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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Jan 16. 2024

바람구두(The Wishing Shoes)

온가족이 함께 읽는 장편동화

1화 이색 바자회     

바람구두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희경이네 학교가 주최한 이색 바자회 날. 매년 여름 희경이네 학교는 길 건너에 있는 중학교와 함께 이색 바자회를 열었다. 바자회 장소는 두 학교 사이에 있는 느티나무 공원이었다. 100살도 더 넘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올망졸망 귀여운 미니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해서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희경이는 며칠 전부터 그날만을 기다렸던 터라 신이 났다. 하지만 희경이 엄마는 산책 삼아 바자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 변신로봇 장난감! 희재 오빠도 저거 엄청 좋아했었는데… ’

중학생 오빠들이 팔고 있는 변신로봇 장난감 가게에는 남자애들이 잔뜩 몰려 있다. 가게 주인은 변신로봇 장난감을 정말 좋아했던가보다. 고장 난 것이 하나도 없다. 합체 로봇들은 대개 한두 개 없어지기 마련인데 7단 합체 로봇도 모두 다 있다. 중학생 오빠가 휘리릭 자동차에서 로봇으로 변신시키자, 구경하는 아이들이 “와~”하며 놀란다.

그 옆 가게에는 원피스와 캐릭터 인형을 팔고 있었다. 희경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중학생 언니가 미소 지었다. 중학생 언니는 자신이 그만할 때 입었던 드레스를 보여주며

‘귀여워. 나도 저렇게 귀여웠었나?’

옛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엄마 이거 사도 될까? 5000원이래!”

엄마도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선뜻 돈을 내밀었다.

‘정말 기대한 보람이 있네!’

조금 더 가니 초등학생들이 주인인 가게들이 나타났다. 희경이랑 같은 반인 수민이네 가게도 있다. 팔고 있는 소품들은 수민이 엄마 솜씨인 듯하다. 손뜨개로 만든 장식들과 키링, 핸드폰 가방은 여자애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중학생 언니들도 좋아한다. 가게 주인이 된 수민이는 손님이 자신의 가게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농구공, 축구공, 배드민턴 라켓 같은 스포츠용품들은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같은 반 남자아이 택연이가 서 있었다!

‘이크!’

희경이는 못 본 척 쓱, 지나갔다.

‘못 봤겠지? 내가 자기를 알아보고도 못 본 체하는 거?’

희경이는 신경이 온통 택연이에게 갔지만 달아나듯 세 가게쯤 통과해 버렸다.

“여기 마술 가게도 있어.”

희경이가 달려간 가게에서는 마술 도구들을 팔고 있었다. 상대의 몸에 대는 순간 불빛이 반짝 들어오는 장미꽃도 있고 휙 던지면 리본으로 변신하는 지팡이도 있었다. 이것저것 신기한 듯 만져보던 희경이는 신발 하나를 발견했다.  

“엄마, 이거 봐. 여기 이렇게 쓰여 있어. 바람 구두입니다. 이 신발이 맞다면 가져가서 신으세요.”

신발 앞에 붙어있는 쪽지를 희경이가 읽자 엄마는 눈을 크게 뜨며 생각했다.

‘응? 바람구두? 무슨 뜻이야?’

희경이는 상체를 숙여 가만히 구두를 바라보았다. 신발은 다른 소품들과 좀 어울리지 않았다. 마술 도구들이 장난스러웠다면 신발은 뭔가 진지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식은 딱히 붙어있지 않았지만 적당히 둥근 앞코에 발 볼도, 굽 높이도 적당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구두 색깔이었는데 가죽에 배어있는 은은한 연둣빛이 희경이의 마음을 그리운 어딘가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내리는 어느 호수처럼, 숲 속에 좁게 난 길처럼, 하늘에 뜬 무지개처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리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 이거 가져도 될까?”

희경이가 엄마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희경이 엄마도 구두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희경이의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한 번 신어봐. 크기가 맞아야 신지.”

신발을 신는 순간 희경이의 마음은 호기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딱 맞아. 그리고 아주 편해.”

그러는 사이에 마술 가게 주인인 듯한 아줌마가 다가왔다. 희경이가 아줌마의 눈을 보자, 아줌마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과 손짓을 보아하니 가져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희경이의 인사에 맞춰 엄마도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희경이는 구두를 신은 채 열 걸음쯤 걷다가 그 가게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줌마 미소가 조금 슬퍼 보이네…….’

희경이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정확히 3초 만에 잊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바람구두가 희경이네 집에 들어온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때는 희경이도 희경이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왜 바람구두라고 했을까? 엄마, 혹시 이거 요술 구두 아닐까? 있잖아, 이상한 앨리스에 나오는 날아가는 구두 말이야.”

희경이가 신이 나서 말하자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그 제목은 이상한 앨리스가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야. 그리고 요술 구두가 나오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지”

희경이 엄마는 틈만 나면 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래 맞아. ‘오즈의 마법사’. 그 구두가 어떻게 날더라?”

희경이가 묻자 엄마는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말했다.

“글쎄… 아마 구두 뒤축을 툭툭 쳤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야.”

희경이 엄마가 통통한 몸을 출렁이면서 뒤꿈치끼리 부딪치자 곰돌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희경이는 맨날 보는 엄마 모습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볼 것 같으면 많이 부끄러울 만한 동작이다. 희경이는 엄마의 동작을 보고 엄마보다는 더 가볍고 귀엽게 구두 뒤축을 부딪쳤다. 아까 신은 구두를 아직도 안 벗은 상태였던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도서관에 가서 ‘오즈의 마법사’ 책을 찾아서 한 번 읽어보자.”

“그래!”

도서관이라면 늘 엄마의 꾐과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 가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너무나 기쁘게 따라오는 희경이를 보며 엄마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라도 도서관에 가는 게 어디야. 이 기회에 비슷한 책들도 같이 읽혀야겠다.’

희경이는 열심히 책을 뒤져보더니 구두가 나오는 부분만 찾았다. 그래도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구두 뒤축을 맞부딪치면서 걷는 희경이에게 엄마가 말했다.

“그만해! 오늘 중으로 구두가 망가지겠다.”

그러자 희경이가 정상적인 걸음으로 토닥토닥 걸으며 말했다.

“이 구두가 요술 구두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내 생각인데 그냥 이 구두가 바람을 신은 것처럼 가볍다는 뜻일지도 몰라. 이 신발을 준 사람도 이 구두를 엄청 좋아했는데 아마 신발이 작아져서 내놓았을 거야.”

희경이의 조잘조잘 자기 생각을 말하는 목소리가 정말이지 갓 지은 흰쌀밥처럼 달콤하다고 희경이 엄마는 생각했다. 귀로 먹는 흰쌀밥이라고나 할까? 희경이 엄마는 괜히 행복해져서 희경이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넌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니?”

“응?”

희경이는 그날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날 온종일 엄마랑 희경이가 같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아무런 좋은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가 꽃다발을 선물했을 때라든가, 오빠가 생일 선물이라고 케이크를 사줬을 때처럼 특별한 날에나 보이는 행복 지수를 보이는 것이다. 보통 희경이와 온종일 붙어 있는 날은 짜증을 낸다. 이유 없이. 물론 이유가 있긴 하다. 도서관에서 앉은 자세가 구부정하다든가, 길가를 걸을 때 한쪽으로 안 걷는다든가, 독후감을 쓰는 글씨가 너무 작거나 너무 크거나 삐뚤빼뚤하다거나……. 어떤 날은 한 바닥 가득 쓴 글을 모두 지우다가 지우개를 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늘 엄마는 좀 특별한 것이다.

“엄마, 좀 이상하다.”

희경이가 싫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엄마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응? 뭐가 이상해?”

“엄마 기분이 뭔가 평소보다 훨씬 즐거운 것 같아.”

“그런가?”

엄마는 예쁜 웃음을 지으면서 사뿐사뿐 걸었다. 엄마의 걸음이 이렇게 가볍다니 신기했다. 마치 엄마가 바람 구두를 신은 것 같았다.          


2화 사랑받는 아이     


다음날, 희경이는 바람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다. 구두는 흐린 연둣빛에 그렇게 눈에 띄는 디자인이 아니어서 엄마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5학년 3반 교실에 들어가기 전 희경이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다듬었다. 옆 분단에 앉은 택연이 때문이다. 눈을 마주치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면서 어색하게 웃는 수줍은 성격의 택연이. 그런 성격도 마음에 들고 체육 시간이 되면 언제 그렸냐는 듯 공을 향해 돌진하는 반전 있는 모습도 좋았다. 다른 여자애들은 성격이 너무 수줍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희경이 생각은 달랐다.

‘너희도 좋으면서 괜히 좋아하는 마음이 들킬까 봐 그렇게 말하는 거지?’

희경이는 자기가 택연이를 좋아하니까 남들도 택연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택연이가 4분단 다섯 번째 줄에 앉아서 수업을 들을 때면 3분단 네 번째 줄에 앉은 희경이의 뒤통수가 보일 수밖에 없다. 그쪽을 바라봐야 교탁 앞에 서 계신 선생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경이가 어쩌다 뒤를 돌아보면 택연이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다. 희경이를 보고 있다가 그렇게 된 건지, 선생님 쪽을 보다가 희경이가 움직이니까 자기도 모르게 보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희경이 입장에서는 설레는 순간일 수밖에. 하지만 그것뿐, 둘은 서로 말도 붙여 본 적 없다. 택연이가 워낙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고 희경이는 또 희경이대로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러니 그날 일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라고 할밖에.      

희경이가 수업을 마치고 피아노 학원을 가려고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 택연이가 서 있었다!

‘교실에서는 말을 안 붙여도 밖에서 이렇게 우연히 만났는데 아는 척도 안 하는 건 이상하잖아. 외국에 여행 갔을 때 한국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사람이어도 한국 사람이냐며 반갑게 인사하는 것처럼.’

희경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너 어디 가니?”

택연이는 그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속눈썹이 살짝 떨리고… 그리고 살짝 웃는 것…….

“피아노 학원 가는데”

“엉? 너 피아노 학원 다녀?”

“응”

그때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와서 둘은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다.

“어디?”

“여기”

택연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 희경이는 정말 놀랐다.

‘맙소사, 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택연이가 다닌다니!’

희경이는 택연이 몰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피아노 학원은 희경이네 집 근처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학원에 둘이 같이 다니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희경아”

희경이는 택연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날 처음 들었다. 물론 필기도구를 가져오지 않은 택연이가 이론 공부에 필요한 연필을 빌리기 위해서 불렀을 뿐이지만. 그다음에는 고맙다는 둥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느냐는 둥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거의 일 년 다 되어가는 학급 생활보다 그날 하루 피아노 학원에서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들어간 시간이 비슷하니 나오는 시간도 비슷해서 둘은 나란히 피아노 학원을 나섰다.

“잘 가”

신발을 대충 신은 택연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희경이는 간단히 대답하고 대신 손을 흔들었다.

‘내일 만나. 이렇게 말할걸. 그럼 더 다정해 보이잖아.’

희경이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무렴 어때 내일도 있는데, 하며 통통통 집으로 뛰어갔다.

“다녀왔습니다.”

희경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엄마가 말했다.

“뭐야, 왜 벌써 와?”

“응? 왜?”

“오늘 영어 학원 안 가? 보강 있다며?”

“아! 영어 학원! 까먹고 그냥 왔네.”

피아노 학원에서 너무 신이 난 희경이가 자기도 모르게 집으로 왔던 것이다.

“온 김에 간식 먹고 가. 여기 앉아.”

엄마가 빠르게 키위를 깎았다.

“키위!! 아, 딱 맛있어. 너무 시지도 않고!”

“배고프지는 않아? 이것도 좀 먹어.”

갓 사 온 듯한 도넛을 먹고 있을 때 드르륵, 희경이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렸다.

“엄마! 오늘 영어 학원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왜?”

“중학생 언니 오빠들 중간고사 대비 특강으로 바뀌었대. 신난다.”

엄마는 조금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정해진 수업을 빠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피곤한데 씻고 쉬어라.”

“예~~ 자유다.”

기분이 좋아진 희경이는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엄마, 진짜 이상해.”

희경이 엄마는 진짜라는 말도, 이상하다는 말도 특별히 귀를 기울일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건 희경이가 늘 쓰는 말이니까. 그건 그냥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정도의 의미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오늘 희경이의 말에 귀를 쫑긋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제, 오늘 계속 좋은 일만 생겨. 그게 엄청나게 큰 행운은 아닌데 뭔가 기분 좋은 그런 일 있잖아. 그런 게 자꾸 생겨. 아,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네.”

엄마는 키위 껍질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좋은 일만 생긴다니 축하할 일이네. 네가 주워온 구두가 행운의 구두인가?”

그 말을 듣자 소파에 엎드려 있던 희경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짜네!!”

“어이구 뭐가 진짜야. 그냥 해본 말이지.”

엄마는 철없는 희경이가 귀엽다는 듯, 하지만 키위 깎던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는 듯 검지로 희경이 볼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아냐! 구두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구두를 신은 다음부터 뭔가 내 인생에 불편한 게 모두 사라지고 기분 좋은 일만 생겼어!”     

그 일 후에도 희경이는 늘 하는 것처럼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갔고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놀았다. 그런데 희경이는 너무나 다르다고 느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가뿐해서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씻었다. 그 덕에 엄마는 잔소리를 백 마디 정도는 생략할 수 있었다. 일어나라, 밥 먹어라, 양치해라, 가방 챙겼니, 불 꺼라, 시계를 보면서 움직여라, 준비물은 잘 챙겼니? 이런 잔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희경이 엄마는 웬일인지 희경이가 알아서 척척 잘하는 아이가 된 것 같다고 했고 희경이는 웬일인지 엄마가 잔소리를 안 한다고 느꼈다.

그다음은 학교생활. 수업 시간에 선생님 하는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어려워서 반만 이해되던 교과서 내용도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전개되었다. 읽다 보면 궁금한 것도 많이 생겨서 선생님께 질문하면 선생님은 기특해하시면서 설명해 주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잘하니까 아이들의 보는 눈도 달라졌다. 체육은 체육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뭔가 즐거웠다. 그리고 택연이…. 택연이와는 교실에서도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너 오늘 학원에 언제 갈 거야?”

이런 이야기를 건네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정말 바람구두가 ‘바람’을 이루어주는 요술 구두라도 되는 게 아닐까?     


3화 자유롭게     


그날은 희경이가 바람구두를 집에 놓고 간 날이었다. 체육이 들어서 운동화를 신고 갔다. 누구라도 밟을까 두려워 희경이는 신발장도 아니고 현관에 있는 거울장 위에 고이 모셔놓았다. 그 바람구두가 청소하던 엄마 눈에 쏙 들어온 것이다.

“얘는 이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여기에 올려놓을 게 뭐람.”

이렇게 중얼거리며 신발장에 신발을 넣으려던 엄마는 갑자기 신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뭐야, 신발이 원래 이렇게 컸었나?”

왠지 신발은 엄마 발 크기에 맞을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호기심에 바람구두를 신어보았다.

“와! 딱 맞네?”

구두를 신은 채 양발을 번갈아 쿵쿵 걸어보면서 엄마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길고 좁게 붙어있는 신발장 거울에 비춰보았다. 희경이 엄마는 아주 잠깐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그 채로 바람구두를 신고 나갔다.      

문제는 그날 희경이 엄마 이소은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다. 저녁 일곱 시쯤 집에 들어온 희경이는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명을 켜고 소파에 앉았다.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가 곧 들어오겠지 하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삐삐삐삐 띠리링

현관문이 열린다.

“어? 너 혼자 있어? 엄마는?”

아빠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빠네? 난 엄마인 줄 알았는데? 엄마 어디 갔는지 몰라.”

“뭐야. 얘기도 안 하고 갔어? 이 사람이…. 그럼 밥도 안 먹은 거야?”

희경이는 그제야 시계를 보았다. 벌써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고파.”

아빠는 전화를 걸면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전기밥솥을 열어보고, 냄비에 물을 올리고, 라면 봉지를 뜯으면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엄마는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어휴, 엄마가 어디서 모임 하느라고 우리 예쁜 희경이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나 보다. 이런 무심한 사람 같으니….”

아빠는 애써 예쁘게 말하려고 했지만, 엄마가 얄밉고 괘씸하다는 표정이었다. 두 시간 동안은. 희경이랑 같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잔소리를 한 판 하려면 뭔가 깔끔한 게 좋을 것 같아서 설거지도 해놓고 식탁도 닦아놓은 상태에서 TV를 보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11시가 되어도 연락도 되지 않고 엄마가 돌아오지도 않자 아빠는 거실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장모님, 저 안 서방입니다. 혹시 집사람 오지 않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네, 네, 들어오겠죠. 뭐.”

아빠는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하고 오히려 희경이 외할머니께 이런저런 질문을 받느라 진땀을 흘렸다. 겨우 전화를 끊고 나자 독서실에 간 오빠가 들어왔다.

"데리러 못 올 것 같으면 연락을 주셔야죠. 계속 기다렸잖아요."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희경이 아빠는 아들 희재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아내가 해 온 일이었으므로. 엄마가 집에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희경이 오빠는 방에 들어가더니 여행 가방을 확인해 본다. 여행 가방은 큰 것도 작은 것도 모두 제 자리에 있었다.

“어떡하지?”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희경이 아빠는 희경이를 재우려고 했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은 얼른 자.”

그러지 않아도 피곤했는지 희경이는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화장실을 가겠다며 일어났다.

“아빠!!”

화장실을 다녀온 희경이가 현관에서 뭘 발견했는지 큰 소리로 부르자 희경이 아빠는 생각보다 많이 놀랐다. 쿵쿵쿵 소리가 나도록 달렸는데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빠는 층간 소음을 내지 않으려면 발꿈치를 들고 걸어야 한다면서 늘 잔소리했던 사람이다.

“왜?”

“내 구두가 없어졌어요.”

희경이 아빠는 한숨을 쉬면서 성의 없이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엄마가 내 바람구두를 신고 갔나 봐요.”

“뭔 소리야 네 구두가 엄마한테 맞기나 해? 잘 찾아봐.”

아빠는 희경이의 칭얼거리는 게 짜증 난다는 듯 대답했다. 희경이는 바람구두가 그냥 구두가 아님을 아빠에게 설명했다. 아빠는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딸까지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며 짜증스럽게 이마에 흩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침착한 척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자.”

‘바람구두가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의 소원(소원까지는 아니고 바람이라고 했지만)을 들어준다는 게 사실이라면 아내는 지금 어디로 간 거지? 아내의 바람은 뭐였을까?’

갑자기 희경이 아빠는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밤중에 아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생각할수록 까만 어둠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경이 아빠 안상수 씨는 이거밖에 생각 나는 게 없었다. 희경이 오빠 희재를 임신했을 때 광화문 어느 음식점에서 팔던 강된장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과 희경이를 임신했을 때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그때 초보운전으로 몇 번이나 주차장을 찾아 헤매다가 못 먹고 다른 거 먹었는데. 복숭아도 겨울철에 구할 방법이 없어서 복숭아 요거트라도 먹으라고 사줬던 것 같은데. 에이. 이게 왜 지금 생각난담.’

연이어 안상수 씨는 깨달았다. 여태껏 자신은 아내를 기다려본 적이 없다는 것, 언제나 기다리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 침대에 누운 아들 희재와 희경이도 그동안 엄마가 자신들을 기다리면서 준비해 주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사흘째 밤이 되었을 때 희경이 엄마 이소은 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희경이 아빠는 이틀 연속 휴가를 내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희경이 엄마를 찾아다니느라 지쳐있었다. 그 밤에 희경이도 오빠도 아빠도 모두 집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기에 모두 뛰어나갔다.

“엄마!”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정확하게 말하면 희경이 아빠는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지만.

“안녕~ 잘 있었어?”

희경이 엄마의 해맑은 표정에 세 사람은 어이가 없었다. 아기 같은 행복한 표정을 보니 화를 낼 수도 원망을 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냥 세 사람은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순전히 궁금한 마음으로 물었다.

“사흘 동안 어디에 갔다 온 거야?”

“그냥 여기저기. 그동안 여행하고 싶었던 곳에 갔어. 고궁도 가고 바다도 가고, 지난번 가고 싶다고 했던 산에도 가고. 그런데 진짜 이상하더라. 나 말이야. 그동안 집 떠나면 불안해서 엄청 힘들었거든. 집에 솥이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딱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야. 당신, 희재, 희경이 뒷바라지하면서 챙겨야 할 것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희재랑 희경이가 이제 많이 컸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도 되잖아. 그런데도 그게 안 됐어. 온 가족이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고 학원에 가는데도 나는 계속 집에 있는 거야. 어쩌다가 모임을 가도 마음이 조마조마하면서 누군가 자꾸 날 기다리는 것 같고.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거야. 내가 간 그곳 풍경이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닌데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어.”     

희경이 엄마는 그 일 이후 꿈을 찾았다며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집안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 남편 뒷바라지까지 할 일이 너무 많고 지친다면서 투덜거렸다면 지금은 청소기 돌리면서 영어를 듣고, 영화를 보면서도 영어를 하면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희경이랑 도서관에 가는 것도 꾸준히 하는데 이제는 사사건건 간섭하는 대신 자기 책을 읽고 있다.(희경이가 살짝 보니 그 책은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이었다. 영어와 역사가 접목되는 일은 무엇일까?) 가끔 희경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마음에 안 드는 글씨가 있으면 손가락으로 톡, 톡 가리킨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만 해도 희경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아서 지운다는 것이다.       

   

4화 홀로 선 여자     


희재, 희경이 엄마 이소은 씨는 바람구두를 신고 나가던 그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그냥 이소은 씨가 되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정체성'이라고 하는데 소은 씨의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확히 말하면 '회복'되었다고 할까? 그동안 희재 엄마는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의 요리사이자, 타이머이며, 옷을 골라주는 코디네이터이자, 하소연을 들어주는 상담사, 매일 밤 11시에 독서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운전기사 역할을 했다. 입시정보와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좋다고 하는 학원을 수소문하는 입시 컨설팅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 죄도 없이 꾸중을 듣는 억울한 심부름꾼 역할도 해야 했다. 희경이를 위해서도 비슷했는데 희재보다 까다로운 딸의 취향에 맞춰 쇼핑을 대신해 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이 좀 어려웠다. 새로 익힌 노래와 춤 솜씨를 뽐낼 때 열심히 손뼉 치는 열혈 청중 역할은 희경이 엄마로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어설픈 학생이었던 희경이의 학습 도우미 역할은 가끔 무리수를 두어 희경이도 엄마도 힘들었다. 이 모든 일은 희경이 엄마가 원해서 한 일이었고 진심으로 열심히 했다. 집안을 청소하는 것과 식물을 가꾸는 것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게 자꾸만 불어나는 화분들처럼 좋았으나 버거웠다.

간혹 희경이 엄마는 햇살 찬란한 주차장에서 제 그림자를 보며 멍하게 서 있고는 했다. 자동차 열쇠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차 키나 손가방을 잊고 온 것은 아니다.

‘이소은, 거기서 뭐 하니?’

몸매는 결혼 전보다 10킬로그램이나 불어있었고 구부정한 자세에 크지 않은 키가 더 작아 보였다. 이소은 씨는 주차장에서 길을 잃은 듯 제 그림자를 보고 중얼거렸었다.     

그랬던 이소은 씨는 바람구두를 신은 그날 현관문이 닫히는 띠리링 소리를 진군의 나팔소리 삼아 길을 나섰던 것이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앞에서 내렸다. 혹시 남편 안상수 씨가 떠올렸던 그 '강된장'을 잘한다는 음식점을 간 것은 아닐까? 아니,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간 곳은 시청 앞에 있는 오래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인지 소은 씨는 천천히 걸었다. 단청을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무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그리고 석조전이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석조전 앞에는 이름 모를 꽃이 연분홍, 진분홍 아름다운 변화를 보이며 피어있었고 그 꽃을 배경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조전과 그 앞에 초록빛 잔디밭과 흩어진 분수는 소은 씨를 어느 먼 나라에 온 것처럼 기분 좋게 해 주었다.

그 틈에 소은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실로 만난 지 10년도 넘는 친구였다. 친구와 30분 정도의 수다가 늘어지더니 소은 씨는 급히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소은 씨가 지하철로 이동하는 동안 김포공항 근처에 살고 있다는 그 친구는 급히 두 밤 잘 정도의 여행가방을 꾸렸고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소은 씨가 입을 옷도 넉넉히 챙겼다.     

"나 한라산 갈 건데. 같이 갈래? 제주도는 여러 번 갔는데 한라산은 한 번도 못 갔어. 애들이 싫다고 해서 맨날 한라산 둘레길 드라이브만 하다 왔거든. 가고 싶은데 못 가니까 자꾸 약이 오르더라고."

소은 씨의 이 말에 그 둘은 김포공항에서 실로 십 년 만에 만났고 함께 제주도에 갔다.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소은 씨는 강진에 놀러 가서도 다산초당을 앞에 두고 올라가지 못했던 것, 외국 여행을 갔을 때도 숙소 근처에 있는 유적지를 스쳐가야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자꾸 억울한 생각만 났는데 웬일인지 그날 소은 씨 마음에는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고, 그리고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은 씨의 마음은 잘 지어진 집처럼 아름답고 견고했다.     

     

5화 가슴 뛰는 일     


토요일 새벽 모두가 곤히 자고 있다. 어젯밤 축구 경기를 응원하고 나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다같이 늦게 잠들었던 까닭이다. 새벽달이 푸르스름한 별이랑 소곤대는 시간에 희경이네 집 현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현관에서 덜그럭거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집의 가장이자 아빠이자 남편인 안상수 씨다. 그는 그저 가족들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중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찍 일어날수록 아빠 혹은 남편의 부재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그럼 뭔가 원망을 들을 일도 많아지지 않겠는가?

‘얘들아, 제발 12시까지 푹 자라.’

희경이 아빠 상수 씨는 조기 축구회 모임에 나가는 중이다. 조기 축구회에는 상수 씨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같이 축구부를 했던 친구들이 있다. 현재는 축구와는 동떨어진 생계 전선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네에서 새롭게 편입된 아저씨들도 더러 있다. 처음에는 청년이었던 상수 씨 무리도 이제는 그 아저씨들과 구별이 어려운 중년의 남자가 되었다.

이제는 할아버지에 가깝다고 해야 할 조기 축구회 회장님은 며칠 전부터 문자를 보내고 어제는 전화도 했다. 요즘 회사일이 골치가 아파서 운동은커녕 걸을 힘도 없는 터라 자신은 없었지만 네, 네 대답은 하고 끊었다. 이상한 일이다. 대답하는 순간에는 의미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네'라는 말이 씨앗처럼 이 새벽에 상수 씨를 깨웠던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을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건에만 쓰지만 긍정적인 말들도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실천으로 옮기게 하는 힘이 있는가 보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축구화가 어디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찾아보고 없으면 그냥 러닝화나 등산화라도 신고 가야 할 판이다.

“아이고 허리야. 도대체 내 축구화는 어디에 있는 거야?”

상수 씨는 허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빠 여기서 뭐 해?”

언제 왔는지 잠에서 깬 희경이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잠에서 갓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는 사랑스러웠다.

“어, 희경아, 아빠 축구화 못 봤어?”

아빠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경이는 뭔가를 생각했다. 졸음기가 가득했던 희경이의 얼굴은 새로운 생각으로 잠이 완전히 깬 듯했다. 마치 세수라도 한 것처럼 산뜻한 표정이다.

“아빠, 이건 어때?”

희경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모았다. 거울장 위에 놓인 낯선 신발은 연둣빛 광택이 번쩍이는 게 축구화처럼 단단해 보였다. 안상수 씨는 그 낯선 신발을 들여다보았다. 신발 밑부분을 보니 뾰족뾰족 축구화처럼 생겼다.

“이런 게 있었나?”

안상수 씨는 손으로 신발을 툭툭 쳐보고 신어보았다. 아마도 아들 희재 것이려니 생각했다. 희경이와 아내 소은 씨가 신었다고 하는 바람구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 이렇게 좋은 축구화를 혼자서 신었다 이거지?’

상수 씨는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양발을 쿵쿵 걸어보고 가볍게 점프해 보았다. 가볍게 달리는 폼도 잡아보았다.

“좋았어!”

‘바람구두는 색깔은 늘 연둣빛이면서 모양과 크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나 봐. 신기해.’

희경이는 아빠에게 행운을 빈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띠리링,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아침 공기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맡던 그 공기가 아니다. 상수 씨는 축구장에 어떻게 갈까 망설였다. 차로 가면 5분, 걸으면 15분… 상수 씨는 허리를 좌우로 흔든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달릴 것 같아. 내 몸이 이렇게 가뿐했었나?’

아침 공기가 볼을 스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그동안 묵은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40대 후반의 배 나온 아저씨가 아니라 어제 텔레비전에서 보던 날쌘 축구 선수라도 되는 것 같았다.

“여~ 안상수!”

친구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축구장에 들어섰을 때 벌써 상수 씨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숨은 더 쉴 수 없을 만큼 가빴다.

“뭐야. 마라톤 했어? 왜 이렇게 젖었어?”

“몰라 오랜만에 달렸는데 와, 나 아직 안 늙었나 봐. 몸이 날아갈 것 같아.”

상수 씨의 허풍에 친구들도 그보다 더 나이 든 아저씨들도 하하하 웃었다. 밝게 웃는 상수 씨의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친구들은 생각했다.

그날 축구 경기가 어땠었는지는 모르나 그날 이후 상수 씨의 별명은 ‘조기축구회의 메시’가 되었다. 상수 씨는 그 별명을 얻은 후로는 그 이름의 명예에 어울리게 변해갔다. 회사에서 자주 피던 담배를 끊었고, 그리고 흡연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축구와 회사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상수 씨는 ‘이놈의 회사’가 아니라 ‘이놈’ 아니면 ‘저 놈’ 때문에 힘들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회사에서 자신의 책임도 아닌 일로 여러 번 업무 폭탄을 맞았다. 대표적인 ‘이놈’을 꼽으라면 제품 출시일을 앞당겨달라고 졸라대는 영업부 김 부장이다.

“참고서 시장 아시잖아요. 가뜩이나 신생 업체들이 밀고 올라오는데 제품 출시일마저 뒤처지면 저희가 백날 천날 영업을 열심히 뛰어봐야 소용없다고요. 밤이라도 새워서 제품 출시일을 무조건 앞당겨야 합니다.”

회의시간마다 김 부장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열변을 토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속내에는 이후 영업 실적이 저조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대기 위한 꼼수도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연초에 세워놓은 일정에 맞게 진행하는 것도 팀원들 눈치 보기 바쁜데 거기에 더 앞당겨달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편집부 수학과 과장인 안상수 씨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긴 하다. 문제는 팀원들이다. 성실한 팀장 따라 고생길을 걷고 있는 팀원들에게 간식들을 사 가며 보름 가까이 야근을 하고, 마지막 날에는 거의 밤샘까지 했는데…. 수학 참고서의 특성상 검토 일정을 무리하게 잡으면 사고(문제의 오류)가 날 위험이 커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랬는데 제품 출시일을 하루도 당기지 못했다. 바로 ‘저 놈’ 때문이다. 디자인팀 강 과장. 강 과장은 직급도 낮은데 뻣세기로는 사장급이다.

“말이 됩니까? 안 과장님도 진짜 그러지 마세요. 영업부는 원래 맨날 그렇게 징징대는 부서예요. 그거 다 맞춰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착한 게 좋은 게 아니라니까요. 에이 참.”

안상수 과장은 머릿속에서 김이 푹, 푹, 솟아 귓구멍이 얼얼했지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이 와중에 비위까지 건드렸다가는 제품 출시일을 당기기는커녕 연초 계획을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사람이 계속 회사에 다니는지 궁금한데 신기한 것은 그런 강 과장이 디자인팀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이유는 업무량을 조절하는 놀라운 방어 능력 때문이다. 편집부와 영업부의 온갖 외압에도 철옹성처럼 막고 서서 늘 적당한 업무만을 부서원들에게 배정한다. 그러니 부서원들 앞에서 늘 떳떳하다. 얄미운 강 과장이 목소리를 높여 부서원들과 낄낄댈 때마다 안상수 씨는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박차고 나와서 줄담배를 피는 것이다.

“에이, 이놈의 회사 그만두든지 해야지.”

그날도 안상수 씨는 회사를 그만두기는커녕 퇴근도 못하고 책상에 앉아서 남은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강 과장은 야구모자를 머리에 쓰고(날이 추워지면 카멜색 비니로 바뀐다) 가방을 어깨에 엇갈려 메면서 위풍당당하게 퇴근을 했다.

“자! 퇴근합시다! 능력 있는 사람은 칼퇴근!”

디자인팀 여직원들이 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편집부 팀원들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안상수 씨는 머리가 화끈거렸다. 제자리를 못 찾고 헤매는 기분. 이직한다고 해봐야 40대 후반의 남자가 갈 곳은 동종 업계요, 그곳이라고 업무 환경이 다를 리 없다.

‘그렇다면 퇴직이 답인가? 그것은 이직보다 더 막막하다.’

결국 말만 그럴 뿐 안상수 씨의 진로에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 피해의식이 어쩌면 강 과장을 더 밉상으로 보이게 하는지도 모르지.’

그랬던 안상수 씨였다. 이직과 퇴직 사이에서 방황하던, 아니 그만둘 수 없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괴로웠던 안상수 씨를 뜻밖에도 회사에 안착시킨 것은 조기 축구였다. 그날 새벽 연둣빛 축구화를 신고 나간 날부터. 한판 신나게 뛰고 나자 안상수 씨는 어렴풋이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안 과장님 지금 퇴근하십니까?”

엘리베이터에서 강 과장과 딱 마주쳤다.

“네”

안상수 씨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조기 축구회에서 오늘 친선 경기가 있어서요.”

그러자 강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야! 이런 분인 줄 몰랐는데 축구 하시는군요. 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시네.”

강 과장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오늘은 왠지 밉지 않았다. 시끄러운 목소리도 왠지 유쾌하게 들렸다.

“예, 저 중 2때까지 축구했었어요. 선수되려고요.”

‘이크, 말이 길어진다….’

안상수 씨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갑자기 강 과장에 대해 궁금해졌다.

“강 과장님은 매일 칼퇴근하시던데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저요? 디자인 학원에 갑니다. 요즘 최신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자기 계발 안 하면 금방 뒤처집니다.”

안상수 씨는 깜짝 놀랐다.

‘뺀지리 강 과장이 사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무지막지하게 약은 사람으로만 봤네.’

강 과장과 헤어지고 지하철을 탄 안상수 씨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 업무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어. 업무에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쏟으면 가정을 돌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내 건강도 망가지잖아. 그동안 해왔던 업무마저 힘겹게 느껴졌던 것은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이야.’

여유! 안상수 씨는 그것이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반드시 챙겨야 할 자신만의 생명 공간이었던 것이다.

‘축구, 가족, 자기 계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안상수 씨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편집부 수학과 업무가 느슨해지면서 팀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그들은 벌써부터 그러고 싶었는데 무진장 성실한 팀장 때문에 그렇게 못했던 것이다. 역시 젊은 사람들은 똑똑하다.    

      

6화 바람구두를 찾으러 온 희남 씨     


그날은 희경이의 오빠 희재가 중간고사를 마친 날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시험을 잘 보든 잘 못 보든 고생했으니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은 오빠가 원하는 대로 초밥뷔페에 다녀왔다. 모두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왔는데 어떤 여자분이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죄송한 말씀드리러 왔어요.”

여자분은 먼저 자신도 희경이네와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살고 있다며 정확하게 동호수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몇 달 전에 바자회에서 바람구두를 판 사람이고(정확히 말하면 공짜로 주었으니 판 것은 아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바람구두를 다시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내놓게 되었는데요 이제 오해가 다 풀려서 다시 그 구두를 가져가고 싶어요.”

희경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아빠도 희경이의 오빠 희재도 바람구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아빠와 희재는 아무에게도 이 구두가 자신의 어떤 바람을 이루어주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분도 희경이네 가족에게 바람구두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저희 엄마가 바람구두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여자분의 말에 희경이네 가족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렇게 무서운 힘도 발휘할 수 있단 말이야?’

희경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7화 임여분 할머니의 소원     


임여분 할머니는 그해 90세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열세 살에 광복을 맞았고 열여덟 살에 한국 전쟁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과 결혼했고 열 명 넘는 가족들을 위해 일했다. 처음 시집을 갔을 때 새 며느리를 들인 시부모님은 며칠 만에 며느리가 눈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나쁘게 타고났던 새 며느리는 그 길로 소박을 맞고 쫓겨날 뻔했다.

“그냥 데리고 살겠습니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새신랑은 갓 결혼한 새색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이대로 쫓겨나면 다시는 시집가지 못할 것을 불쌍히 여겨서인지 자신의 부모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계속 살게 된 할머니는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낳았고 소리 없이 살았다. 소리 없이 음식을 했고 소리 없이 청소를 했고 소리 없이 앓아누웠다. 어려서도,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늙어서도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임여분 할머니는 생각했다. 다섯이나 되는 아들은 한 번도 어머니가 큰소리 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들 다섯 중 한 아들은 30년 전에 먼저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도 임여분 할머니는 소리 없이 울었다.

괴팍하기로는 시부모님 못지않은 남편이었지만 단 하나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만을 고맙게 여기며 임여분 할머니는 자식 낳고 고생고생하면서 생애의 대부분을 부엌에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 괴팍한 남편이 먼저 저 세상에 가고 자식들은 모두 효자가 되어 말 없는 어머니를 닮아 말없이 봉양하기를 좋아했다.

“어머니, 어디 불편한 데 없으신가요?”

책을 좋아하는 큰 아들이 물었다. 이미 그 아들도 할아버지가 되어 장성한 손자를 두었다.

“어머니,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쌀집을 운영하던 둘째 아들이 물었다. 맛있는 것도 모르고 살아서인지 평생 마른 몸으로 살아온 어머니를 살뜰히 챙기고 싶었나 보다.

“어머니, 마당에 꽃 좀 보러 갑시다. 많이 걸어야 오래 산대요”

농업을 전공하여 꽃도 잘 알고 농사도 잘 아는 셋째 아들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셋째 아들은 엄마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진분홍 꽃이 피는 배롱나무도 심고, 박태기나무도 심고, 주황색 황매화도 심었다.

“우리 어머니 외국 한 번 가야 하는데 외국!”

형제 중 제일 부자인, 사장님이 된 막내아들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어머니를 외국물을 먹게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들 다섯 주르륵 낳고 그 끝에 낳은 귀하디 귀한 두 딸 중 큰딸은 요리 솜씨가 좋아 맛있는 반찬을 가져왔다. 작은딸은 예쁜 옷을 사 왔고. 이 정도면 임여분 할머니 참, 행복하겠다.     

그런데 임여분 할머니에게 근심 걱정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파서 에구구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디스크 수술인가를 해서 그래도 괜찮았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또 아파오는 게 아니겠는가. 기력이 없어 버스 타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기다리던 버스가 저만큼 앞에 서버리면 아무리 종종종 열심히 걸어도 버스에 가 닿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버스 타기를 포기한 지 몇 해가 되었다. 그나마 다니던 이웃집 마실도 어려워진 지 벌써 서너 달이 넘었다.

‘아마도 이러다가 죽는 게지.’

임여분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임여분 할머니는 죽는다고 아쉬울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었다. 다만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얼마나 아플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어떤 피해를 줄 것인지만 걱정했다. 평생을 소리 없이 아파오던 임여분 할머니는 이제 더는 소리 없이 아플 수 없다는 것이 큰 걱정이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머니의 한 마디에 아들 넷이 눈물을 흘리고 딸 둘이 야단을 하는 바람에 임여분 할머니는 이만 저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임여분 할머니가 ‘바람구두’를 만나게 된 것은 추석이었다. 마당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열리듯 임여분 할머니를 찾아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 누가 신고 온 것인지 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인 바람구두가 임여분 할머니 눈에 어렸을 적 신었던 당혜처럼 보였다. 예쁘게 비단으로 수놓은 꽃신.

“참 곱게도 생겼구나.”

임여분 할머니는 방싯 웃으면서 그 비단구두 아니 바람구두를 신어보았는데 그날로 할머니는 허리가 꼿꼿해져서는 신명 나게 산책을 하게 되었다.

“야야, 우찌 이리도 꽃이 예쁘던고. 내 평생에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본다.”

평생을 눈 어둡게 살아오던 임여분 할머니는 큰아들의 큰딸이 열다섯이 되어 안경을 맞췄을 때 조금 세상이 밝아졌었다. 그때 손녀딸의 안경을 한번 얻어 써보고는 잘 보인다며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서 시어머니 안경을 맞춰준 사려 깊은 큰 며느리 덕분에. 그러나 눈의 밝기로 치면 그것은 비할 바가 아니다. 꽃도 꽃이려니와 아들, 딸, 손자, 손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증손자인 아기의 꼬물꼬물 한 손가락을 보다가 주르륵 침을 흘리고 말아 임여분 할머니는 '에구머니나'하며 부끄러워했다.

할아버지가 된 큰아들의 손을 잡고, 마당을 걷다가 이제는 마을도 나갈 수 있겠다고 하며 할머니는 아장아장 마실을 나갔다.

“엉굴 댁, 이게 얼마만인교? 이제 살 만한갑제?”

이웃에 사는 할머니들이 느티나무 정자에 앉아서 오목해진 입으로 합죽, 웃으며 말을 건넸고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하모, 이제는 저 하늘까지 날아갈 것도 같다. 참으로 가뿐하네.”

할머니는 그렇게 산책을 다녀오시고 아들들에게 평생에 건넸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딸들에게 평생에 웃던 웃음보다 더 많이 웃어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일어나지 않았다. 주무시는 모습처럼 평온하게. 그날이 추석 다음날이다. 다들 장례를 치르고 슬픔에 빠진 중에도 큰며느리는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헌신하신 우리 어머니, 기일도 자손들 편히 모이라고 추석 때 돌아가신 거 보소. 아이고 어머니…”     

짐을 정리하던 끝에 임여분 할머니가 늘 입던 보라색 스웨터 주머니에서 쪽지가 하나 발견되었다. 맞춤법을 알지 못하던 할머니는 모든 글자를 소리대로만 적는 것을 대원칙으로 지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는데 많이 배우고 부자가 된 자식들은 아무도 어머니의 편지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그들아. 못난 에미 미테서 너그들이 고생고생 하던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맴이 무너지는구나. 괴팍한 아버지 미테서 뚜드려맞던 것도 못 마가주고 남들처럼 조은 옷 조은 음식 모태준 것이 평생에 한이 되어따. 허지만서두 너희를 애지중지하던 내 맴만은 세상의 그 어떤 에미에게 지지 않는다. 이제 내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가 모르것지만 혹여라도 내 맘을 전하지 못할까 하여 이 편지를 남기니 혹여 이 편지를 먼저 보더라도 나헌티는 아는 척하지 말아다오. 애지중지하고 애지중지한다. 창현, 창선, 창호, 창진, 그리고 귀남, 희남아. 그리고 먼저 간 넷째야….     

임여분 할머니의 막내딸이자 바람구두의 주인이었던 희남 씨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서는 눈시울을 닦더니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음에 준비가 안 된 채로 엄마를 떠나보내다 보니 그 구두가 싫었는데요. 생각해 보니 그게 엄마의 바람이었던가봐요. 더 오래오래 살아 아픈 소리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것보다 단 며칠이라도 안 아프고 행복하게, 자식들에게 다독다독 다정한 말도 하면서 살아보고 죽는 게 원이셨나봐요.”

사실 바람구두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가 죽음이나 삶까지는 가능하지 않다. 삶과 죽음은 '신발'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니까. '안 아프고 행복하게 자식들과 며칠이라도 지내고 싶었을 것'이라는 희남 씨의 해석은 정확하게 맞았다.     

“이렇게 가져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동안 우리에게 해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선물이에요. 감사해요.”

희남 씨를 따라 훌쩍이던 희경이 엄마 이소은 씨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희경이네 집에 오게 된 지 100일 만에 바람구두는 희남 씨 손에 들려 희경이네를 떠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 구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희경이는 야무지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희경이 엄마는 자유롭고 꿈을 가진 아줌마로, 희경이 아빠는 조기축구회의 메시로 살고 있다. 희경이의 오빠 희재는? 그건 희재가 비밀이라고 해서 밝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1월에 있을 학교 축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8화 코인노래방에 숨어든 희재     


찬바람에 떨어진 잎들이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이런 날에는 누구라도 길을 잃은 나그네 심정이 되어 집이 더욱 그리운 법인데 학생들은 둘씩 혹은 셋씩 어울려 집 대신 학원으로 가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스산함을 바스락거리는 과자 봉지로 덮느라 편의점은 북적였다.

희재는 교문 앞에서 친구 용준이와 헤어져 독서실로 들어갔다. 학원이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밤 11시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때맞춰 기다리는 엄마 소은 씨의 차를 타고 귀가한다. 10월 초 중간고사를 치르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수행평가들도 어느덧 마무리되어 가는 오늘 같은 날에는 쉬어도 좋으련만…….

딸그락.

옆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았지만 옆 사람은 힐끔 희재를 쳐다보았다. 독서실에 있다 보면 누구라도 예민해지는 것 같다. 희재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한다.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옆 사람도 이내 표정이 온화해진다. 누구라도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면 왠지 모를 기특한 마음이 들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까만 머루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다. 마른 체형에 늘 무표정으로 다녀 차갑게 보이지만 그 눈만은 새까마니 진중함이 깃들어 있다.     

“애들은 말썽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 사춘기 때 부모 속 엄청나게 썩였던 애들이 고등학교 들어가서 철들면 잘하잖아. 반대로 사춘기를 무난하게 지나간 애들 중에 고3이나 20대에 뒤늦게 사춘기를 맞아서 속 썩이는 경우가 있다니까.”

소은 씨는 엄마 모임에서 만난 용준이 엄마의 말을 자꾸 떠올렸다. 희재가 무난한 중학생 시절을 보냈던 것은 사실. 그래서인지 소은 씨는 아줌마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희재가 킁, 킁거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희재는 옛날부터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킁, 킁,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비염이 있는 아이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크게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다만 희재 엄마만 가슴이 서늘하여 아들을 살피게 된다. 아들의 마음과 아들의 스트레스를 짐작해 보는 것이다. 엄마의 센서는 늘 열 중 다섯은 자녀에게 달려있으니까.

희재의 변화 중에 희재 엄마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요즘 희재는 학교 화장실 문을 쿵, 발로 걷어차듯 연다. 그 행동이 과격하지는 않아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같이 다니는 용준이만 그것을 느꼈다. 평상시의 희재라면 손잡이를 잡고 부드럽게 민다. 뒤따라오는 용준이를 배려하여 손잡이를 잡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 부쩍 뒷사람도 생각하지 않고 발로 화장실 문을 걷어찼다.

쿵, 덜커덕…

그러나 그뿐 불평 한 마디, 흔히 하는 비속어 한 번 쓰지 않았다.     

“영어랑 수학이 또 4등급이네. 이런 건 선생님이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잖아.”

희재는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성적 상담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번번이 계산 실수나 시간 부족으로 문제를 틀리는 희재를 보고 나무라듯 말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수업 태도 좋은 희재가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잔소리이다. 두 문제만 더 맞히면 2등급, 한 문제만 더 맞혀도 3등급은 받을 수 있는데 문제가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아이들과의 상대평가에서는 4등급, 제자리다.

‘찬란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인생에 설레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희재는 저 혼자서 꾸짖는 사람이 되었다가, 꾸중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7시… 용준이를 부를까?’

희재는 용준이를 잠시 떠올렸지만 이내 포기한다. 분명 일정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 괜히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것도 번거롭다는 생각에 이르자 혼자서 코인 노래방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현란한 랩도 아니고 아이돌 댄스음악은 더더욱 아니다. 희재가 부르는 노래들은 유행한 지 10년은 넘었음직한 노래들인데 그 곡을 부른 가수는 미성의 하이톤이 돋보이는 것으로 유명했었다. 희재의 노래는 저음에서 가볍게 읊조리듯 시작하여 고음으로 가면서 힘 있게 나오는데 고음인데도 제법 소리가 매끄럽게 잘 나온다.

“그대 내게 오지 말~~아요. 두 번 다시 이런 사랑하지 마요…”

요즘 유행하는 곡도 몇 개 부른다. 곡들은 목이 쉬도록 고음으로 피치를 올리는 것들이고 가사들은 슬프기 짝이 없다. 실연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서 노래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용준이 엄마의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아무도 모르게 희재는 사춘기를 앓고 있다. 고3을 앞둔 11월에. 그러나 희재의 성향상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다. 그저 오랫동안 없어졌던 킁, 킁, 하던 버릇이 되살아나고 용준이가 눈치챈 것처럼 화장실 문을 발로 걷어찼던 것이다. 그런 희재에게 코인 노래방이 유일한 도피성이 되어온 지 벌써 한 달째. 희재는 편의점에서 저녁을 대충 때우고 그 한 시간을 이용해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희재의 상황을 고3을 앞둔 모든 학생들이 겪는 심리적인 압박감이라고 하며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고약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희재는  ‘외줄 타기’의 긴장에서 나가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다. 사실, 그 외줄 타기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야 할 것이다. 더 잘하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대학에 가면 좋아질까? 대학을 간다면 어떤 과를? 그냥 받아주는 대학에 가면 될까?’

대답은 하나도 없고 의문들만 겨울비처럼 쏟아진다. 겨울비를 맞은 것처럼 희재는 춥다.     

그날은 월요일 아침이었고 용준이와 희재는 운동장을 통과해 교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축제 오디션 있는데?”

중앙현관 유리문에 게시물이 붙어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용준이가 하는 말이다. 학교 축제에 있을 장기자랑 오디션 홍보물이었던가 보다. 희재는 게시물을 힐끔 보고 표정 없이 지나쳤다. 오히려 곁에 있던 용준이가 더 오래 쳐다봤다. 희재는 중앙현관을 지나 오른쪽 복도 벽에 기대어있는 신발장으로 갔다. 엄마가 주말에 빨아놓은 실내화를 가방에서 꺼내 신는 순간 희재는 생각했다.

‘잘못 들고 왔나? 실내화 색깔이 왜 이래?'

실내화는 연둣빛이 살짝 돌았는데 막상 신어보니 늘 신던 실내화와 비슷한 착용감이어서 그대로 교실로 올라갔다.     

이상한 일의 시작은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서 어슬렁어슬렁 걷던 희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중앙현관 유리문 앞에.

‘두근거리는 당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마세요. 한 번뿐인 당신의 인생, 찬란하게 빛날 그 순간이 지금 당신 앞에 있습니다.’

희재가 축제 오디션 홍보 문구를 읽고 있을 때, 누군가 옆에 서는 것을 느꼈다.

“같이 해볼래?”

희재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그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같은 반 여자 회장이었다.

“뭐라는 거야?”

희재는 그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표정만은 무심했다.

“같이 노래하자고. 너랑 나랑 듀엣으로.”

여자 회장 신아는 손가락으로 홍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희재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희재의 표정은 가히 특기할 만한 변화이다. 무표정에서 특정 감정으로의 변화니까.

“잘은 모르지만 너 노래 잘할 것 같아.”

신아는 한 문장을 말하는 중에도 여러 번 표정을 바꾸었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 뭔가 상상하는 표정, 그리고 기대하는 표정, 그리고 마무리는 즐겁다는 듯한 미소. 희재는 신아의 그런 표정의 변화를 보면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풍부할 수도 있구나.’

신아를 멍하니 보고 있던 희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노래할 건데?”

무슨 노래를 할 거냐고 묻다니 같이 나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 의미를 알아챈 신아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며 두 번 깡충깡충 뛴다.

사실 신아는 희재가 노래 잘할 것 '같아서' 제안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한 달 가까이 희재가 코인노래방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희재는 몰랐지만 세 번이나 신아와 동선이 겹쳤던 것이다. 어느 날은 코인노래방 옆방에서 희재의 노래를 감상하기도 했고. 그날 희재도 혼자 온 것으로 보이는(아니 들리는) 옆방의 어떤 여자아이의 노랫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야, 편의점 갈 거야?”

용준이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응, 갈 거긴 한데… 그전에 들를 때가 있어.”

그러면서 희재가 살짝 웃었다. 뭔가 안 해본 일을 처음 할 때 짓는 쑥스러운 미소이다. 그날 희재는 용준이를 놀라게 했다. 희재는 축제 담당 선생님인 음악 선생님께 오디션 신청서를 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람처럼 침착하게 신청서에 부를 곡명을 적었다. 음악 선생님도, 그 곁에 앉았던 희재의 담임선생님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오~~~ 희재! 노래 부를 거야? 어머~ 신아랑 같이 부른다고?”

이상한 일이다. 웬만하면 웃지 않았던 희재는 그날 음악 선생님 앞에서도, 담임선생님 앞에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희재의 마음은 희미하지 않았다. 희재는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축제 날 희재와 신아의 노래가 어땠었는지는 그다음 날 교실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희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소보다 살짝 늦은 시간에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 문이 열리자 아이들 함성이 들렸다. 친구들이 우르르 희재에게 몰려왔다.

“이 숭악한 놈!! 이런 실력을 우리한테 숨겼어?”

아이들은 마치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듯 각자의 감상을 내놓았다. 사람은 누구라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지나 보다. 음색이 부드러웠다, 곡의 절정인 고음 부분의 소리가 끈질기고 깨끗해서 압권이었다, 그런 고음이 그렇게 커다랗게 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거냐, 감성 천재다.

그날 아이들의 격렬한 반응에 희재는 그저 무심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평소와 조금 달라진 게 있었으니 앉아 있는 책상과 보고 있는 책이 예전처럼 갑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차가웠던 겨울비가 그치고 문득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9화. 나를 부르는 소리     


용일 씨는 실개천으로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아침 안개에 가려 이 세상에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오면 비로소 모습이 보여서 용일 씨도 마주 달려오던 사람도 흠칫 놀란다. 그러나 그뿐 용일 씨는 또다시 아무도 없는 안갯속을 달리고 있다. 그때 뒤에서 작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향기도 난다. 국화꽃 향기. 그것은 용용이에게서 나던 냄새다.

“웡! 웡! 웡!”

용일 씨는 볼에 힘을 잔뜩 주고 들리지 않는 척하며 계속 달렸다.

‘돌아보면 안 돼. 저건 용용이가 아니야.’

용일 씨 이마에서 운동으로 인한 더운 땀과 긴장으로 인한 식은땀이 범벅이 되었다. 한참을 달리던 용일 씨는 갑자기 덜컥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엇인가에 배신당한 듯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린다. 그 냄새는 용용이 냄새가 아니라 땀에 젖은 자신의 냄새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용일 씨는 용용이에게 버림받은 기분이다.

‘용용이는 죽었어.’     

용일 씨는 아내도 있고 키가 자신만큼이나 큰 중학생 아들을 둘이나 둔 아저씨이다. 꾸준한 달리기로 단련되어 건강해 보이는, 꽤 보기 좋은 남자 어른이다. 하지만 말이 나와서 그렇지 아내는 용일 씨가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시선 한 번 안 준다. 쉰 살 넘은 남자의 신세가 그렇다. 아침에는 아이들 등교시키느라, 저녁에는 아이들 공부 봐주느라 아내에게 용일 씨는 찬밥이다. 아내는 반찬도 아이들이 먹지 않아서 남는 것으로만 권하고, 옷도 아이들이 안 입는 옷을 입으라고 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내가 입더니 중학생이 되어 덩치가 용일 씨와 비슷해지니까 절차가 번거로운 환불이나 교환 대신 용일 씨더러 입으라고 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안 먹는 반찬이어도 맛없는 것은 아니니 맛있게 먹었다. 옷도 새 옷이니 싫을 것 있나.

‘그래도 뭔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용용이 너의 사랑만 한 게 없다.’

용일 씨는 생각했었다.     

용일 씨가 퇴근하여 집에 올 때면 타고난 후각과 청각으로 용일 씨를 알아보고 현관문에 앞다리를 올리고 있다. 문을 열 때마다 달려드는 용용이의 앞다리가 몇 번이나 용일 씨의 바지를 더럽히고 용일 씨가 용용이를 밟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는데 용용이는 한 번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용일 씨도 엘리베이터에서 후다닥 뛰어내려 현관 비밀번호를 신속하게 누른다. 용용이가 꼬리를 흔들며 힘들게 두 다리로 서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런 거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이름이 용용이인 까닭도 용일 씨를 극도로 좋아하는 이 동물의 충정을 높이 기리기 위함이다. 용용이는 ‘용일 씨, 용일 씨’의 줄임말이다.

“용용아 산책 가자!”

이 말만 듣고도 용용이는 마치 멋진 군인처럼 문 앞에 서 있다. 용일 씨와 용용이는 새벽 달리기 친구였다. 몇 번을 꾀어도 한 번 올까 말까 한 아내나 아들들과 달리 용용이는 한 번도 그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한 번은 용일 씨가 용용이의 목줄을 풀고 달린 적이 있었는데 둘 다 만족도가 높았다. 자유롭고 좋았다. 용용이는 똑똑하게도 용일 씨의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빨리 달리면 용용이도 빨리 달렸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면 용용이도 멈춰 서서 헉, 헉, 콧바람을 내뿜었다. 언제라도 그가 출발하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용일 씨만 바라본다. 키 작은 짐승이 우러러보는 그 각도에는 언제나 미묘한 감동이 있다.

달리기 경로는 딱 두 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나마도 붐비지 않는 단지 안 도로라 용용이는 잘 따라왔다.

“용! 용!”

횡단보도를 먼저 건넌 용일 씨에게 기다리라고 짖을 때도 있었다. 뒤돌아보면 용용이는 지나가는 차들을 살피며 신중한 보행자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를 볼 줄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치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초록불로 바뀌어 차들이 멈추면 용일 씨의 손짓이 있기도 전에 달려온다. 용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어쩌면 아내보다 더 다정한 동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크! 이러면 안 돼!’

정말 몇 초도 안 되는 사이에 고개를 저었지만 말이다.     

그런 용용이가 자전거에 치였다. 일 년 전 그날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진 줄도 모르고 집을 나섰을 때 어둠을 달려오던 자전거에 치였다. 용용이는 조금 기운 없이 걸었지만 집에 와서는 주는 음식을 잘 받아먹었다.

“별 이상은 없다는데?”

병원에 다녀온 아내가 전화했고 회사에서 전화를 받은 용일 씨는 한숨을 돌렸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별 이상이 없다던 용용이는 먹은 것을 토했고 계속 잠만 잤다. 아마도 많이 놀란 것 같다고 그래서 많이 피곤한가 보다고 여겼는데…….

자고 있는 용용이를 한참을 살피다가 피곤한 용일 씨도 잠이 들었다. 얼핏 잠이 깬 용일 씨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위를 살폈다.

‘저런… 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네.’

생각만 할 뿐 일어날 기운이 없던 용일 씨는 일어나서 불을 끄고 잘까 아니면 그냥 잘까 하고 있는데 문가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용용이가 용일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운 없는 모습으로, 고요한 눈빛으로.

‘용용이가 일어났네? 이제 좀 좋아졌나?’

생각하며 용일 씨는 다시 잠에 빠졌다. 그런데 용용이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용용이가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나를 보러 온 거지? 정이 이다지도 깊다니.’

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울고불고하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용일 씨는 아무런 슬픔도 표현하지 못했다. 용일 씨는 어른인 게 힘들다고 생각했다. 용용이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는데 남자이면서 어른인 용일 씨는 의젓하게 행동하느라 눈물을 흘리지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작년 이맘때니까 벌써 일 년이 지났네? 그때가 메타세쿼이아와 벚꽃나무에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이 앞다투어 물들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서늘한 기운이 스며드는 그날의 느낌이 재현되던 날부터 갑자기 용일 씨 뒤에서 용용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웡! 웡! 웡!’

그리고 용용이의 국화꽃 냄새. 산책로는 노란 들국화가 여기저기 피어있던 터라 어쩌면 그 냄새에 용용이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몇 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달렸는데 그게 자꾸 반복되니까 가슴에 통증도 느껴졌다. 오늘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뒤돌아볼 때까지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맘껏 너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해서 병이 생겼나 봐.’

용일 씨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왜 이렇게 무리해? 출근도 해야 하는 사람이…”

용일 씨의 아내는 괜한 욕심이라 생각하며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내는 상상도 못 할 테지. 남편이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잃었다고 일 년이 지난 이 시점에 슬픔에 빠져있다는 것을. 애들도 이미 다 잊어버렸는데 말이다. 용일 씨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는 힘이지 힘! 못생긴 남자는 용서해도 운동 못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왕~”

땀에 젖은 몸을 휘저으며 말하자 아내는 그저 어이없어 웃을 뿐이다.

“하긴… 요즘 다른 아빠들 다 배 나왔다고 아줌마들이 난리긴 하더라… 그러고 보면 자기는 정말 뱃살이 하나도 없어. 진짜 부러워.”

이렇게 용일 씨는 아무 문제없는 남자가 되어 조용히 샤워부스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화이트 와이셔츠를 입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셔츠에 어울리는 신발을 찾다가 신었던 기억은 없는 어떤 구두가 용일 씨 눈에 들어왔다. 성인 남자라고는 용일 씨 한 명뿐이라 그는 자신의 것이려니 하고 그 구두를 신었다. 여러분도 짐작했겠지만 그 구두는 얼마 전 희남 씨 손에 들려 희경이네 집을 떠난 바람구두이다. 용일 씨는 바로 희남 씨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다녀올게~”

용일 씨가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선다. 문득 용일 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용용이가 꼬리를 흔들며 배웅을 하던 예전의 따뜻한 느낌이 용일 씨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요즘 조깅할 때 느꼈던 서늘하고 슬픈 느낌과 분명히 결이 달랐다.     

그날 낮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용일 씨가 동료들과 무리 지어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를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서 들고 회사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용! 용! 용!”

용용이 짖는 소리가 또 들렸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곰돌이를 닮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용용이가 또 용일 씨를 부르고 있었다. 용일 씨는 우뚝 멈춰 서서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침이 아니라 낮에도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증상이 더 심해지는 건가?’

용일 씨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였다.

“아, 귀여워!”

용일 씨가 얼음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때 같이 걷던 동료들은 뒤를 돌아보았고 이내 몸을 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용일 씨는 사태를 파악했다. 하얀색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용일 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면서, 하얗고 복슬복슬한 곰돌이를 닮은 모습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주위에는 용용이를 닮은 개 말고도 여러 마리의 개들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얘가 자꾸 말을 안 듣고 그리로 가네요.”

개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진땀을 흘리면서 개를 끌고 가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그 개는 말을 듣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개들이 많아?”

그때 용일 씨 눈에 여학생이 두르고 있는 띠가 보였다.

‘유기견 입양 캠페인’, ‘당신의 소중한 개를 입양하세요.’ 그러고 보니 주위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한 사람당 두세 마리씩 개를 데리고 있었다. 용용이를 닮은 그 개는 용일 씨가 주인이라도 되는 듯, 주인과 헤어지기 싫다는 듯 엉덩이를 쭉 빼고 마지못해 끌려갔다. 뒷모습도 영락없는 용용이였다. 좀 야위고, 털색이 더러워진 것 빼고는. 왠지 그것마저도 주인을 잃은 용용이여서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용일 씨는 여학생을 향해 달려갔다. 점심시간이 이제 5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 개가 유기견인가요?”

“네, 유기견 입양 캠페인도 하고 또 얘네들도 산책시킬 겸 데리고 나왔어요. 좀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제가 강아지 다루는 법을 잘 몰라서요.”

여학생은 개 때문에 시비라도 붙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용일 씨는 아주 빠르게 몇 가지 정보만을 묻고 회사로 달려갔다. 유기견을 보호하고 있는 센터의 위치와 전화번호. 그 이후 용일 씨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날 저녁 용일 씨는 가족들과 모여 긴급회의를 하게 된다. 회의 내용은 바로 하얗고 곰돌이를 닮은 아니 용용이를 닮은 새로운 강아지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였다.

“승승이는 어때 승승이?”

누군가가 말했다. 그 옆에는 이제 갓 목욕을 마친 강아지 한 마리가 제 털을 핥고 있었다. 오늘도 용일 씨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강아지를 데려온 것처럼 행동했다.      

    

10화. 공부 상처     


임여분 할머니의 막내딸인 희남 씨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올해 중3, 중2이다. 그중 큰아들 이름이 승민이다. 농구를 즐기는 승민이는 키가 크고, 운동하는 아이들 특유의 뒤태를 자랑한다.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우선 등부터 다리까지 체형이 쭉 곧다. 등과 어깨가 굽은 아이들은 아무리 바른 자세를 해봐야 뭔가 어색한데 이렇게 체형 자체가 곧은 아이들은 어떤 자세를 해도 자연스럽고 멋지다. 좌우 대칭이 잘 이루어진 어깨가 가로로 곧고, 적당한 비율을 갖춘 팔과 다리가 세로로 곧아서 누구라도 딱 보면 ‘아, 참 뉘 집 자식인지 잘생겼다’ 할 것이다.

승민이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에 한 번도 화를 내본 적이 없다.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대의 말이 마음속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 태생적으로 너그러운 아이이다. 승민이 아빠도 좀 그런 면이 있는데 용일 씨가 오랫동안의 노력으로 자기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라면 승민이는 처음부터 그런 아이처럼 보인다. 희남 씨는 아들을 보면서 어쩌면 용일 씨가 노력해서 이루어놓은 ‘너그러움’이라는 것이 유전되었는가 생각해 본다.

‘보고 배우는 거지.’

용일 씨와 큰아들 승민이에 비하면 희남 씨는 좀 신경질적인데 그런 면을 승민이 동생 예민이가 물려받았다.

‘정말이지 이름이라도 바꿔야 할까 보다.’

가끔 희남 씨는 둘째가 태어났을 때 왜 이름을 ‘예민’이라 지었었는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여튼 동생 예민이는 이름처럼 ‘예민’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기질상으로 치면 희남 씨를 닮았다고 하겠다.

‘그럼 예민이는 나를 보고 배웠다는 말이 되는데… 나는 저 정도는 아니잖아?’

희남 씨는 괜히 자기 탓인 것 같아서 뜨끔했다.

다시 승민이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운동 좋아하고 성격 좋은, 그리고 잘생긴 승민이는 그래서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다. 특히 1학기 말에 있는 교내 스포츠대회가 있게 되면 거의 스포츠스타로 등극한다. 승민이네 반이 경기를 하게 되면 아이들은 급식도 뒤로 미룬 채 농구장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몰려든다. 보통은 담임선생님 정도만 참관하는데 왜 그런지 선생님들도 바쁜 업무를 뒤로 하고 경기를 즐긴다.      

그러나 승민이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그늘이 있다. 희남 씨도 모르는 그늘. 그 사건은 희남 씨에게는 과거시제였으나 승민이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날의 승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쪽으로 개발된 것일 뿐, 자신이 점령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아픔이 있다고 하겠다.

승민이가 그 학원에 등록했던 것은 6학년 때였다. 희남 씨는 자녀 공부에 열혈은 아니지만 큰 흐름은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애들이 다 영어학원 다니는데 우리 애만 안 다녀봐. 어떻게 되겠어?’

정확히 이 정도의 마음으로 남들 다 시킨다는 공부를 시켰다. 알파벳과 파닉스는 학습지로 시켰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영어학원을 보냈다. 문제는 그 학원이 셔틀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인데 초등학생에게는 그게 번거롭고 힘들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새로 생긴 엘리트교육을 지향한다는 영어학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좀 차려입고 왔어야 했나?’

소탈한 희남 씨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원장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림에 우아한 말투가 돋보였다. 레벨 테스트 결과 승민이는 그 학원에 입학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 입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학년보다는 2개 학년 낮은 아이들과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레벨은 더 빨리 올라갈 수도 있으니 결국 승민이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며 원장은 승민이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은 이 학생을 받아서 원생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학원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과감히 떨어뜨릴 것이냐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승민이는 그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고 희남 씨는 지난번 학원보다 10만 원은 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원은 소수 정예로 가르치고 지독하게 가르치기로 유명한 학원이었다. 초등학생에게도 매일 50개의 영단어를 외우도록 하고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나머지 공부를 시킨다. 밤 9시까지 나머지 공부를 진행했는데도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날로 이어진다. 주말에는 자습실을 운영하는데 한 주 동안 통과하지 못한 단어 시험의 재시험도 있다. 단어 공부만 볼 때 그렇다. 거기에 요일별로 다른 교재들에 숙제들이 주르륵 딸려오고, 리딩 교재도 추가된다.

승민이는 그것을 정말이지 겨우, 겨… 우 따라갔다. 그리고 종종 학원을 빠졌다. 학원을 빠졌던 이유는 학급 대항 농구시합이 있거나, 학급에서 단합대회가 있거나(선생님이 주최하시는 것이므로 승민이는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서이다. 문제는 그럴 때 수업 보강은 물론, 그날 외워야 했던 단어들도 그대로 주말로 미뤄진다. 수업을 빠지지 않는 학생들도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었으니 승민이는 어땠겠는가? 공부는 점점 더 밀리기 시작했다. 수업 담당 선생님, 그날 나머지 수업 선생님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비싼 수업료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주말 보강과 자습 지도를 담당하는 원장은 구박에 가까웠다. 물론 선생님들은 그 모든 것이 승민이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고 승민이도 본인이 못 따라가서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에게 6개월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거다.     

희남 씨는 이 모든 것을 몰랐다. 그저 승민이가 학원을 빠지면 주말에 보강을 하니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어머니, 승민이 학업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네?”

학원 원장의 가시 돋친 말을 듣고 희남 씨는 어이가 없었다. 원장은 승민이의 학업 태도가 문제가 있으며 개선하지 않을 시에는 심각한 학업 결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희남 씨는 그 순간 기분이 싹 나빠졌다. 대답만 네, 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승민이가 돌아왔다.

“승민아, 잠깐 이리 와볼까?”

희남 씨는 승민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했다.

‘이토록 예쁜 우리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대접을 받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심각한 학업 결손이라니 도대체 뭐가 문젠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일단 승민이에게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희남 씨는 생각했다.

“영어 학원에 다니는 거 힘들어? 공부가 엄청 어렵고 그래?”

이렇게 물었던 희남 씨의 태도는 이후 이 둘의 관계에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살짝 여러분께 알려드린다.

학원 선생님이 전화했는데, 도대체 네가 어떻게 공부했길래 그런 전화를 받게 만드니? 너 공부 제대로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그때 만약 희남 씨가 승민이에게 이런 식으로 물었다면 둘의 관계는 많이 멀어졌을 것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이 힘들 때 보듬어주는 엄마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 그날 희남 씨의 온화하고 절제된 질문은 승민이의 무너진 마음을 쓰다듬어주었다.(사실 희남 씨는 자신의 예민한 기질을 아들을 위해 많이 절제했다.)

승민이는 가방을 바닥에 턱 떨구더니 큰 소리로 울었다. 무슨 말인가 마구 쏟아내는데 희남 씨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승민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만 느꼈다. 학원 원장의 가시 돋친 말들이 승민이에게 쏟아졌을 것을 생각하니 희남 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고 보니 승민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릿속이 새빨갰다.

희남 씨는 학원에 따지고 싶었다.

‘아니, 영어를 못하니까 그 비싼 돈을 주고 학원을 보냈지, 잘할 것 같으면 왜 학원을 보내겠어요? 학원에서 시킬 공부를 저한테 안 시킨다고 구박하니 어이가 없네요. 학원에서야말로 비싼 학원 값을 제대로 한 건가요? 애한테 상처만 주고? 교육을 전공하셨을 텐데 아이가 잘 따라오게 하는 방법은 안 배우셨어요? 애를 이렇게 나가떨어지게 하는 게 무슨 교육인가요?’

여러 가지 안 좋은 말들도 섞고 싶었지만 희남 씨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전화했다.

“승민이랑 이야기해 보니까 학원 공부를 따라가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아이가 잘하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네, 승민이가 너무 힘들어해서요. 학원은 당분간 쉬어야겠습니다.”

‘당분간’이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인 것을 원장도 알아들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상대를 기죽이는 기술만 뛰어났던 그런 학원 필요 없다고 희남 씨는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승민이는 사교육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때 너무 상처를 받았는지 희남 씨가 몇 번을 권해보아도 더 이상 학원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희남 씨는 그 학원과 다시 인연이 닿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예민이가 그 학원에 다니겠다고 할 때까지는.

‘하필이면 그 학원을 가겠다니.’

희남 씨도 승민이 못지않게 그 학원 차만 봐도 기분이 나빴다.

“다 다녀도 되는데 진짜 그 학원은 가지 마라.”

말리는 승민이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승민이를 괴롭혔던 그 학원 시스템이 예민이에게는 찰떡같이 맞아서 성적이 날로 늘었다. 예민이는 그런 혹독한 학원의 운영방식을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잘 해내고도 남아서 월반을 했다. 학원에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인재를 만났다며 전국 단위의 영재 발굴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 희남 씨는 예민이에게 의견을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야심이 끓어올랐다. ‘영재 발굴 프로젝트’란 학원 수강의 성실도, 학원에서 보는 테스트 결과의 합산, 전국에 소속되어 있는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인된 시험의 점수, 그리고 영어 에세이 제출이었다. 이게 1차 테스트다. 1차 테스트에서 선발된 학생들끼리 2차 영어 말하기를 겨루는데 주어진 주제에 대해 원고를 작성하고 외워서 발표하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엄마, 이거 하려면 저한테 원어민 선생님 한 명 붙여주셔야 해요.”

예민이는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구했는지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았던 희남 씨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희남 씨는 학원 선생님이 알려주셨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학원 입장에서도 우수 학생의 배출은 명예로운 것이 될 테니까.

예민이는 1차를 쉽게 통과했다. 기본적으로 학원 수강의 성실도와 학원에서 보는 테스트는 만점에 가까운 아이였다. 예민이가 말한 대로 원어민 선생님에게 에세이 작성 지도를 받고 말하기에서 발음 교정을 받고 난 후 예민이는 정말이지 ‘우수 학생’이 되었다. 일개 프랜차이즈 학원에서 뽑는 우수학생이라는 식으로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이 학원이 기본적으로 공부에 욕심이 많은 학생들이 오는 곳이라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예민이는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가 되었다. 희남 씨는 정말이지 기분이 좋았고, 둘째의 성장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방학에 예민이가 해외 연수 가는 거 알아? 응. 아니, 내가 돈이 어딨어. 비용이 거의 천만 원이라는데. 응. 학원에서 장학생으로 뽑혔잖아. 예민이가 그 학원 다닌 지 3년 정도 됐거든. 그런데 학원 열심히 다니더니 어느 날은 레벨이 막 올라가더라고. 그러더니 학원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뽑힌 거야. 호호호…”

희남 씨는 그렇게 호들갑 떠는 사람은 아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은 편도 아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이지 흥분이 되어있었던 게 분명하다. 언니인 귀남 씨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까지 한 것을 보면 말이다.     

희남 씨는 그 학원과 관련된 상처를 새까맣게 잊었다.

‘어느 것이나 맞는 애도 있고, 안 맞는 애도 있는 거지 뭐.’

그 학원에서 받은 상처는 오히려 오늘날의 성공을 더욱 달콤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집안의 경사 속에서 승민이도 예민이의 등을 두드리며 기뻐했다. 그러나 승민이는… 가슴에 상처가 더욱 짙어졌다.          


11화 도서관에 들어온 아이     


화요일 4교시 종료 5분 전. 승민이와 친구들은 최대한 빨리 밥을 먹고 농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벌써부터 아이들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선생님은 한참 설명을 하다가 녀석들의 영혼이 벌써 반은 급식실에 가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수업을 일찍 마쳤다가는 곤란에 처할 것을 알기에 억지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런 예시와 설명은 안 해도 되는데 말이다.

‘정말 아이들과는 무엇을 하든 권투 시합을 하는 것 같다니까. 내가 공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펀치를 날릴 녀석들. 수업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냈다가는 교실을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를 게 뻔해. 아니면 와글와글 떠들면서 뒷문에 바짝 달라붙어 있을 테지.’

선생님은 엄격한 표정을 짓느라 한쪽 눈썹을 일부러 올리고 있다. 그러나 4교시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생님도 표정을 풀고 수업을 마친다. 남자아이들이 우당탕 뛰어나가고, 남은 여자아이들은 쯧쯧쯧 혀를 찬다.

옆반은 무슨 일인지 종이 울렸는데도 선생님 말씀이 끝나지 않았다. 승민이는 텅 빈 복도를 뛰어간다. 운이 좋다. 오늘은 급식 줄이 짧아서 10분 만에 밥을 다 먹었다. 급식실을 나와서 농구장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저기 예민이가 지나간다.

“예민아!”

승민이가 큰소리로 불렀지만 예민이는 못 들었는지 지나간다.

‘밥 안 먹고 어디 가는 거지?’

승민이가 몇 걸음 따라가며 보니 예민이가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으… 징한 놈… 점심시간에도 도서관 가냐? 아우 마스크는 안 답답하나?’

승민이는 독감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이 끝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예민이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농구하러 갔다.     

한편 예민이는 승민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친구들과 뭉쳐있는 형에게 혼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못 들은 척했다. 예민이가 도서관에 온 것도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밥을 먹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사서 선생님은 조용히 손을 흔들어주셨지만 예민이는 못 본척했다. 자리에 앉은 예민이가 요즘 보는 책은 위인전이다. 딱딱한 것은 아니고 만화로 된 시리즈물이다. 글밥이 많아서 꽤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는다. 수행평가나 학원 숙제가 있는 날에는 그것을 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딱히 할 것이 없다.

“밥 안 먹어?”

사서 선생님이 조그마한 쿠키를 주면서 말을 건넨다.

“네, 줄 서기 귀찮아서요. 끝나고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대답도 단정한 학생이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때면 또박또박 이야기도 잘하고, 애들이 말을 걸어도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없다. 예민이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얼굴이 뽀얗다. 거기에 공부까지 잘하니 뭔가 잘 깎아놓은 알밤처럼 미운 데라곤 없다.

그러나 복도를 걸을 때 벽면에 거의 어깨가 닿을 만큼 치우쳐서 걷는 모습은 왠지 외로워보인다. 걷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그 곁에 친구가 없어서이다. 아이들은 학기 초가 되면 ‘친구’를 만드느라 신경을 곤두세운다. 한두 주 지나면 그 관계는 대체적으로 정리가 되는데 아이들은 서로를 잘도 알아보고 무리를 짓는다. 이러한 무리 짓기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활동인데 예민이는 웬일인지 그 일에 미숙하다. 스포츠클럽을 할 때나, 모둠을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냥 즉석에서 옆에 있는 아이에게 “나랑 할래?”하고 물으면 다행히 그 아이도 싫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뿐, 예민이에게 먼저 하자고 하는 아이들이 없고, 예민이를 챙기는 사람도 없다. 어른으로 치면 업무 능력이 뛰어나나 사사로운 관계는 맺지 않는 그런 사람인 셈이다. 누가 보면 계산된 대인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한 순간에만 인간관계를 맺는 그런 사람 말이다.

예민이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서로 돕고 사는 건, 자신이 혼자 할 수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굳이 번거롭게 같이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선생님은 자꾸 이걸 모둠으로 하라고 하시지?’

예민이는 모둠 활동 시간에 토의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이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예민이만 번거롭게 된다.

“내 생각에 답이 이거 아닌가 싶은데… 다른 의견 있어?”

아이들은 답이 없고 예민이는 적당히 정리된 것을 글씨가 반듯한 민수에게 적으라고 시키고, 발표는 목소리가 큰 수희를 시킨다. 수희는 눈치가 빨라 자신은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준 내용을 마치 아는 것처럼 유창하게 발표하는 능력이 있다. 예민이가 발표하는 것보다 수희가 발표하는 것이 훨씬 모둠활동이 잘 된 것처럼 보인다. 역할 분담이 잘 된다는 것은 그만큼 모둠활동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는 의미니까. 수희가 자신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눈치챈 다른 모둠 아이들이 짓궂게 질문한다. 그러면 수희가 당황할 틈을 주지 않고 예민이가 손을 번쩍 든다.

“같은 모둠이니까 그 대답은 제가 해도 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수희와 질문자, 그리고 선생님을 차례로 번갈아본다. 세 사람의 동의하에 예민이는 구원투수처럼 질문에 답변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지켜본 선생님은 생기부에 이렇게 기록한다.

‘수업 중 주어진 과제에 대한 태도가 진지함. 모둠 활동에서 모둠원들이 활동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독려함. 더불어 과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그 결과를 독점하지 않고 모둠원들이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점이 훌륭함.’

행동과 마음은 이렇게 다른 문제이다.     

사실 말이지 아이들에게 ‘친구’란 말장난과 몸 장난의 연속이며, 끝없는 수다와 웃음이 전부이긴 하다. 별거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별거 없는 것이 그들을 학교라는 답답한 공간에서 견디게 해주는 산소 같은 존재인 것이다! 예민이도 친구들과 말도 안 되는 농담이나 말장난, 혹은 몸 장난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런 농담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는 건지 예민이는 도저히 모르겠는 거다. 어느 날은 수업 시간에 어떤 학생이 한 농담에 아이들이 빵 터졌는데 그 이야기를 이해 못 한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다. 선생님과 예민이. 선생님은 궁금하다고 설명해 달라고 조바심을 냈지만 아이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예민이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학교라는 넓은 공간에 이토록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예민이가 점심시간을 내내 이렇게 외로운 섬처럼 지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서 선생님뿐이다. 오랫동안 도서관에 근무해 온 사람이라면, 거기에 조금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사서 선생님 보기에 예민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예민이는 책을 바꾸러 가다가 창밖을 보았다. 창밖은 농구장이다. 농구를 하고 있는 승민이는 벌써 땀에 젖어 있다. 머리카락에 붙은 땀방울 때문인가? 승민이가 움직일 때마다 빛에 반사된 땀방울이 반짝, 반짝인다. 골을 넣은 승민이의 웃는 모습은 예민이 눈에도 멋져 보인다.

‘저렇게 땀 흘리고 나면 수업 시간에 안 찝찝하나?’

예민이는 생각만 해도 등이 불편하여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든다.


12화 형제는 용감했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그 말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가 한마을에 살았다고 해보자. 둘이는 서로를 남몰래 좋아했다 치자. 어느 날 갑돌이와 갑순이가 우연히 마을 어귀에서 만났다. 마을로 가는 길은 하나라 둘은 나란히 걸었다. 하필 그때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나란히 서서 무지개를 보며 감탄을 하다가 갑돌이가 고백을 했고 그것을 계기로 둘은 연인이 되었다. 우연한 만남, 우연히 뜬 무지개가 그들을 연인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다. 그들의 오랜 열망이 그것을 통해 나온 것이다.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음’에서 ‘보임’으로의 도약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승민이와 예민이에게 일어난 변화가 우연히 만난 바람구두 덕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바람구두가 있더라도 그들의 열망이 없다면 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승민이가 거울을 보고 있다. 눈매가 부드럽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서인지 웃고 있지 않아도 웃는 인상이다. 승민이는 얼굴을 일부러 찌그러뜨려본다. 바보가 된다. 이번에는 화를 내는 모습을 만들어본다. 그 모습은 뭔가 화가 났다기보다는 화난 척하는 모습이 된다.

‘그때 내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어를 안 싫어하려나?’

승민이는 3년도 더 지난 그때 일을 생각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던 숙제들과 영단어들에 머리가 아팠던 그때 말이다. 예민이는 그 힘든 것을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어쩐지 자신의 머리가 나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무던한 나의 성격이 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닐까? 예민이는 머리가 좋아서 모든 상황을 예리하게 받아들이는 거고? 예민한 센서처럼 말이야.’

작년에 용용이가 죽었을 때도 그렇다. 승민이도 많이 울었지만 예민이는 열흘 가까이 말을 잃었다. 그 예민함의 깊이가 승민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서 승민이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예민이는 용용이랑 그렇게 어울려 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동생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다.

“야, 점심시간에 너 봤는데, 도서관 가더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예민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책상에 앉는 예민이가 신기할 따름이다.

“이 노무 자식, 좀 쉬어라.”

“나 학교 숙제 있어. 말 시키지 마.”

머쓱해진 승민이는 제 방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채팅을 하다가 온라인 게임에 집중한다. 승민이는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좀 부끄럽다.’

그러나 딱히 행동의 변화는 가져오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친구들과 연결되어 막 게임이 재미있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승민이와 예민이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이 있기까지는.     

“왜 울어?”

승민이는 놀랐다. 별생각 없이 예민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던 게 실수다. 누구라도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지만 그것이 예민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아이니까. 그러나 울고 있는 것을 보고서 모른 척하는 것도 우스울 듯하여 승민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예민이 옆에 털썩 앉자 진동에 승민이도 예민이도 같이 흔들린다.

“설명해도 형은 몰라.”

무슨 어려운 문제길래 그렇게 말하는 걸까, 승민이는 한 발자국 마음이 물러난다. 그래도 승민이는 무던한 아이가 맞다.

“그냥 들어나 본다고. 누가 해결해 준대?”

그러나 여러분, 정말이지 ‘영어 영재’인 예민이는 그저 열다섯 살의 여린 아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웃지 마시라. 사소한 문제라고 예민이를 놀리면 안된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 당신은 안 그런가?

예민이는 그날 체육 수행평가에서 ‘농구 드리블과 슛’을 치렀는데 6점을 받았다. 6점이란 수행평가 점수 20점 만점에 최저점이다. 그러나 예민이는 6점이라는 점수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니다. 10개의 자유투 중에서 한 개도 성공하지 못했던 그 순간 체육선생님이 보여주었던 곤란한 표정(선생님은 예민이가 얼마나 성실한 아이인지를 알고 있으니까.), 숨죽여 보던 여자아이들의 안쓰러워하는 표정, 그리고 ‘인생 참 공평하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남자아이들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빙글빙글 무한반복되어 지나간다.

“어떻게 한 골이 안 들어가냐고! 한 골이!”

승민이는 예민이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이제껏 지내오는 동안 승민이는 지금처럼 예민이가 동생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없었다.

“다음에 한 번 더 기회가 있어, 없어?”

승민이는 물었다. 보통 체육 수행평가의 경우에는 두 번의 기회를 주고 그중 나은 기록을 반영하거나 두 개의 평균값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있어…”

승민이는 정말로 의젓한 형이 된 느낌이 들었다.

“가자.”

“어딜?”

예민이가 물었다.

“어디긴, 농구연습장이지. 내가 가르쳐줄게.”

“나도 연습했어. 그런데 안 되는 거라고.”

예민이는 실패가 반복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냐, 넌 연습이 안 되어 있어. 내가 봐줄 테니까 일어나.”

승민이는 신발장을 둘러보고 예민이가 평소 신던 딱딱한 컨버스 대신 쿠션이 좋아 보이는 신발을 건네주었다.

“신발도 나름 중요해.”

예민이는 승민이가 신발을 빌려준 거라고 생각하면서 연둣빛 나는 농구화를 신었다. 신발은 쿠션감이 좋았다. 우선은 점프할 때 무릎과 발목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사라졌다. 예민이는 늘 의자에만 앉아있어서 그런지 운동을 하려고 하면 발목이나 무릎이 뚝뚝 소리가 나면서 신호를 보낸다. 운동하지 말라고. 그동안의 운동 부족으로 그럴 수 있다고 여겨야 하는데 예민이는 그 반대로 해석을 했던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승민이를 따라 예민이는 동생답게 아장아장 따라갔다.

형은 숙련된 코치처럼 잘 가르쳤다. 무릎의 반동, 손목의 스냅도 정확하게 가르쳐주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차례대로 훈련했다.

“1단계는 무릎의 반동!”

무릎의 반동만을 연습해서 슛의 성공률을 높인 다음 2단계는 손목의 스냅만을 연습해서 슛의 성공률을 높였다. 두 가지가 충분히 숙달되었을 때 한꺼번에 조합해서 할 수 있도록 했다. 예민이는 너무나 신기했다. 승민이가 농구를 잘하기로 유명한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감동의 지점은 승민이가 예민이 자신을 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승민이가 말했다.

“신기해.”

땀에 젖은 예민이가 말했다.

“뭐가?”

“공이 들어가는 게.”

앞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의 승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쪽으로 개발된 것일 뿐, 자신이 점령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아픔이 있다.’

이 구절에서 ‘승민이’를 ‘예민이’로 바꾼다면 어떨까?

‘오늘날의 예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쪽으로 개발된 것일 뿐, 자신이 점령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아픔이 있다.’

그렇다. 그 아픔이 예민이에게는 운동이다. 오늘 예민이가 속상해서 울었던 것도 단순히 농구 수행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기는 영역에서 열등함을 확인하는 순간의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예민이는 지금껏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반면 형 승민이는 일곱 살 때 두 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내내 타던 어느 날 동네 형이 타고 있는 두 발 자전거를 한 번 얻어 타던 것이 두 발 자전거를 타게 된 첫날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있는 승민이가 희남 씨는 두고두고 신기하다고 했다. 그러나 예민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자전거를 타기를 두려워했다.

“엄마가 잡아줄 테니까 한 번 타봐.”

한 번은 형 승민이와 엄마가 꼬드겨 아파트 단지 안 공터에 타러 갔다. 그날은 웬일인지 예민이도 용기를 냈다. 그러나 몇 번을 넘어지고 나더니 자전거를 내버려 둔 채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날 예민이가 했던 말은 희남 씨와 용일 씨에게는 두고두고 우스갯소리가 되었다. 물론 둘이 있을 때만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다 거짓말이야… 자전거는 세 번만 넘어지면 탈 수 있게 된다고 그랬는데… 나 오늘 10번도 더 넘어졌는데 못 타잖아.”

그것으로 예민이와 자전거는 인연이 끊어졌다. 승민이가 자라면서 점점 더 성능이 좋은 자전거로 갈아타면서 즐거워할 때마다 예민이는 애써 외면했다. 자전거를 못 타니 인라인스케이트는 엄두도 못 냈다. 희남 씨는 승민이가 신던 인라인스케이트 신발을 예민이가 물려 신을 거라 생각하고 비싼 것을 샀는데 사이즈가 작아져버린 인라인스케이트 신발들은 그대로 주인을 잃은 채 신발장에 숨어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잠깐의 교육으로 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예민이에게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승민이는 승민이대로 놀라운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농구를 가르치면서 동생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일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조언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동생을 보면서 가슴에 뿌듯함이 몰아쳤다. 그것은 동생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돕는 기쁨, 가르치는 기쁨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그 느낌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물건 같았다.

“형!”

“응?”

“나, 자전거도 가르쳐줄래?”

예민이는 무한한 신뢰와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승민이를 바라보았다. 예민이는 그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열망이 ‘계기’에 의해 가시화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더 있다. 승민이가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예민이의 코칭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형이 나한테 한 말이 영어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되잖아. ‘넌 연습이 안 되어 있어’라는 말 말이야. 여기 영단어 50개가 있어. 형은 이 중에 몇 개가 모르는 단어야?”

“한 30개쯤? 아니 35개?”

승민이가 기죽은 듯이 말했다.

“그렇지? 나는 이 중에서 모르는 단어가 열 개도 안 돼. 그러니까 이 50개로 같은 시간 안에 공부하고 시험 본다고 하면 누가 이겨? 당연히 내가 이기지. 결국 형이 그 학원에 적응을 못 했던 건 형이 게을러서가 아니야. 형 수준에 맞게 차근차근히 했더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면 나는 하루에 열 단어만 외우라고 시켰을 거야.”

이 말은 승민이에게 놀라운 전환점을 가지고 왔다. 이토록 쉬운 원리를 왜 깨닫지 못했을까?

‘맞아. 산에 오를 때도 사람마다 페이스가 다르잖아. 체력 좋은 사람이 안 좋은 사람에게 같은 페이스를 요구하면 심폐기능에 무리가 와서 죽을 수도 있다고. 내가 바보가 아니라 내게 맞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거야.’

이 위대한 전환점은 이후 승민이의 영어 공부에 방아쇠를 당겼다. 승민이를 위해서 박수를! 아 물론 예민이의 농구 수행평가를 위해서도!

예민이의 친구 관계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남자들은 공 하나로 친해지고 공 하나로 원수가 되고 심지어 공 하나로 나라를 지킬 체력도 기르지 않는가? 기대 한번 해 볼 일이다.


13화 재활용장에 놓인 바람구두      


“형, 빨리 나와!”

예민이가 현관문에서 보챘다. 새로 산 자전거가 반짝였다.

“조심해서 다녀와.”

희남 씨가 인사를 건넸다. 희남 씨와 용일 씨는 제법 능숙하게 내리막길을 달리는 예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색깔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던 형제가 같이 어울려 노는 풍경은 아름답고 가슴 벅찼다.

‘이제 바람구두랑 헤어질 때가 된 건가?’

희남 씨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그날 그 아파트 재활용장에서는 특이한 일이 있었다.

“엄마, 이거 봐!”

어떤 아이가 소리쳤다.

“어머, 구두네. 거의 새거 같은데? 이걸 왜 버렸지?”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어. 바람 구두입니다. 필요한 분 가져가서 신으세요.”

재활용장 나무 울타리에 붙어있는 쪽지를 아이가 읽자 엄마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응? 바람구두? 무슨 뜻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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