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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me Aug 14. 2023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가.

어떤 사람의 행복을 말하려면,

그 인생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아야만 하는가?


설령 그런 주장이 옳다고 해도,

사람이 죽은 뒤에야 행복하다는 주장이 사실인가?


아니면 그런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없는가?


특히 우리는 행복을 활동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거기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런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없다고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죽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지속적인 것이므로 쉽게 변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운은 여러 번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운에 따라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거나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같은 사람을 어떤 때는 행복하다고 하고,

어떤 때는 불행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듯 행복한 사람은 카멜레온이 되고,

취약한 기반을 지닌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운에 따라,

그를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 아니겠는가?


앞에서 이미 말했듯 인생에는 그런 것이 추가로 필요하긴 하지만,

인생이 잘 됨과 못됨은 그런 것에 달려 있지 않고,

미덕에 따른 활동이냐 아니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중에서 미덕에 따른 활동만큼 지속적인 것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은 그런 활동을 아주 기꺼이 지속해 나가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활동들이 망각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은 그런 지속성을 지닐 것이므로,

일생 행복하다.


그는 언제나, 어떤 다른 일보다 더 우선해서 미덕에 따른 것을 행하거나 생각할 것이고,

운에 따른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가장 고귀하고 지극히 품위 있게 견뎌낼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큰일이 많이 생기면,

그것을 활용해 고귀하고 훌륭하게 활용한다.


반대로 나쁜 쪽으로 큰일이 많이 생기면,

의 고귀함과 위대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불운을 묵묵히 견뎌내며,

고귀함을 빛낼 것이다.


그의 행복은 통상적인 불운으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직 큰 불운을 많이 겪었을 때만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불운을 많이 겪어 무너졌다면,

그의 행복은 단기간에 회복되지는 않겠고,

오직 오랜 세월에 걸쳐,

크고 고귀한 일을 실현하는 삶을 이루어냈을 때만 회복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완전한 미덕을 좇아 행하고,

외적인 좋음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

우리가 그런 사람을 단지 어느 기간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미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정의에 따르면 행복은 목적이고 모든 점에서 최종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방금 우리가 말한 것을 갖추고 있거나,

앞으로 갖추게 될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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