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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부머 아빠, 밀레니얼 딸

by stay cozy

친정에 다녀온 후 아빠한테는 딱히 전화를 드리진 않았다.

보나 마나 전화를 하면 아빠의 정치얘기가 길어질게 뻔했다.

언젠간 전화를 한번 드려야지 생각만 하다 보면 아빠에게서 먼저 전화가 온다.

사위는 잘 지내는지 몇가지 물으시다가 뉴스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몇 년째 계속되는 '이번에는 진짜 큰일 한번 난다'는 레퍼토리. 물론 지금 정세가 안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종말론자같이 말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들리면서 삶의 의욕도 없어진다. 모든 게 결국 끝나버릴 무의미한 세상, 그럴 거면 그냥 스스로 삶을 저버려도 되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듣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왜 굳이 전화를 하셔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시나 이런저런 답답한 맘으로 오늘 아침도 러닝을 나섰다.

아빠와 전화를 마치고 며칠간 아주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완고해서 더 반박하고 싶어지는 맘이 드는 아빠의 화법. 내가 아는 게 옳고 다른 사람 이야기엔 귀를 닫고 있는 듯한 태도가 참 싫다. 정치나 경제적인 사실을 떠나서 그러한 대화방식과, 딸의 관심사나 안부엔 전혀 관심이 없는듯한 아빠의 태도는 언제나 답답함만을 남긴다.


러닝을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소통하는데 참 서툴다. 개인적으로 가정환경적인 이유도 있고 아빠 세대들의 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딸이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빠가 잘 알고 있는 세계정세에 관한 거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으시는 거만 같다. 시장에서 물건을 쭉 늘어놓고 어느 하나 관심 있는 거 있음 골라봐 하는 것처럼.

며칠 전 어떤 글을 보았다. 전쟁세대 다음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유전자엔 전쟁에 대한 공포가 깊이 남아서 화가 많고 항상 전시상태라고 한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밀레니얼들은 받아온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과 요가 같은 것에 더 빠저 든다고 한다. 나는 슬쩍 아빠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아빠,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화가 많은 이유가 있데요.. 전쟁에 대한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어서."

"그렇지? 우리 세대가 그런 세 대지.. 지금이야 그런 걸 아나 사람들이.."

아빠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야기 같았는지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내가 아빠에게 전화를 잘 드리지 않으니 요즘 아빠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신다.

어려서부터 좀 강압적이고 소통하기 어려웠던 아빠와 오래 통화를 해본 적이 없다. 결혼식 때도 아빠와 부르스타임에 아빠가 뭔갈 얘기하는데 (아마 나랑 춤을 같이 추는 게 처음이구나 이런 것 같다) 왠지 듣기가 싫어서 무시하고 딴 데를 보고 있었다. 소심한 복수 같은 거였다.


어쩌면 아빤 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단 이야기들을 구실 삼으시는 거 같단 걸 최근 들어 느낀다.

왜냐하면 이야기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 않게 이야기를 끊임없이 와다다 하시다가 통화를 마칠 때가 되면 후다닥 엄마에게 전화기를 넘기며 어색한 끝인사를 하신다.

또 요즘엔 내가 관심 있다고 슬쩍 얘기했던 주식 같은 걸 기억하시곤 주제 삼아 이야기 하고 싶어 하신다.

물론 아빤 자신의 생각을 관철 혹은 수긍하게 만들고 싶은 의도도 있을 수 있다.

끊임없이 뜨는 정치와 관련된 유튜브 알고리즘 속에 파묻혀 살고 계신 우리 아버지. 가느다란 다리로 한 번씩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것 말고는 운동도, 딱히 좋아하는 취미도 관심사도 없으신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다른 걸 떠나 사람대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터지는 정치뉴스 속 불안함에 사시는구나 생각이 들어 측은한 맘이 들었다.

러닝을 하며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아빠와의 통화 후 가라앉아 있던 맘이 다시 가벼워진 걸 느꼈다.

통화 끝에 난 아빠에게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아빠에겐 시답지 않게 들릴 말들을 하고 싶었다. 물론 속으로만 되뇌었지만.

덧붙여 정세라는 게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게 사실이고 불안한 맘이 많으시겠지만 소중하고 의미 있게 아빠만의 하루를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술이나 뉴스들 말고 아빠만의 작은 행복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서툴지만 딸에게 먼저 연락해 주셔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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