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편히 쉬렴
아주 안정적인 회사에 입사한 지 7개월째 되었을 무렵이었다.
왜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냐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회사는 누구나 다 아는 회사고 아직도 내가 했었던 일들이 계속되고 있으니 정말 안정적인 회사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특별한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아니 사고를 한번 쳤는데도 나를 믿고 넘어가 준 정말 안정적인 회사를 뒤로 하고 오래전에 같이 근무했었던 인연으로 내게 입사를 제안한 캐나다계 회사로 이직을 했었다.
그때 고민했었던 건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에 대한 선택이었다. 결국 난 보이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한국지사라 회사에 직원들이 몇 없었다. 지사장 포함해서 5명이었다. 약간의 연관성이 있기는 하나 해보지도 못한 업무가 주어졌는데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투지도 불타고 했으니 어떻게든 해냈었다. 하지만 나 혼자 일을 다 쳐내기는 버거웠다. 그래서 직원 하나 뽑아 달라고 얘길 했었고 요청대로 직원을 한 명 뽑았다.
나와 6살 차이 나는 직원이었다. 면접 볼 때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는 질문에 자기는 스트레스받으면 수학문제를 푼다는 답변을 해서 뽑혔다고 했다.
이후 나는 이 친구와 같이 일하게 됐다.
성격도 좋고 붙임성도 좋고 해서 누구와도 잘 지냈고 해보지도 않았던 일들인데도 알려주면 제법 잘했다. 다만, 회사생활이 이 회사가 거의 처음이라 여러 부분에서 미진한 점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지만 신입치고는 이 정도면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이것저것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 친구와 정말 많은 일들을 같이 했었다. 수수료 정산, 영업, 제휴, 신규사업, 조직운영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같이 했었고, 같이 일할 때도 있었지만 같이 일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조직을 만들어 운영을 해야 하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난 했었던 일이고 이 친구는 해보지 못했던 일인데 사람이 필요하니 이 일을 아는 사람보다 내가 믿을 사람이 필요해서 이 친구와 같이 하고 싶다고 회사에 요청을 했고 나와 같이 일을 하게 됐었다. 그때 이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저 이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너무 걱정돼요.”
“걱정 마, 너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돼”
이렇게 얘기했고 그 일은 진행 됐었다. 성공적이었고 조직이 커져서 관리자가 필요했는데 주저 없이 이 친구를 관리자로 진행했다. 그때도 이 친구는 똑같이 말했다.
“저 이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너무 걱정돼요.”
“이번에도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니 걱정 말아”
이때는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시스템, 전산을 담당하는 업체와 제휴해서 진행을 했었는데 그 업체에서 작업이 지체되어 결과물에 대한 통계를 산출해 낼 수가 없었다. 고객사에게 보내줘야 할 리포트는 이미 정해져 버렸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로우데이터 받아 1차 작업을 했고 나는 그걸 받아 리포트를 만들어서 전달하기를 한 달 정도 한 것 같다. 이 친구 집이 구로 쪽이었는데 거의 매일 너무 늦은 시간에 끝나니 데려다주고 집에 갔었다. 내가 피곤한 건 둘째치고 그렇게 일을 해도 불평 한번 없어 너무 미안했다. 이 친구한테도 미안했지만 이 친구 부모님께도 너무 죄송스러웠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놨었다. 이해를 해주고 지나가면 괜찮은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었다. 그래도 내 사람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하길 잘했던 것 같다. 상황은 나아졌으니 말이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쳐 진행했던 일이 점점 커져서 회사도 개인적으로도 이 친구에게도 많은 성장이 있었다.
내가 맡은 영역은 더욱 넓어졌고 해야 할 일들도 더 많아졌다. 이 친구는 여전히 내 일을 서포트해줬었는데 내가 직접 진행해야 할 일들,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이 친구 고유의 업무들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알려줬고 같이 일했다면 이제는 이 친구가 더욱더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었다. 숫자를 잘 보고 다룰 줄 아는 게 이 친구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 통계와 정산업무를 우선 진행시켰다.
회사가 계속 커져서 여러 법인을 운영하게 됐고, 관련 법인에서 온 직원들과도 같이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 때문에 이 친구한테는 거의 신경을 써주질 못했다. 그때 새로운 법인에서 온 여직원들이 있었는데 나이대도 비슷하고 하는 일도 비슷하니 친하게 지내고 같이 잘 해나가기만 바랬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렀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얘기 좀 하자고 하더니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저 이제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불평 없이 묵묵하게 일 잘하는 직원들의 공통적인 부분은 힘들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결국 한다는 얘기가 그만둔다는 얘기다. 그전에 힘들다고 얘길 하면 좋았을 것을 바보같이 꾹 참고 혼자 이겨내려 발버둥 치다가 아플 거 다 아프고 난 후 하는 말이 퇴사한다는 얘기다.
전후사정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얘기를 못했던 건 내가 너무 바빠서 괜히 얘기했다가 부담만 줄까 봐 얘기를 못했다고 했다.
“아휴, 그걸 네가 왜 참어 바보같이”
힘들었던 건 직원들의 텃새 때문이었다. 비슷한 나이 대 여직원 두 명이 있었는데 같이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이 여직원들이 중간에 말을 왜곡시키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어떤 부분이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이 문제를 강압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부작용이 뻔했다. 사실 나는 이 친구와 같이 일하면 좋은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욕심 같아서는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이 친구를 어떻게 하면 문제없이 해결할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최대한 안전한 자리로 보내는 게 가장 좋겠다 싶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에 설득할 것들이 필요했는데 사실대로 얘기하기보다 내 문제로 만들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진행했다.
“대표님, 제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켰나 봐요. 시켜놓은 일은 너무 잘했는데 제가 그간 케어를 제대로 못해서 힘들었나 봐요. 그만둔다고 하는데 이 친구가 정말 숫자감각이 남달라요. 제가 다시 잡아서 저랑 같이 일을 하면 또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대표님이 데리고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숫자는 잘 다룹니다.”
당시 대표는 모든 비즈니스에 시뮬레이션이 필요했고 생각한 것만큼 숫자를 잘 다루는 직원은 없었다. 원하는 숫자를 볼 수 있는 직원이 필요했고 그 일들은 당연히 CFO를 통해서 진행 됐는데, 대표는 CFO를 신뢰하니 CFO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면 가장 안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옮겨간 자리에서는 잘 적응했고 잘 다녔다. 덕분에 나는 조금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두 달 정도 지났을까 대표와 만날 일이 있어서 같이 차 한잔 하는데 얘길 했다.
“야, 너는 인마 애를 어떻게 관리했길래 그렇게 괜찮은 애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얘길 한 거야. 내가 데리고 오길 정말 잘했어.”
이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 퇴사 사유야 나중에라도 알게 될 수 도 있을 것이고 대표가 저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마음에든 게 맞았다.
각자 업무도 달라지고 일하는 곳도 멀어지고 그렇게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간간이 소식을 전하며 가끔 술도 한잔씩 하고 그렇게 지냈다. 간간이 들려오는 이 친구 얘기는 일 잘한다는 소리만 들려 그런 얘길 들을 때면 내가 칭찬받는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점심식사 하고 오는 길에 만났다.
“저 커피 한잔 사주세요.”
커피도, 밥도, 술도 얼마든지 사줄 수 있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을 때였다.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상태여서 그 잠깐의 여유도 부리지 못했었나. 커피 한잔 사달라는 얘기에 ‘다음에’라고 돌려보낸 기억이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난 나대로,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각자 새로운 일들과 생활을 하며 연락도 안 하고 언제 만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건너 건너 아는 지인들을 통해 가끔 근황에 대한 얘기만 들었을 뿐, 더 이상의 연락은 하지 않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서로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예전에 이 친구와 같이 일했던 직원이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세요? 저 너무 이상한 메시지를 받아서 혹시나 해서 연락드려봤어요. OO랑 친하시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어떤 메시지길래 그래?”
“다른 게 아니고, 부고문자인데요 OO가 본인상이라고 메시지가 왔어요…”
멍했다. 그리고 어떻게 애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무작정 그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기억이라도 좀 끌고 와서 잡아놓으면 이게 애도하는 것일까.
너무나도 사소한 기억들이 많다. 별 것도 아닌 기억들인데 남자친구랑 재미있었던 얘기나 상사들 성대모사를 했었던 일들, 이 친구가 특히 사람들 목소리 흉내를 잘 냈다. 그러고 보니 연극을 했었던 것도 얘길 해줬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정말 많은 일들과 추억들이 있다. 내가 이 정도인데 가족들, 하물며 남편과 아이와는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리다.
가끔 연락이 왔었던 걸 왜 무심히 넘겼을까. 왜 그때 커피 한잔 사달라고 했을 때 지나쳤을까. 생각이 끝이나질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고마움과 미안함만 남아있다. 그리고 이 글도 어떻게 끝내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