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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pr 11. 2024

게으른 자의 핑계

나는 정말 게으른 걸까? 

아침에 기지개를 켜는 것도 이불을 젖히고 침대밖을 나오는 것도 힘든 날이 있다. 오늘같이 생리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 대체로 그렇다. 어제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과식하거나 짜게 먹은 것도 아니며, 무리해서 운동하거나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니지만, 온몸은 퉁퉁 부어있고 가슴을 덮고 있는 이불마저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어렵다. 이럴 때면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나서 매달 이 고생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내 자궁과 호르몬과 수분을 가득 머금은 몸뚱이를 저주하기에 이른다. 


출근을 해야 할 때는 팔과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운동하는 심경으로 온갖 비타민과 이부프로펜 계열의 진통제를 때려먹고 기여나가다시피 집을 나섰었다. 진짜 네발로 기여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온몸이 무겁고 힘들어서 한 발짝 떼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그마저도 어려운 날은 오전 반차를 급히 냈었다. 그런 날은 이부프로펜 약을 2알이나 먹었지만 30분이 지나도 살을 찢는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날이다. 예전에 만났었던 상사는 이를 이해하기는커녕 자기 관리가 안 되어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코멘트를 내 연말평가지에 추가했었다. 객관식 항목들은 거의 모두 최고점이었기에 '누구보다 성과는 좋으나'에서 시작해서 '자기 관리가 부족하다'라고 끝났던 그 매니저의 코멘트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운동을 해도 그날만 되면 움직이기 힘든 비루한 내 몸뚱이는 (게다가 나는 저혈압이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상사의 코멘트는 비수가 되어 날아와 내 심장에 꽂혔었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하느라, 오늘 할 일 해내느라 고생했을 내 몸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미워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진통제를 챙겨 먹었지만, 무리해서 출근해야 할 사무실이 없고, 눈치 볼 상사가 없다. 이건 정말이지 회사를 그만둔 가장 큰 수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무거운 이불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불 안에서 독서등을 켜고 요즘 빠져있는 박경리의 <토지>를 꺼내 들었다. 이 해방감을 자랑하고 싶어 SNS에 올렸더니 평소보다 더 많은 하트와 DM이 날아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이불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 자유를 만끽하며 책을 1/3 정도 읽었다. 


문뜩 창밖을 보니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해가 쨍하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이 평일인지 주말인지 좀 헷갈렸다. 다시 아랫배가 쪼그라드는 통증이 생겨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따뜻한 물에 약을 한 알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안해지는 거다. 나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연인이니까 즐거워야 하는데, 해방감을 느끼고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면 되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다른 이들은 출근하고 할 일을 하고 열심히 살고 있을 텐데, 침대에서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있을 때인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할 일이 태산이긴 하다. 겨울옷도 분류해서 세탁하거나 드라이를 맡겨야 한다. 쓰던 원고도 얼른 수정해야 한다. 다음 달에 있을 가야금대회를 위해 숙소를 알아보고 예약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오늘 꼭 해야 할 급한일은 아니었다. 이걸 못해서 불안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미 생겨버린 불안이란 녀석은 점점 커져 '나는 자기 관리를 못하나? 나는 게으른가?'라는 생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좀 게을러져도 되는 날. 좀 느리게 지내도 되는 날. 게다가 오늘은 생리 이틀차가 아닌가. 한 달 중 가장 무겁고 힘들고 아픈 날. 이런 날은 좀 쉬고 내 몸을 돌보는 게 좋다. 부족한 잠을 자도 되고, 보고 싶었던 책을 봐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다시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하는 자책이 돌아온다. 나를 괴롭히던 그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옛날로 다시 끌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왜'라는 것이 해결이 안 되어서 말이다. 글은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시간을 벌어주니까.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을 파악하게 되고 '왜'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계속해서 '아프고 힘들다 - 쉬어야 해 - 왜 이렇게 게으르지'라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니 '게으름'이라는 것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게으름은 도대체 뭘까? 나는 정말 게으른 걸까? 게으른 것과 안 게으른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게으름의 정도를 수치화할 수 있을까?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쉬고 있는 것은 자기 관리를 못했다는 반증일까? 물론 평소 관리가 잘된 건강한 몸은 아플 일이나 컨디션 난조에 빠질 확률이 적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컨디션에도 무엇인가를 무리해서 하다 보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나 게으른 거 같아 기분이 안 좋아'라는 메시지에 남자친구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라며 볼만한 유튜브 영상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있는 것 자체가 오늘은 왠지 용납이 안된다. 왜 그럴까?


나는 최근의 외국계 회사에서도 그 전의 직장생활에서도 '바쁜 생활'을 습관적으로 해온 것 같았다. 첫 직장이었던 광고대행사에서는 늘 야근을 했었다. 내 옆자리 선배는 브레인스토밍이라는 핑계로 낮에는 만화책이나 잡지를 들여다보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더라도 밤에는 야근을 했고, 그가 만화책을 보는 동안 일처리를 끝내고 먼저 퇴근하려는 나를 잡아 앉히기도 했다. 그다음 회사에서는 습관적인 바쁜 생활은 적었지만, 최근 다녔던 외국계 회사들은 '더 많이, 더 멋지게, 더 크게' 해내야 하는 압박감이 심했다. 그러니 늘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았고, 바쁜 일이 좀 끝날만 하면 늘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다. 일은 새끼를 치는 것 같았고, 내년에는 이 복잡한 것도 정리되고 나아지겠지 라며 늘 이루어진 적 없는 희망을 품고 살았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온 나는 퇴사한 후에도 여전히 바빴다. 여행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카메라를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할 일을 만들고 계속하느라,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하루를 보내버리는 일을 잘하지 않았다.  '바쁜' 상태는 정상인 것이 되었고 '바쁘지 않은' 지금 같은 상태는 바쁘지 않음을 넘어 (비정상적인) 게으른 상태가 되어버린 거였다. 


할 일이 없거나, 할 일을 못하는 상태는 그래서 불안했다. 회사원일 때는 평일에 죽어라 바빴으니, 주말만이라도 늦잠도 자고 소파에 드러누워 유튜브나 넷플릭스도 보고 그냥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 시간이 소중했고 바쁜 나에게 보상이 되었고 휴식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시간은 게으른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백수가 된 지금 나는 주말에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있다. 회사원이었을 때 못지않게 평일도 여전히 바쁜데 말이다. 


20년 동안 켜져 있었던 '바쁜 직장인' 모드는 언제쯤 제대로 끌 수 있을까. 그 스위치를 끄고 모드 전환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마음이 바쁘다. 그래도 이 글을 쓰다 보니 게으르다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겨울옷을 다 정리 못했어도, 원고를 고치지 못했어도, 나는 오늘 책을 읽고 브런치에 글을 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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