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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는 내이름 Sep 15. 2023

언제나 잘 준비는 되어있다.

늦은 밤에 잠을 기다리며

나는 언제든 잘 준비가 되어있다. 언제 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먼 곳을 가야 할 경우 재빨리 빈자리를 찾아 책을 펼친다.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졸음이 쏟아지도록 글씨는 작고, 행간은 좁고, 어려운 내용을 선호한다.


철없던 시절에는 잠을 귀찮게 여길 때도 있었다. 언젠가 ‘일생의 절반을 잠으로 소비한다’는 기사를 읽은 다음이었나 보다. 자는 데에 쓰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했다. 하긴 저런 생각을 하던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비교적 건강했고, 잠을 아껴서라도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만 뭐라도 된다 믿었다. 정말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잠을 마다하고 다른 걸 하다니.


요새 내게는 잠만큼 좋은 게 없다. 잠은 늘 새롭다. 자기 전의 나와 자고 일어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괴로움, 즐거움, 슬픔, 배고픔과 피로 따위 모두 자고 일어나면 딱 적당한 수준으로 가라앉거나 사라졌다. 아쉬운 거라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뿐, 자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긴,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가길 바랐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잠은 가장 빠르고 안락하게 나를 미래로 데려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직장에서는 일하러 오는 거냐 자러 오는 거냐 늘 핀잔을 들었고, 버스에서 데굴데굴 구른 적도 있고, 두세 정거장쯤 지나치거나 종점에서 종점으로 몇 번이나 왕복기도 했다. 늦은 밤 전철에서 잠들었다가 핸드폰을 빼앗길 뻔한 경험도 있다. 험상궂은 젊은이들이 내 옆, 앞을 둘러싸고 앉아 손 안의 핸드폰(당시 최신 기종이라 갖다 팔면 돈깨나 됐을 것이다)을 훔쳐 가려고 노려보던 찰나 눈이 번쩍 뜨여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실은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지만, 지금까지 핸드폰, 현금, 이어폰 등 이것저것 골고루 한 번씩은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잠들었던 나를 절대 탓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위로하고 싶다. 매일 졸았어도 직장에서 잘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꼴사납게 데굴데굴 굴렀을 뿐이다. 두세 정거장을 지나치거나 종점과 종점을 왕복했어도 약속 시각에는 늦은 적이 없고, 내 돈과 핸드폰을 훔쳐 간 도둑놈이 나쁜 거다. 잠든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정말 틈나는 대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고 싶다.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뭔가를 대가로 내고 잠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꿈 따위 꾸지 않아도 좋다. 알람 따위 맞춰놓고 싶지 않다. 졸리기만 하다면 언제든 잘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잠이 올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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