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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pr 05. 2024

우리, 산에 가자

9년 만에 다시 찾은 원미산

“우리 원미산 가보자.”

남자친구는 시력이 약해진 후로 산에 가지 않았다. 거의 매일 오르던 원미산은 눈을 감으면 그 길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라고 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혼자 산을 가는 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린 오랜 기간 주저했었다. 가끔씩 눈치 없는 듯 산에 가보자고 말은 꺼냈었지만, 그 말이 그를 괴롭힐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내심 누군가 가자고 등 떠밀어주는 것을 기다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철없는 여자친구는 가끔씩 산에 가자고 졸라댔었다. 


수년동안 남자친구의 기억 속에서 원미산은 이런 모습이었을 거다. 봄이면 산 한쪽엔 연분홍 진달래가 가득 피고, 반대쪽 올라오는 길은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키면서 할머니 손마디처럼 줄기가 울퉁불퉁해진 왕벚꽃 나무가 우뚝 솟아있었을 거다. 여름에는 울창한 숲 덕분에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산바람을 그늘아래에서 즐길 수 있고, 어떤 길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으슥하다 못해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자아내기도 했을 거다. 지금은 진달래꽃동산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원미산은 가을이 더 예쁘다고 했다. 나무터널은 따뜻한 노란색과 화려한 붉은색으로 변하고, 바닥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두운 색상의 낙엽 카펫이 깔렸을 거다. 겨울에는 다시 앙상해진 가지가 흑백사진처럼 혹은 수묵화처럼 멋드려 지게 산 능선을 감싸고, 혹시 눈이라도 오면 다른 지역 명산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을 거다.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 산을 우리는 올해 용기 내어 다시 가보기로 했다. 아마도 9년 만일 거다. 원미산을 가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과거에 보았던 아름다운 숲과 산길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것에서 오는 실망감을 미리 연습해야 했다. 눈으로 보는 대신 바람에 실려오는 숲의 소리와 손에 닿을 꽃망울의 촉감을 느껴보기로 했다. 남자친구는 9년 전의 산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이야기해 주면 나는 길잡이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닥돌과 나무뿌리, 계단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손에 잘 맞는 가벼운 등산 스틱을 새로 구입했다.


우리가 간 그날은 진달래축제를 하고 있어 평일인데도 가장 가까운 주차장이 만차였다. 조금 떨어진 부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른손으로 남자친구의 왼손을 꼭 잡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 걸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반대편 손으로 새로 산 스틱을 쥐었다. 남자친구의 기억에 의존해 우리는 오래되어 폐쇄된 놀이동산을 지나 종합운동장 뒷길을 지났다. “조금 더 가면 길이 넓어질 거야. 큰 사거리가 나오면 우리는 왼쪽으로 틀어서 갈 거야. 직진하면 정상이지만, 그럼 재미가 없거든. 조금 돌아가자.” 자신감 넘치는 남자친구의 말에 기대어 그리고 내 눈에 기대어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이동했다.


산길을 접어들자 남자친구는 “좀 더 가면 나무벤치가 있는데 고양이가 있을 수 있어.”라고 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 고양이가 보였다. 나는 “앗! 저기 고양이다!”라고 흥분해 버렸다. 거기엔 긴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무게를 견뎌내다 무너져버린 낮은 낡은 나무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2미터쯤 뒤로 흰색 검은색 주황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고, 그 고양이 엉덩이를 토닥토닥 쳐주는 캣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다. 남자친구는 “그때 그 고양이 새끼들인가 보다 “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는 고양이가 먹이를 먹은 것으로 보이는 그릇을 수건으로 쓱쓱 닦으면서 ”새끼 아니에요. 수술받은 애예요. “라고 했고, 우리가 굉장히 오랜만에 산에 왔다는 이야기에 “9살이에요”라고 하시더니 고양이 등을 한번 더 쓰다듬고 사라지셨다. 고양이 가까이에 가고 싶었던 나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벤치에 슬쩍 앉았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찍고 싶은 욕심에 고양이 쪽으로 한 걸 옮기는 순간, 고양이는 1미터 이상 후다닥 뒤로 도망가버렸다. 아쉬워하는 내 뒤에서 남자친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옛날에 산에 왔을 때, 저 아이는 한 살이었던 거네. “


몇 번의 구불구불한 코너를 돌아 올라가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눈앞에 진달래 동산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모인 나무데크에 오르니 전망대처럼 동산을 위에서 아래로 조망할 수 있었다. 딸기 우유보다는 조금 진한 분홍색인 진달래 꽃잎은 자세히 보면 햇빛이 통과할 정도로 얇아 속살이 슬쩍 비치는 한복 같기도 하다. 여성의 한복이라면 어깨선이 살짝 보일 수도 있고, 남성의 도포자락이라면 펄럭이는 순간 햇빛이 팔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달래는 그래서 왠지 핑크색이 아니라 분홍색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일 뿐이지만, 왠지 핑크색은 소리에서 느껴지듯 강렬한 쾌활함이 돋보이는 듯하고, 분홍색은 좀 더 부드럽고 수줍어하는 느낌이다. 철쭉보다는 좀 더 작고 연한 색인 느낌이고, 산에서 보일 듯 말 듯 얼굴을 내민 나무들을 본 적이 많았다 보니, 나에게 진달래는 그렇게 여리고 수줍고 그러면서 우아하고 고상한 꽃이다. 해가 길어지면 더 예쁘다는 남자친구 말에 우리는 산정상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를 제대로 즐겨보기로 했다.


지도를 그리듯 남자친구의 기억과 설명은 선명했지만, 산길이 어색한 나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놓치고 말았고 낯선 길로 들어섰다. 산 꼭대기가 우리 뒤통수 방향인 게 확실하고 저 멀리 건물과 찻길이 보이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돌아와 다른 길을 찾았다. '아 이 길이구나~' 했지만 그 또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고, 결국 작은 사거리 혹은 오거리처럼 보이는 곳을 나는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세 번이나 돌아왔다. 벤치에서 쉬고 계시던 노부부가 우리를 봤다면 필시 놀릴게 뻔해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새로운 길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세 번의 시도만에 제대로 된 길을 찾았고, 천국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거쳐 결국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은 남자친구의 기억과 조금 달라져있었다. 꼭대기 정자는 공사 중이어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 새로운 데크와 전망대와 그네가 생겼다. 어르신들의 헬스장이 생겼고, 새것으로 보이는 시계와 거울이 기둥에 걸려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부천시내는 미세먼지 때문에 뿌연 안개가 옅게 깔린 것 같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걷히고 있었고 태양빛은 그 뒤에 숨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실수로 카메라에 안개필터를 끼고 온 바람에, 그날 찍은 사진의 풍경은 그보다 더 아련해져 버렸다. 꿈에서 깬 후 흐려진 기억처럼, 오래전 추억을 더듬어 보는 것처럼, 거칠고 뾰족한 것들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동그랗고 부드러워진 것들이 남아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다 다시 만난 진달래는 길어진 햇빛에 낮보다 좀 더 고혹한 모습이었다. 빛은 길게 들어와 꽃잎들을 통과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진한 분홍 그늘을 송이마다 만들고 있었다. 숨쉴틈 없이 펼쳐진 진달래는 아까의 수줍고 여린 모습이 아니었다. 무성한 군락을 이룬 꽃은 이곳의 주인이 되어있었고, 위풍당당한 카리스마로 등산객과 관광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닿는 곳은 모두 핑크빛 진달래였고, 시릴정도로 강렬하고 진한 단색화에 엉뚱하게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내가 알던 진달래면서 아닌듯한 모습에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고 조금 서둘러 동산을 빠져나왔다. 


9년 만에 다시 찾은 그곳은 여전했다. 삼색 고양이가 산길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사거리 나무 벤치에서는 사람들이 쉬고 있었고,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다만 작은 개울은 흙과 낙엽이 쌓여 물줄기가 사라졌고, 나무 벤치는 바닥에 붙을 만큼 내려앉아있었고, 고양이는 좀 더 나이가 들었고, 맨발로 걷는 길과 새로운 나무 데크 전망대가 생겼다. 안심될 만큼 그대로였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산을 빠져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9살 된 고양이와 핑크빛 진달래, 정상에서 본모습은 기억 속에서 다시 희뿌여졌다. 이상한 나라를 여행한 앨리스가 꿈을 깬 것 마냥 조금 어리둥절했던 건, 오랫동안 벼르고 용기 낸 것이 무색할 만큼 산이 우리를 받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화와 바지에 뭍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등에 흐른 땀과 뻐근한 근육통을 느끼니 꿈은 아니었다.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고양이와 인사하기 위해, 산정상에서 조금 다른 사진을 찍어보기 위해, 발로 흙을 꼭꼭 밟고 피부로 손으로 산에 흐르는 바람을 느껴보기 위해 우리는 또 손을 잡고 스틱을 쥐고 그곳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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