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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힘 Jul 25. 2023

내가 살림을 못해서 망정이지

얼마나 꼬투리 잡을 게 없으면


퇴근해서 들어오는 문소리만 들어도 이미 대충은 그의 기분을 알아차린다. 2층으로 바로 올라가면 다행인데 집에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온 집안을 다 둘러본다. 이방 저 방 세탁실 냉장고까지 열어보는데 왜 그러는지는 십 년이 돼도 모르겠다. 대답해 줄 리 없으니 묻지도 않는다. 그저 습관이겠거니.

그렇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뭘 의심하는 거지? 무슨 꼬투리 잡거 없나 찾는 건가?' 죄도 없는데 속으로 마음 졸이는 일이 잦다.


이미 문 열면서부터 "야"외치고 들어오는가 하면 일단 들어와서 난리 칠 껀덕지부터 뒤진다.


그날 잡은 꼬투리 '쌀'이었다.

쌀 귀신이 붙어 한동안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하고 바로사다 놓지 않은 걸로 볶아대더니 이번엔 내가 실수로 쏟은 쌀이 화근이 되었다.


그놈의 쌀. 

매일, 그것도 평생 지어야 할, 먹어야 할 쌀이 이리도 정이 뚝 떨어질 줄이야.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글놈의 가난은, 내가 흘린 쌀을 보고 눈알 뒤집고 "이 귀한 쌀이 우리 집 방구석엔 막 굴러다닌다"며 애들 향해 쌀을 한 주먹 쥐어 차게 던지게 했다. 진짜 쌀 뿌리며 굿이라도 했으면.


그가 무능하고도 대책 없는 부모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가난은 언제까지 나까지 따라다니며 괴롭게 할 일인지.


'사람 나고 쌀났지, 쌀 나고 사람 났냐'


쌀 나고 사람 난 줄 아는 그는, 쌀을 쏟고 주어 담으면서 세탁실에 흘린 몇 톨까지 쓸어 담기가 찝찝해 청소기로 아들 나를 용납지 못했다. 청소기 안에 쌀들을 보고 이성을 잃었다.


그래 난 쌀이 없어 못 먹어본 적 없고, 쌀이 없다 해도 그렇게 상처로 얼룩진 쌀은 안 먹고 말겠다는 생각이라 당신에게 그게 그리 귀한 줄 몰랐다. 그렇게 억울하면 내가 한 끼 굶을게...



"네가 쌀을 흘린 게 한두 번이야?! 내가 너 쌀 푼 자리에 흘린 쌀주어 담은 게 몇 번이야! xxxxxxx"


그래서 그게 뭐...

뭐 어쩌라는 건지...


그렇다. 나는 그런 게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라서 정말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알고 싶지 않다 이제는. 


아빠가 던진 쌀에 열 살 아이는 얼굴 맞아 따갑다고 울고, 겁 많은 5살은 얼었다.

나는 도대체 쌀을 버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질문밖에는 할 게 없는 모지리가 돼있었다.


청소기 통 안에 가득 찬 먼지뭉치와 머리카락들과 뒤섞인 쌀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더미에 쏟았다.

이것도 다 밥 해 먹으라며. 정말 그걸로 밥 지어서 그에게 바치고 싶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의 말대로 살림도 지지리도 못 하고 잠도 많은 게으름뱅이라 그것에 대해선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늘 인정은 빠른 편.

그런데 수시로 날 괴롭히는 이유들이 고작 그런 것들이 라게 '얼마나 꼬투리 잡을 게 없으면' 내가 살림까지 잘했으면 잠이 많다는 사유로 허구한 날 이혼 하자 드는 당신 꼴이 얼마나 더 우스웠을지. 잠이 많아도 너의 손을 빌린 적 없고, 살림 못해도 애들 굶긴 적 없는데 그러는 넌 외도에, 언어폭력, 신체폭력, 경제폭력까지 무슨 낯짝으로 내게 그렇게 당당한 걸까.


그렇다면 그렇게 못하는 살림솜씨에 잠이 그렇게 많은 곰 같은 여자가, 생체바이오리듬이 칼 같아 암막커튼을 사이로 미세하게 들어오는 빛까지 귀신같이 감지하고 여름이면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뜨는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헤아려줄 순 없는 일인지.


아차차 나르시시스트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범죄지.


잊지 못할 염병할 놈의 쌀 사건 이후로 나쌀을 풀 때마다 한 톨 한 톨이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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