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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pr 15. 2024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황사비가 오는 날, 일층 커피숖에 앉아서 글을 고치고 있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고, 좋아하는 도서관 (미술관에 붙은 라이브러리)은 4월 한 달간 문을 닫았다. 그래서 카페음악이나 소음이 거슬리긴 했지만 노트북을 들고 일층 스타벅스에 왔다. 회사를 퇴사하고 쓴 원고에는 그때의 억울함, 불안, 안심, 행복 같은 감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한 줄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백수가 바빠도 너무 바빠 과로사할 지경이라는 글이었는데, 거기서 엄마는 "너 쉴 때 할머니도 보러 가고 그럴랬는데 왜 이렇게 바쁘냐"라는 핀잔 섞인 말을 했었고, 나는 "그러니 빨리빨리 줄을 서시오."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정말 나는 노느라 바빠 할머니를 보러 가질 못했고, 작년 늦여름과 가을 사이 할머니를 먼 곳으로 보내드리고 말았다. 그때 엄마에게 그리고 원고에 뱉어낸 우스갯소리는 이제 나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손녀는 쉬면서 할머니 한번 보러 가려고 했는데, 친구들 만나고 여행 다니고 노느라 바빠, 할머니도 한번 더 못 보고 엄마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한번 더 못주고 할머니를 멀리 보내버렸다. 


어제 엄마는 이번주말에 있을 동창회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이제 포항에 가도 할머니 보러 가는 걸 못하네"라고 했다. 그 말에 담긴 아쉬움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얼마나 클지 감히 상상하고 재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난 아직 엄마가 있으니까. 난 아직 고아가 아니니까. 그래서 별 대꾸도 못하고 못 들은 척하고 말았는데, 내가 쓴 글이 화살이 되어 오늘 나에게 와서 꽂혀버렸다. 못한 것, 놓친 것에 대한 후회가 화살이 만든 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와서 밖에 내리는 비처럼 나를 축축하게 적셔 무겁게 만들었다. 


내 좌우명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였다. 후회하지 않게 심사숙고해서 선택하고, 일단 선택하면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놓친 것,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부쩍 늘고 있다. 특히 누군가를 보내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기회가 없으니까.  다시 만나 회복할 수 있는, 후회하지 않고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는 거니까. 그래서 후회하는 것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후회 없는 이별이 과연 존재할까. 그곳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 같다. 할머니는 비록 나이가 많으셨지만 정정하셨으니 그 해를 못 넘기고 가실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Y언니는 늘 건강하고 밝아서 이제는 영원히 못 볼 거라고 그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올해도 벚꽃과 진달래가 폈다. 연둣빛 예쁜 새 이파리는 봄비를 맞았으니 더 커지고 더 짙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봄, 이 꽃, 이 연둣빛을 같이 볼 횟수가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왜 이렇게 후회할 일들은 많이 생기고, 지나면 후회하는 선택만 기억에 남을까. 내년 이맘때쯤, 십 년 후, 이십 년 후, 혹은 내가 죽을 때, 나는 또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매일 후회하지 않기 위해 채찍질하는 나는 오히려 후회할 만한 순간을 더 만드는 건 아닐까. 치열한 내 생각은 사실 현명하다기보다는 우둔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오래오래 살아 이 삶을 살고 또 살더라도, 파우스트처럼 늘 갈망하고 애쓴다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순간이 나에게도 과연 찾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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