예술 부분, 특히 회화를 비롯한 미술에 대한 이야기였고, 제목마저 과거 진행했던 행사명과 똑같아서 운명 같은 끌림을 느꼈었다. 


이 책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의 오류를 먼저 짚으면서 사회 제도적으로 백인 중산층에 한해 진행된 미술 교육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역할을 강요받은 귀족층에서도 미술가가 없었으며, 현재 위대하다고 전해지고 있는 미술가들은 대체로 백인 중산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성들은 매우 제한된 교육을 받았으며 (예를 들어 누드 모델과 함께 진행하는 인체 수업시간에 참여할 수 없었고, 대신 암소를 관찰해야 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여성에게 강요된 역할과 시선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던 것을 알려준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서 불거진 결과를 이야기하지 않는 흐름이 좋았다. 소위 말하는 위대한 미술가는 제도 안에서 교육받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었다. 그래서 여성과 귀족이 위대한 미술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는 소결론도 좋았다. 미술 작업을 하더라도 여성성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늘 내적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소수의 여성미술가들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남성대비 더 많은 노력과 투쟁을 해야 했다. 그들의 노력은 그래서 무척 힘겨워 보였다.


회사생활을 통해 체감하건데, 우리나라는 유사한 경제성장을 이룬 타 국가에 비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에 많이 미숙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고, 교육을 받았더라도 지금의 경제 불균형과 인플레이션, 낮은 취업률 등으로 인해 소외받은 누군가는 자신의 어려움, 불편함을 다양성을 지원하는 제도 때문이라는 탓을 하기도 한다. 일부는 미숙한 인격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계를 긋고 편을 갈라 정치에 활용하는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의 행태에 휘둘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너머에 있는 인간성과 가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그게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나와 내 가정, 내가 속한 사회, 국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 유리하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재능과 친절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편견의 문 너머로 내버려 두는 순간, 나는 좋은 사람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런 인재를 알아봐 주지 않는 사회는 손해를 보게 된다. 구태의연한 여성성, 남성성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순간, 우리 인생의 질적 성장을 높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소모적인 내외적 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는 있지만, 높은 곳의 물이 아래로 흐르듯, 기압차가 나면 바람이 불듯, 자연의 이치처럼 불합리한 것은 합리적인 것으로, 차별은 평등한 것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안락한 곳을 박차고 낯선 곳으로 나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남자든 여자든, 도전에 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만큼 용감한 자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약진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더 많이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인간성과 용기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100자 평>

그간 미술사 사상은 백인 남성 관점을 중심이라 도덕적, 지적으로 오류가 많다. 미술뿐 아니라 사회전반적으로 더 도약하기 위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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