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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힘 Nov 13. 2023

호랭이 물어 갈 놈

진흙탕 싸움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 이후

소송이 시작되고 너무도 평온하고 잔잔한 일상이

낯설기까지 했다.


그와의 전쟁 같은 마주침 들은 그의 잦은 외박으로 살면서 매일은 아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고,

원인 모를 전쟁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참전해야 하는 상시대기 상태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었다. 이혼하면서 왜 그렇게 다들 힘들어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자가 되었어도 슬프지도 않았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만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 그 미안함은 아빠가 없어서라기보다 학교, 어린이집, 동네, 집이 모조리 바뀌어 버리는 환경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늘 없는 아빠였으니.


하지만 '설마 애들 안 보고 싶겠어?' 했던 설마가 진짜가 되고 나니 짠해지긴 하더라.

아빠로서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데 역시 돈 앞에서 자식도 소용없구나.


소송이 걸려있으니 당연히 위자료, 재산분할이 걸려있는 사안이고 눈이 뒤집힐 게 뻔했지만 아이들만큼은 포기 않고 뺏기라도 할까 봐, 찾아와 깽판 칠까 비밀전학에, 등기열람 제한신청까지 야심 차게 마치고 안심했었다.


예상과 달리 내게 전화 한 통이 없어 이상했고,

최근에 큰 아이와 첫 통화를 하게 되면서 우리가 어디 사는지 알게 되었음에도 찾아올 생각도 없는 그를 보아하니 재산분할이 걸려있는 이 판국에 자식이 눈에 보일리 없겠구나 싶다.


십 년을 별 꼴을 다 겪고도 어쩌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던 내가 이제와 정말 소송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큰 아이의 여름방학만 손꼽아 기다리다 야금야금 짐을 꾸려 그 작은 레이에 짐을 때려 넣고 우리 셋이 집을 떠나던 날, 왜 세 모녀 누구 하나 이 상황이 슬프지도, 이상하지도 않았을까.

마치 여행을 떠나 듯 집을 나서 우린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는 그 집이 전혀 그립지가 않다.


물론 큰 아이는 전학 온 학교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예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 집은 싫다고 했다. 마당까지 100평 남짓 한 신축 2층 단독주택에서 30년이 넘는 11평 투룸으로 이사를 와도 집에 대한 불만이 없다는 건, 그 사람이 우리에게 집을 안겨주고 선물이라 자부하면서 세상 모든 걸 다 준 듯 마치'내가 좋은 집 사놓았으니 니들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게 하라' 부르짖던 못난 그 행동들이 얼마나 파렴치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11월 첫날. 첫 기일이 잡히고 그의 기가 막힌 준비서면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내가 주인공인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랑 애를 낳고 10년을 살았다니' 기가 막혔다.


아 이래서 진흙탕 싸움이라는 건가?


그동안 실감도 안 나고 와닿지 않던 '피가 마른다' 그 소송 나도 이제 시작인 거야?


어느 한 줄도 진실이 없는데 이 거짓말에 반박을 하나하나 해가며 쓸데없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건지 벌써부터 지쳤다.


어? 내가 연애 중에 다른 남자랑 연애를?

? 우리 부모가 아파트 아니면 딸을 못준다고 닦달을 해?

어라? 우리 부모가 학벌로 설움을 줘?

? 내가 욕을 하고 때린다고?


없는 말 지어내느라 꽤나 애썼을 것 같은데 거짓이 일상인 사람이라 이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으려나.

나는 생각만 해도 양심에 찔려 피가 날 지경인어떤 재주를 타고나면 거짓말이 이렇게 몸에 배는 건지.


억울해 펄쩍 뛸 가치도 없을 만큼 증거하나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나는 웬만한 건 다 반박할만한 증거들이 충분하기에 불안하지도 않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고 살자 사람아. 언제 어디서 무엇을 벌어먹고 살든 자식 보기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기를.


집을 나와 당신을 볼일 없으니 내 마음이 평온해졌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여유까지 생겼다. 역시 예상대로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만 행복해진 것 같아서. 귀한 자식들 내 품에만 끼고 나만 볼 수 있어서.

 

그러나,

본격 소송이 시작된 첫 기일 이후로 난 다시 독해졌다.


제일 소름 끼치는 건 그는 이혼 기각입장이라는 것. 여태 연락 한번, 사과 한마디 없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 번도 화목한 적도 행복한 적도 없는데 화목하고 행복했던 예전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한다.

어릴 적 우리 큰엄마가 자주 쓰시던 "호랭 물어갈 놈"이란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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