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와 부탄의 UNV 생활을 되돌아 보며

해외봉사단후 살며느끼며40회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by 박향선

난 가끔씩 정부주도의 사업계획이나 UNDP의 사업계획이 누구을 위한 사업인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개발사업에 그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이 되는지 생각을 한다.

UN에서는 홈페이지에 각 사업파트너에 비지니스와 엔지오단체들이 들어가 있다.한데 방글라데시에서 보니 국회의원이 그지역에 엔지오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지역사회에 일원으로 활동하는 공산국가이기에 민주국가와는 사회시스템이 다르리라 본다.

내가 UNV나라로 다녀온 나라는 왕은 민초들의 이야기을 듣는다고 산으로 등산을 하기도 하지만 정책을 펴는 것은 권력층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다. 물론 지역의 유지들도 있다.

몇년전에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10여년전에 대전시청에 나온 보도자료을 계속 인터넷신문에 올렸다. 그때는 보도자료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 샀다.정부기관에서 나온 보도자료가 안좋다고 생각해 아니 예전에는 지역지에는 이 보도자료을 잘 안주었다. 인터넷세상이 되면서 각정부의 홈페이지에 보도자료가 올라오고 있다.

어느 해 인가 산업통상부 자료을 보니 독도에 대한 기사엿다. 독도 주변에 전연자원이 많다는 기사였다. 그 당시에 독도에 대한 영토권분쟁이 일본과 있지만 독도의 천연자원에 대해서는 해양지질조사에 대한 연구자료는 발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천연가스인가 언젠가는 석유시추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같다. 나는 마냥 섬에서 바다해리 200KM만 생각을 했다.

나는 대전시청에서 보도자료만 올린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에 시청브리핑에도 참석해 글을 올렸다.시민단체에서 준 보도자료도 다시 릴라이팅해서 올리고 말이다.

한데 몇년간을 보도자료을 올리다 부동산 분양임대사무실 하루4시간 알바을 시작하면서 알게된 것은 시간이 동네도 돌아보고 다른 일자리을 찾으로 대전시내을 돌아다니다 놀랬다.

대전시에 추진하는 사업이 어떤 사업은 전시행정은 아닌가?사업비가 투입되었다는데 그 돈은 어디로 간 것인가? 가장동에 본죽 식당은 한남시장에 위치한다. 보도자료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의 외국음식을 파는 거리을 만든다고 했는데 몇년지나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는사람들도 없었다.자활에 실패한 것인지 말이다.

태평동에도 청년들을 위한 청년들이 하는 상권거리을 만든다고 대전시정부예산이 투입되었다.지금은 흔적도 없다.부동산분양임대을 하면서 홍보지을 들고 대전중앙시장에 갔따가 청년구단인가 대전시에서 청년들의 중앙시장에 진입을 위해 마련한 사업인데 그곳은 가보면 찾는 사람들이 없이 썰렁하다.장소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아니다. 아니면 계속적인 홍보와 주위 상권과 방안을 모색했어야 하는데 ....

지난해에 유성구에 가서 보니 청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낮에는 비어 있고 닫혀있는 곳을 여럿보았다.건물만 덩그라니 있는 곳이다.이 공간을 지역 청소년들의 쉼터와 갈곳없는 세대들과 나누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내가 올려온 보도자료에 신빙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에 처음에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을 가서 신문을 보고 안서르 아카데미에 시골아낙네을 위한 원예교육을 보러가겟다고 하자 사디소장은 그의 낡은 자동차을 끌고 먼저 면재배농장인가을 갔다. 한데 창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창고에는 커다란 자동차같은 기계가 있었는데 부품이 없어서 움직이지을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날 비들기 사냥을 했던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비들기 고기을 먹는다고 해서 깜짝 놀랫다.

난 국내 훈련교육에서 사업계획서 만드법에 대한 시간에 감기가 들어 몸이 으시시해서 수업을 한시간정도 빠지고 쉬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 가서 사업계획을 어떻게 세우는지 내 집 근처에 사는 리에라는 일본 JOCV봉사단에게서 들었다.그녀는 수공예센타의 본부에서 일한다고 했나? 처음 6개월동안는 현지 조사을 해서 사업을 구상하고 그다음에는 사업계획서을 만들어 시행하고 나머지 6개원을 정리을 해야한다고 햇다. JOCV 임기도 2년이라고 했다.

나는 영국문화원에서 각종 보고서와 열대농업에 대한 책을 읽었고 독일문화원에서는 각종사업 도큐멘트을 넘겨보기도 했다.

사디에 있을때 독일전문가의 강연이 있었는데 농업현장에 왠 건설 사업프로젝트인가 했다. 그들은 도로을닦는 것에 대한 이야기을 했다. 부탄에 갔다. 그곳에서는 어느 사업계획서의 앞장에 이런 이야기을 햇다. 부탄은 산골에 집한채가 있는데 딸이 여러명이다. 우리는 이들이 이길이 나면 결혼하길 원한다.

농산물의 판매등을 위해 도로을 낸다고 하지 않았다. 너무 뜻밖의 사업계획서의 맨 앞표지에 나온글하며 그 전문가의 말에 놀랬다.

물론 원예사업보고서에는 농장의 건설과 농장의 도로 건설과 창고을 짓고 기계을 투입하고 냉장차을 구입하고 다양한 계획이 세부계획에 들어가고 각나라의 원조기구의 펀딩과 봉사자 및 전문가 투입과 자국의 원예인의 교육과 해외연수가 투입된다. 엔지오와 연계된 계획은 부탄 UNDP사업계획서에서는 없었다.

난 방글라데시에 있을때 일본봉사자가 그런 말을 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봉사자가 파견이 되면 일년에 만다카가 정부에서 그 기관에 지원이 된다고 햇는데 내가 속한 기관에서는 아무 말도 없엇다. 한국봉사단은 이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다.

나는 방글라데시에 첫파견기수다. 현장에 대한 일을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처음에 방글라데시에서는 농업성에서 나와 다른 봉사자을 앉혀두고 방글라 농업에 대한 브리핑르 했다. 그때 알았다. 한국사람들의 채소소비량이 70%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당시에 다른 집에 비해서 생선과 고기을 많이 먹어서 그 통계을 보고 고개을 까우둥했었다.

우리집은 어머니가 조산원을 하셔서 다른 집에 비해 외식이 잦았다. 어미니가 환자을 받으면 너무 힘들어 했고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동네 식당에서 삼겹살 구이을 사주거나 집에서 통닭을 먹거나 아무튼 고기을 많이 먹었는데 방글라데시 통계에는 채소을 많이 먹는 나라라고 해서 뜻밖의 통계에 고개을 갸우뚱했다.

샤디의 농업 연수원에 있을때는 책과 연구원들과만 이야기을 했다. 그러다가 아사드원예센타에 가면서 농업현장을 가니 다른 이야기가 펼져 졌다.잡 설명서에는 키친가든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오리엔테이션코스에서는 도시개발계획팀에 사람이 나와서 함께해서 그때는 의아해 했다.아사드 원예센타는 농업성과 관리하에 있지만 다카시청에 직속기관이라햇다.

사디농업연수원에만 있다면 사람들의 소리을 못들었을 것이다.다카의 가정정원이 있는 사람에서 시골에 엔지오가 있는 국회의원, 시골에 원예센타장들은 모두들 나을 현장으로 인도했다 다카의 굴샨에 있는 채소장사는 자신의 시골 채소밭을 보여주기을 원했다.어쩔때는 이들을 따라서 혼자가는 것이 힘에 겨우면 후배 단원에게 부탁해서 같이 간 적도 있다.휴일에 시골현장에 다녀오면 그 다음날 쉬기도 했다.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휴일인 금요일에 같이 시골의 농장을 가기을 원했다. 주로 현지인이 타는 버스을 이용하고 릭샤을 타고 가기도 하고 자동차을 타고 오는 사람들과 같이 시골 농장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영자 신문에 나오는 농업관련기사을 꼼꼼히 챙겨읽기 시작했다.,아사드게이트에 오피서인 아이사는 사무실에 도착하면 방글라신문을 읽는다.차 한잔과 함께 말이다.난 부탄에 가서 이들과 어울리던 생각이 나서 방글라데시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에도 방문을 햇었다.

한국의 서울종묘에 관한 이야기도 원예센타에 있으면서 종자협회인가 어디에 갔다가 들었다. 서울종묘에 종자가 한 컨테이너가 방글라데시에 들어왔었다는 것이다. 한데 이 종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사드게이트원예센타에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한국데서 종자을 지원받을 수있냐고 나에게 여러차례물어왔다. 당시에 KYV에 한국쳥년해외봉사단의 코디네이터가 없어서 초기 파견 단원들은 곤란을 껶고 있었고 한 단원은 나보고 코디네이터을 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영어로 통역을 해 줄수있다고 말이다. 그때 당시에 내가 방글라데시 국장으로 있었던 관계로 여러가지 일을 챙기고 있었고 코디네이터가 없어도 우리의 처 중간평가 모임은 진행이 되어야 햇기에 메뉴얼을 모르는 상태에 방글라데시 관광청에 포르자탄에 연락해 다카 관광을 하는 정도로 간단하게 방그라데시 영사의 주관아래 갖었다. 그 다음 코디네이터는 6개월 후에 5기의 방글라데시 파견을 앞두고 파견되었다.

그 동안에 일주일에 한번인가 두번을 다카우토라 KYV오스텔의 빈집을 왔다 갔다 하며 호스텔의 주변을 살폈다. 조선일보 신문도 받아 오고 말이다.그때 레자라는 뱅갈리가 건물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었다.

아사드게이트원예센타에서 하도 종자 이야기을 해서 나는 다카시내에서 흥농종묘와 서울종묘등의 씨앗을 샀다. 그리고 아사드게이트의 원예샌타에 가서 흥농종묘 고추을 말릭들이 뿌렸는데 너무잘 자랐다. 원예센타에서는 흥농종묘인가 이야기 안하고 한국고추하면서 팔았다. 그때 씨앗은 한국국제협력단에서 보낸 준것이 아니라 내가 다카의 종묘가게을 돌아다니다 내 생활비에서 산것이다.

그 다음에 온 코디네이터가 우리 원예센타의 직원과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바라냐 했더니 건물을 지어달라고 했단다. 원예센타의 사무소가 낡기는 했다. 한데 말릭들의 일을 하는 연장이 더 문제 였다. 내가 보기에는 전정가위는 용수철이 튀어 날 정도로 낡았었고 물을 긁는 것도 없이 앉아서 일하고 봉사자 파견은 그래스루트들과 소통이고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아는것이라 했다.

내가 하급공무원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무리나라도 보면 건물을 너무 많이 짓는다.그래서 새마을 금고 협회에 제안을 했다. 도로닦고 건물짓는 것도 좋지만 농업현장에 필요한 농업기술과 지원을 하고 가공공장도 짓는 등 말이다.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비료을 많이 생산하게 되어 각 나라에 비료지원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시멘트 중화학공업이 시작이 되면서 시맨트가 과도하게 생산되어 각 마을에 시멘트을 나누어 주었다고한다. 이 시멘트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하다가 마을에 도로을 만들고 다리을 놓고 그러다 집을 고치는 일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한 동안 대전인터넷신문에서 보도자료을 올리다가 부동산분양임대을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고 각나라의 원조기구와 un과 uli등을 인터넷으로 접속도 하고 인도의 건설자재회사도 접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눈이 안좋아 컴퓨터의 모니터가 안좋으면 안된다. 사무실의 모니터가 안좋았던지 시력이 이상이 잠시 왔었다. 그래서 주위을 보니 udea라느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어 있었다. 동네 공무원들이 쓰는 컴퓨터는 레드스톤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부탄 UNV나가기전에 산 삼성노트북은 모니터가 좋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노트북을 샀었다예전에 지역신문사에 오퍼레이터들은 평상시에는 놀다가 원고마감이 되면 바빠졌다. 눈이 안좋다고 회사에서 모니터 화면 보조기을 설치해 주고 했었다.그때는 원고을 잘쳐달라고 오퍼레이터에게 잘 해주던 시기다. 오퍼레이터가 원고을 치면 이메일로 전송해 사진식자을 받아오면 그 사진식자을 편집기자가 편집하고 취재기자들은 그 편집된 기사들을 교정했었다.

지금은 인터넷신문에는 편집기자나 교열기자나 취재기자가 없다. 다 한다.1990년에 하티텔잡지을 보니 홍콩에서는 일인미디어가 있다고 소개 했다.

부탄에서 농민들이 유시팡 RNRC을 찾았을때 이들을 위해 각국제기구나 농업성에서 만든 비디오을 이들에게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었다. 그곳에서는 하급 현장에서 근무하는 분이 그랫다. 외국에서 소개되는 캐쉬작물을 재배해도 그것을 팔 시장이 없다고 불만을 터트렷다. 그곳의 팀퓨의 시장에는 상당수의 채소와 과일이 인도에서 수입이 되고 있었다.한데 국제기구에서 캐쉬작물로 소개한 작물들이 현장을 반영을 못하고 있었나보다.

나는 부탄에서 가서 생전처음으로 아스파라거스을 먹어보았다. 팀퓨시장에는 없는 채소였다. 누구집이엿냐면RNRC유시팡에 내 카운터 파트너로 그녀는 호주 아들레이드원예학과을 나왔다 했다.

그녀는 이야기 했다. 유시팡의 컨퍼런스에서 우리가 너을 부른것은 자기들이 배운 것과 자신의 나라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너희나라시스템이 우리와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이다.
그나라에서는 IELT5급인가 하면 외국으로 유학을 갈수 있다고 한다. 그당시에 그나라에 대학은 강그룽 하나엿다. 그들은 영어 성적에 따라 인도로 영국으로 호주로 싱가포르로 태국으로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다..그들은 자기나라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보다 영어가 편하다고 했다.그러면서도 정부에서는 서부탄언어인 존카어을 국어로 사용했다. 동부탄인들은 샤숍어을 하고 남쪽에 사람은 네팔리 언어을 사욯한다고 했다. 사무실에서는 그당시에 영어로 회의을 진행했다.

방글라데시에 있을때 영국봉사자 소식을 보니 어는 산파가 방글라데시 그람이라는 시골의 대나무집인 벰뷰집에서 애기을 받는 모습이 보엿다.당시 한인들은 다카시내을 잘 안나간다 햇다.그들은 굴샨과 바나니라는 잘사는 동네에서 잘 안나간다.선교사들은 대개 이들 지역에 산다. 선교사들도 여러명 만나보고 수녀님들도 만나보았다. 다른 동기에 이야기을 들어보면 선교사들은 교육을 받을때 그지역에 유지들과 먼저 친해지라고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그친구는 선교사가 아님에도 디렉터들과 많이 만나는 듯했다. 그것이 일을 하기에 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랫을까 우리나라의 선교역사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전라도 지역에 양반들이 천주교을 많이 믿게되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실용주의 실학에 의해서 성경을 받아 들였다고 했지만 말이다.

전주에 가서 놀랜것은 조선테조의 경기전앞에 굉장히 큰 천주교성당이 들어서 있어서 놀랫다.누가나 평등하다고 한국에 교리을 전한 종교인데 왕권에 대한 ....

100년전으로 돌아간 듯한 절대 왕권국가인 부탄을 다녀와서 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그리고 슬픈 눈을 가진다. 과연 부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눈에는 한국이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나는 한국에서 많은 물품을 가져간 것도 아니요, 그나라의 제별들과 어울린 것도 아니요.그들 말로는 내가 부탄을 간지 6개월이 되도 내가 한국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외국인들처럼 표가 안났다. 처음에 야타라는 그나라 전통양모천을 사서 인도제단사에게 반코트을 맞춰입었다. 그 옷을 입은 나을 현지인이 나을 부탄사람으로 착각을 햇고 일본인이라고도 생각을 했단다.

아마그래서 현지사정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현지인은 같은 거리 택시비가 5타카인데 나는 20-30다카을 주고 탔으니 내가 나중에 중국에 이중가격제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된 계기을 ...
그때 택시기사와 싸워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느 요새 경제 사정이 안좋으니 저소득층에 대한 것에 대해서도 정부에 제안을 한다. 비록 거절되기도 하지만 말이다.물론 있는자의 생각도 어느 정도는 이해은 하지만말이다.

그래서 요새는 혼돈의 세상, 아노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그런데 인터넷도 소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나라에 일본인가 고학력자들이 시골로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기사을 읽은 것 같다. 우리모두 유토피아을 건설하자고 한다. 한데 유럽의 유토피아엿던 중남미도 너무 시끄럽다.





#에라스무스#유토피아#UN#NGO#지역사회개발


이전 12화주방평화가 가정평화와 세계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