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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Jan 09. 2024

나의 캐릭터를 바꾸려 한다.

좀 늦은 감이 있으나 100세 시대를 감안하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니 지금이라도,라는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캐릭터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한 데는 오늘 읽은 레빈슨의 '성인 발달 단계'에 대한 이론이 한몫했다.(그는 인생은 성인 이후에도 지속해서 발달한다고 했다. 내 나이가 속한 50대 전환기(50~55)는 다른 세대에 속한다는 지각이 생기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지속해 오던 일이나 관계에 의문을 가지고 성찰하고 분석해 보는 시기라고 했다.) 그리고 달달한 커피 한 잔이 허락된 도서관과 눈 내리는 풍경이 조금씩의 지분이 있다. 

50세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나의 캐릭터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50세 이전의 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애정결핍 어릿광대'였다. 그것은 막내이면서도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샘이 많은' 나의 성향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는 가족 중 누구를 샘낸 것은 아니나 사회에 나가서 많은 여자아이들을 샘냈는데 그 애들은 너무나 여자다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오빠 둘 밑에서 자란 나를 세 번째 남자아이쯤으로 여겨 오빠 옷을 물려 입히거나 오빠랑 같은 색깔이나 디자인의 옷을 사서 입혔다. 핑크는 없었다. 그 반작용으로 나는 50이 다 되도록 핑크에 집착했다. 아니 핑크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깔처럼 느껴졌다. 물론 어른스럽게 인디언핑크 아니면 복숭아 색깔처럼 유사 핑크 계열로 입긴 했다. 하여튼 핑크로 나의 여성성에 대한 열등감을 채우려 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웃음으로 때우게 되었는데 그 캐릭터가 '어릿광대'다. 이유 없이 헤실헤실 웃었는데, 남들은 못 웃기고 저 혼자서 웃어대는 어릿광대만큼 슬픈 것도 없다. 다행히도 착한 사람들을 만나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허허허 웃어주며 기꺼이 감정노동을 해주었던 친구, 가족, 동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 나의 글을 본다면 기쁘게 나의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조금 덜 웃고, 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입을 열면 뜻밖의 예리함과 생각 깊음이 엿보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색을 통해 단련된 지혜가 있으면 좋겠고, 조용한 결단, 은근한 추진력을 가지고 싶다.  

나는 멀리에서 보았을 때는 친절하고 싹싹하고 실력 있어 보이는데 가까워질수록 별거 없고, 의외로 차갑고, 알고 보면 실망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나는 친절한 사람이면서도 정작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겪어보면 더 좋은 사람, 아주 가까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맡을 수 있는 은은한 향기를 품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눈을 자주 바라볼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외양은 화려할 필요는 없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을 잘 조합한 질 좋은 옷을 입되 군살을 뺄 필요가 있고 이제 갓 자리 잡은 커트머리는 경쾌해 보이므로 당분간 유지하되 깔끔하게 정기적으로 염색하는 게 좋겠다. 


나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이야기하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긴장하면서도. 부족한 자기 정체성을 채우려는 고육지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성장을 지향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이것은 전반기와 동일하게 지속하기로 했다. 틈나면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특정한 이야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적확한 표현을 들으면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  '나도 그렇게 섬세하게 느끼고 예리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낀다. 책을 많이 읽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으면 좋겠다. 대신 아는 척하려고 책을 읽는 버릇은 버리려 한다. 책은 도구가 아니라 나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친구여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너무 정성껏 읽을 필요가 없고 몇 번 보다가 나랑 맞으면 그때 정성껏 읽으련다. 잘 맞지 않으면서 그래도 내게 이롭겠거니 하면서 나를 소진시키지 않으려 한다. 도서관에 쌓인 책들, 서점에 빼곡히 꽂힌 책들에 기죽을 필요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랑 잘 맞는 사람, 만나면 내가 기죽지 않는 사람, 나를 추켜올리지도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지속적으로 '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을 만나려 한다. 그냥 "너는 너야." 바위처럼 나는 둥근 부분도 있고 어느 지점에서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부분도 있음을, 깨지고 상처 난 부분도 있음을 알고, 그대로 놔두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의 MBTI를 묻거나 예측하며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조종하거나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좋겠다. 나 역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고 싶다. 그 사람은 매우 내향적이지만 오늘 유난히 외향적일 수도 있다. 그는(혹은 그녀는) 한없이 느림보거북일 때도 있고 터보엔진을 단 것처럼 유난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논평하지도 않고 유형화하지도 않겠다. 습관적으로 상대에 대해 논평하고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우습게 만들었던 적이 많았는데 그 태도는 오늘부로 버리려 한다.  

나의 후반전에게 격려의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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