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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는 내이름 Sep 18. 2023

기내식 단상

식전주로 방금 세 번째 와인을 비웠다. 기내용 와인은 양이 적어 세 병 정도로는 많이 취하지 않는다. 


이륙 전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한 승무원들이 승객들 머리 위로 살균 스프레이를 뿌리며 지나갔었다. 아직도 공기를 떠돌고 있는 스프레이의 라벤더 향이 그 순간을 계속 생각나게 한다. 승객 모두를 잠재적 보균자로 취급하는 무례함이란. 


기내식이 나왔다. “치킨? 피시?” 나는 생선을 골랐다. 흰 밥, 너무 익은 시금치, 흰 살 생선 토막. 축축하고 퍼석한 밥은 얼렸다 녹인 것 같고, 시금치는 밭에서 따온 지 한 10여 년은 된 것 같은 색이었다. 생선은 밥만큼 많았는데, 간이 거의 안 되어 있었다. 굽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는, 고온으로 찐 흰 살 큰 한 토막. 착실히 제거된 뼈. 철저한 연구를 통해 최적의 방법을 찾아 적용한 최신 뼈 뽑는 기계라도 있는 걸까. 기가 막히군. 잔뼈 하나 없네. 애초부터 이 모양대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빵의 윗면은 너무 매끈해서 강가에 두면 조약돌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반으로 갈라보니 갈라졌다. 빵이 맞긴 맞는구나. 버터는 딱 이만큼만 먹으라는 법으로 정해진 것처럼 생겼다. 금박 포장지 겉면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포장지는 성의 없이 푸른 산등성이에 나무 같지도 않은 나무, 새끼손톱만 소 따위를 그려놓았다. '짜잔, 실은 소가 아니라 다른 동물이었습니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조악한 그림이었다. 뭣보다 너무 차갑고 단단해서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빵을 내려놓았다.


디저트로 티라미수가 남았다.


한 변이 검지 길이 정도 되는 정삼각형, 검지 한마디 정도의 높이, 빵 위에 크림, 크림 위에 깨끗이 뿌려진 코코아 파우더, 그 위에 선심 쓰듯 올려진 정사각형 초콜릿 한 조각. 겉모습은 정말이지 완벽한 티라미수였다. 종이 맛이 나던 밥, 오래된 시금치, 생명이 느껴지지 않던 생선토막이 '어쩔 수 없어'였다면, 이 티라미수는 '좋아 이거야'라고 할만했다.

이 아름다운 직각 절단면을 해치지 않고 깔끔하게 먹는 방법은 무엇일까. 꼭짓점 먼저 정확한 크기로 해치우고, 남은 조각을 끝내는 편이 가장 좋겠지. 그러나 한쪽으로 치우친 초콜릿이 정확한 비율을 가늠하는 데에 방해가 됐다. 몇 번의 가늠 끝에 조심스러운 첫 꼭짓점 절단을 마쳤다. 잘린 부분은 잘리기 전처럼 직각의 날카로운 면이 살아있었다. 만족스럽군.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자연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향이 없는 코코아 파우더의 쓴맛, 물을 적게 타서 녹인 인스턴트커피맛, 스펀지케이크의 구워진 탄수화물맛, 특별할 것 없는 설탕시럽의 단맛, 마스카포네 치즈인 척하며 정체를 밝히지 않는 유지방의 느끼함. 순서는 그렇다 치고, 솔직히 비율이 꽤 괜찮았다. 시럽의 적절한 수분이 크림과 빵의 경계선을 지운다. 쓴맛은 단맛을 당기고, 단맛은 쓴맛을 지운다. 나쁘지 않군.

하필 세 번째 꼭짓점을 자를 때 난기류를 만나 절단면이 뭉개졌다. 티라미수는 이제 한쪽 귀퉁이가 찌그러진 갈색 교통 표지판처럼 되어버렸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운데 초콜릿이 박혀있다는 것 정도. 이 초콜릿을 어쩌지. 너무 단 초콜릿이라면 혀가 둔해질 텐데. 그러면 티라미수를 먹을 때 쓴맛밖에 안 날 텐데. 먹을지, 버릴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초콜릿이 너무 달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라도 이에 끼지 않도록 씹지 않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녹였다. 다행히 너무 달지는 않았다. 오히려 별 맛이 나지 않아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초콜릿이 있던 자리 아래로 흰 유지방이 보였다. 잠깐이지만 껍질을 벗긴 우엉 생각이 났다. 남은 티라미수는 한 입에 넣기엔 컸지만, 더 자르다가는 완전히 뭉개질 것 같다. 이제 초콜릿도 없으니 극적인 맛의 변화는 없겠지.

하지만 이 티라미수를 설계한 이들은 나의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남은 티라미수를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커스터드 크림을 얇게 깔아 두었다. 절묘하군, 절묘해. 나지막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


'치워드릴까요?'


아까 내 옆에서 살균 스프레이를 뿌렸던 승무원이었다.


'아뇨. 아직…. 와인 한 병만 주세요.'


그가 와인을 건넬 때 따라온 라벤더 냄새가 불쾌했다. 그래. 이 비행기의 모든 건 겉으로만 배려하는 척할 뿐, 실은 전혀 아니지. 티라미수를 설계한 사람이 '더 얇게! 더 싸게!'를 외치며 크림의 양을 계산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얇디얇은 커스터드 크림이 갑자기 미워졌다. 그 절묘함을 더는 칭찬하고 싶지 않아 졌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남은 티라미수 조각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음식과 쓰레기의 경계에 있었다.


그놈의 스프레이 좀 뿌린다고 뭐가 얼마나 깨끗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분만큼은 오히려 지저분해졌다. 아무리 라벤더 향을 뒤집어쓴다고 한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잘게 쪼갠다 한들, 무례함은 사라지지 않고 이 밀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네 병째 와인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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