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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영화? 들어는 봄

영화적 허세를 겉옷으로 입고 다니는 나를 위한 변명

by mynameisnotgisu

To. 애매한 영화광인 그대들을 위한 글


"00 그거? 들어는 봄" 다음 00에 들어갈 영화 제목으로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

이런 문제가 있다면 화자인 나는 100점 맞을 것이다.


보통 소개팅에서 진부하게 듣는 "혹시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감독상, 칸느 영화제, A24, 미장센 이런 단어를 안 쓰면 대답을 못하던 영화적 허세를 두툼하게 껴입은 흑역사 시절이었다.


그래서 글을 써봤다. 영화광이라면 필수적으로 보거나 알았을 영화들과 그것들을 아직도 안 본 나의 변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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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내가 소개할 「그을린 사랑」의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판타지 영화이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좋아하는 감독, 빵빵한 배우, '판타지는 소설로부터 시작된다.'같은 전설 내가 원하는 사리만 넣은 마라탕 같은 영화지만 아직도 안 봤다.

우선 상영 시간이 155분이다. 2시간 하고도 30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이 영화에만 집중하기엔 목에 낀 가래를 꿀꺽 삼킬 정도의 결심이 필요한데 아직 그 정도의 결심이 안 섰다. 게다가 이런 판타지적 영화 CG가 많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옹졸한 나의 7년 된 그램 노트북이 아닌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과 웅장한 스피커로 송출되는 에너지를 느껴야 한다는 옹고집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재개봉할 때 볼 것이다.


자 봐라. 이렇게 미루다 보니 안 본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 러브 액츄얼리, 이터널 선샤인


러브액츄얼리.PNG
비포선라이즈.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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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현실에서 진정한 연애를 하지 않는 중 아니 못하는 중'이라는 내 상태 메시지에 구리게 발효된 자격지심과 욕망을 영화로 해소하는 어디 가서 말하기 부끄럽고 꼬릿한 취미가 있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 내내 여중여고를 졸업한 난 솜털이 나기엔 성숙하고 술을 마시기엔 미숙한 학생들이 풋풋한 꽃가루에 알레르기로 코가 간질거릴 "하이틴 로맨스"를 아주 좋아했다. ( 17 어게인, 금발이 너무해, 퀸카로 살아남는 법, 쉬즈 더 맨,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등등)

로맨스 영화라면 진부하고 오그라든다며 치를 떠는 성인 남성들도 이 영화들만큼은 재밌게 봤다는 평이 자자하나 나는 아직도 안 봤다.


이 영화의 대한 나의 변명은 이쁜 남녀가 눈 맞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으나 집에서 먹태에 맥주를 까먹는 것이 더 짜릿하여 보지 않았다.

캡처.PNG 엄청난 먹태입니다.

포레스트 검프, 트루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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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죽기 전 봐야 할 영화 100편에 무조건 들어가 있는 영화들이다. 두 영화 포스터에서 자극적인 마라맛이 아닌 삼삼한 옥수수수염차와 같이 잔잔한 이야기로 전개될 거 같은 느낌을 준다.

그중 특히 트루먼쇼는 내가 습관성처럼 난발하는 고유 명사이기도 한다. ( ex. "이거 지금 트루먼쇼야? 나를 위해 연출된 것인데 나만 모르는 거지?")

하지만 역시 이 두 영화는 따뜻한 영화와 대충 뭐 트루먼, 포레스트 검프라는 사람이 나오겠고 인생을 살아가겠지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왜 이 영화 둘을 안 봤냐면... 정말 애매하게 알고 있어서 안 봤다.

줄거리도 아쉬울 정도로 알고, 명대사는 아쉽지 않을 정도로 알고, 이런 잔잔한 감동 영화들은 2시간 정도의 내 개미 걸음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러닝 타임 뒤에 '각박한 세상을 치열하게 하게 산 내 맘을 위로한 따뜻한 교훈적 영화' 이렇게 끝나버릴 거 같은 선입견이 큰 것이 내 변명이다.


영화 허세녀답게 명대사도 알고 있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ing to eat.
- from 포레스트 검프
Just in case,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 from 트루먼 쇼


이 대사가 어느 타이밍에 스크린 허리춤에 쓰였는지는 전혀 모른다.

참 이렇게 애매하게 아는 게 나도 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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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내가 진짜. 허세 말고. 시청한 영화들을 소개하겠다. 난 뭐 평론가도 물론 방구석 평론가도 아니기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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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택시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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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상을 받을 때 우상이라고 언급했던 유명 감독, 감독 위의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작품이다. '유명 영화감독 아는 척 하기가 40%나 차지하는 내가 이 감독의 영화를 한편도 안 봤다?'라는 것에 긁혀서 당장 보았다.


2시간 뒤

이 영화가 왜 유명한 지 몰랐던 어리석음을 눈물로 퉁쳐보자면 한강은 내 눈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영화를 볼 때 영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를 나누고 그중 어떤 부분이 좋은지 생각하는 편이다. 이 영화는 뭐 하나 좋지 않아서 좋았고 뭐 하나 아쉽지 않아서 최고였다.


보기 좋게 나를 녹다운시킨 주인공의 시리며 덤덤한 독백으로 시작된 영화, 고독한 남자의 모공에서 노란 피지처럼 나오는 쓸쓸한 묘한 섹시함, 방패와 무기처럼 입은 M65 필드 재킷과 부츠.


아쉬움이 없는 완벽함은 명작의 이름이다.

맥주보다 위스키에 어울릴 예정입니다.




2. 브리짓 존슨의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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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두야.

뻔한 맛에 본다는 로맨스 코미디 장르를 추천한 것은 약간 자존심 상하지만 이 영화는 추천한다.

여자주인공이 사고를 끊임없이 쳐서 머리가 아프다. 속에서 "아 진짜 그러지 마라..." 하는 건 다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할머니 팬티를 입는 브리짓은 나름 또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간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도와주길 기다리는 거 못해서 자꾸 일어나서 사고 치는 상여자 브리짓.

다음엔 제발 가만히 있어주길 바란다.



3.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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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에스터 감독의 졸업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전, 미드소마의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평소 감독이 유명한 작품을 많이 찍었다는 것을 익히 알아 감독의 성함은 알았지만 난 '현실이 공포다'라고 생각하는 아주 염소적인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 같은 사람이기에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장르에 평균 2시간이 넘는 영화를 지켜보는 행위는 30초짜리 자극적인 릴스에게 잡아먹히는 표적이 되기 쉽다.

하지만 이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는 29분이라는 짧은 시간과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두 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냥 타인의 브이로그 보듯 가볍게 보았다.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가족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성폭력 가해자 피해자의 역할에 반전을 줬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오는 불쾌함은 내 속눈썹처럼 눈을 감고 뜨는 순간 지근지근하게 밟혔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역할만 바꿨을 때 오는 불편함이 공포가 되기 직전에 끝나는 영화.

이 단편 영화로 나는 왜 그 감독이 이렇게 인간의 불쾌함을 자극하는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마스터 소리를 듣는지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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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을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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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영화의 첫 영화로 그을린 사랑을 추천받아서 냉큼 보았다.

지루한 장면과 느린 전개들이 초반에 지뢰처럼 분포되어 있어 지루함의 밭을 걷기가 쉽진 않은 영화였고 다루는 소재가 무겁다 보니 추천하면서 웃으면서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이 담고 있는 반전 하나가 이 높은 진입 장벽을 가치 있다고 장식해 준다.

이 영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내용을 언급하며 나의 느낌을 말하고 싶지만 스포가 될 거 같으니 그만해야겠다.

절대 스포 받지 말고 보세요.


극단의 경계선을 머리 위로 날아드는 총알로 지울 때 느껴지는 갈등의 공포



이렇게 하여 나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글이 끝났다.

참 처음에 기획할 때는 가볍게 적으려고 했으나 유명 영화를 보지 않았던 구차한 변명들을 '과연 어디까지 지질한 변명을 댈 수 있을까?" 분석해 보니 재밌고 생각보다 길어졌다.



다음엔 가볍게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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