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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는 내이름 Sep 16. 2023

엄지를 감아쥐며

외투를 입어야 하는 계절이 오면 웃옷 주머니에, 더운 여름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 주머니에는 늘 손가락 굵기만 한 무언가를 넣어둔다. 무언가를 감아쥘만한 게 없다면 불안감이 커진다. 립밤이나 라이터 같은 것. 양쪽에 다 넣고 다닐 필요는 없고, 그저 한쪽이면 된다. 아무것도 쥘 것이 없다면 궁여지책으로 엄지를 감아쥔다.



어쩌다 누군가의 손가락을 잡고 걸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보통은 혼자다. 그러므로 저런 호사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가락에 익숙해지면, 누군가를 붙잡지 않으면 걸을 수 없게 된다.



둥근 라이터는 길이나 굵기가 적당한 대신 부싯돌을 자꾸 조금씩 돌리게 되고,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불이 나 겉옷이 타오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상상을 부추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립밤을 선호하는 편이다. 추운 겨울에 립밤을 쥐고 걸으면 딱딱해진 립밤으로 입술을 문대듯 바르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다. 적당히 따뜻해진 립밤이 부드럽게 녹아 발림이 좋다. 하지만 손이 차가울 땐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땐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다. 웃옷 주머니 보다 바지 주머니 쪽이 더 따뜻하니까.



엄지를 감아쥐기 시작한 건, 아마 한동안 담배도 피우지 않고 립밤을 잊고 외출했을 때 생긴 버릇인 것 같다. 어쩌다 손을 다쳐 엄지를 쥘 수 없을 때도 있다. 이럴 땐 조금 어색하지만 검지라도 감아쥐어야 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검지도 감아쥘 수 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감싸 쥐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뭐든 쥘 수 있다.



온갖 인상을 쓰고 우직하게 뚜벅뚜벅 걷는 나는, 실은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불안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머니 안에 엄지를 감아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명한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어야 한다면 꽤나 볼썽사나운 웃음거리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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