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예요.
2008년도쯤인 것 같다. 그때 파트너사와 같이 일을 했었는데, 담당자 한 명을 내가 있는 곳으로 상주시켰다. 상주한 직원과는 업무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대화를 나눠야 하고 그러다 보니 종종 개인적인 얘기들이나 직장 상사에 대한 얘기들도 했었다.
어느 날 그 상주 직원과 커피 한잔 마시고 있는데 회사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눈이 초롱초롱 해지면서 뭔가 대단한 비밀 하나쯤 알려준다는 느낌으로 마주 앉아 있는 나를 불렀다.
“Rey님, Rey님. 근데 그거 알아요?”
“아니요? 그거 몰라요”
입을 가리면서 한번 웃더니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팀장님 있잖아요. OOO과장님”
“네, OOO과장님. 무슨 일 있어요?”
난 정말 큰 비밀 하나쯤 있는 것 같아 무척이나 궁금했다.
“과장님이 아직 결혼 못했어요. 노총각이에요. 이거 비밀이에요!”
난 사실 놀랍지 않았는데 놀라운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요? 그렇구나.”
그러면서 OOO과장님을 떠올려 봤다.
우선 나보다 6살이 많고, 그 회사 들어갈 정도면 괜찮은 대학교를 졸업했을 테고 항상 웃는 인상인데 웃으면 눈이 안 보이는 흡사 하회탈 같은 느낌도 났고 배가 나왔다거나 매너가 없다거나 뭐 이러질 않아서 내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아직 결혼을 못했다는 얘길 들으니 그게 조금이라도 흠이 될 수 있으니 하는 소린가 싶긴 했다.
그 사람의 결혼 유무가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줄 수 있는 얘기인 게 어떤 의미 일까? 결혼할 수 있게 나보고 도와달라는 말인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났지만 큰 정보를 얻은 것처럼 대답하고 티타임을 마쳤다.
이후로 그 OOO과장님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왜 결혼 안 했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하고는 곧 그 사실도 잊어버렸는데, 마치 지금의 내가 있듯 복선인 것처럼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결혼에 대한 글을 한번 써야지 했는데 그게 오늘이 되었다.
오래전 영어학원을 다녔을 때의 일인데 학원생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다. 그러니 서로 대화할 때 파트너는 항상 여자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파트너와 대화하는 시간이 돼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나한테 얘길 했다.
“Rey! 그 친구, 남자 친구 있어요. 아니 결혼했어요!”
왜 나한테 이런 얘길 했을까 대체 어떻게 보였길래.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대답을 했지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었다. 그 파트너가 남편이랑 미국에 갔었던 얘길 한참 하고 있었던 중이라 아주 조금 억울했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넘겼었다.
이런 오해 아닌 오해들을 종종 받았다. 생각나는 에피소드들이 돌이켜보면 상당히 많은데 그때마다 그냥 이게 내 문제지, 타인의 문제가 아니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나마 지금의 나이보다 적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가 더 들어감에 따라 결혼 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게 물어보는 경우가 계속 생겼다. 일하다 보면 오래전에는 “그런데 결혼은 하셨어요?” 였는데 나중에는 “혹시, 자녀는 몇이세요?”, “아이들은 학교 다니죠?”, “사모님이 좋아하시겠네요.”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좀 오래 봐야 할 사람이면 결혼 아직 못했다고 얘길 해서 오해를 풀어주고, 관계의 지속성이 없는 만남일 경우나 대리운전기사분들께는 거짓말을 종종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사실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그냥 별말을 안 했을 뿐이었다. 특히, 내 얘기는 들을 생각이 없고 본인들 말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질 않아 거짓말을 할 틈조차 없어 거짓말을 안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결혼을 못한 게 상당히 문제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치 내가 죄인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어 이런 때는 인생을 잘못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가끔 했다. 이렇게 결혼을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아주 옅게 쌓여 언제고 털어버릴 수 있는 정도의 무게지만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라 아주 신경이 안 쓰인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 사회생활을 했으니 당연히 일하는 곳에서 여러 감정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유무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결혼,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하게 되고 날 배려 해주는 사람들의 경우는 “에이, 못한 게 아니라 안 하셨겠죠.”라고 내 기분까지 생각해서 고맙게도 이렇게 얘길 해줬다. 걱정해 주는 사람도 많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남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꼭 본인들이 해보고 싶은 바를 얘기한다. “내가 만약 결혼 안 했다면~” 이렇게 한 번씩 하소연을 늘어놓곤 한다. 부러워하는 사람이 남자가 많다고 해서 그게 절대적이라고 볼 순 없다. 남자들은 부럽다고 얘길 하는 게 위로를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고 생각이 됐다. 반면 여자의 경우는 남편 욕을 내 앞에서 할지언정 '결혼을 안 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거나, '결혼 한걸 후회한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지 재미있는 부분이다. 남자들은 결혼을 안 했으면 차라리 하지 말고 혼자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낫고 되도록이면 결혼하지 말라고 얘길 해준다. 여자들은 결혼 안한걸 한 껏 걱정해 주고 결혼 생활의 힘듦과 좋음을 적절히 섞어서 얘길 해준다음에 좀 힘든 부분들과 남편욕을 다소 섞어놓긴 하지만 결론은 '얼른 결혼해라'로 끝난다. 이런 차이를 보이는 건 오랜 남녀의 특성차이 때문일 것 같다. 이 또한 좀 한참 전의 얘기고, 지금은 결혼 못했다고 하면 남녀 모두 절망적인 표현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나 잠깐 머뭇거리다 결국 짝은 다 있다고 많이 걱정해 주는 걸로 바뀌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라는 의견을 낼 때도 있다. 주변에 국제결혼 사례들을 얘기해 주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내 생각은 확고하다. 그런 식의 결혼에 대해서 딱히 반감이 있거나 그런 건 없다. 필요에 의해서 선택하는 사람들의 몫이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결혼을 위한 국제결혼 반대다. 그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 내가 싫다. 이 나이까지 한국에서 결혼을 못했는데 그렇다고 해외로 가면 안 되는 게 될까.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자체가 나라 망신일 것 같다.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순 없다.
이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결혼하지 말고 살아라.’ 거나 ‘결혼하면 좋다.’ 등 이전에 들었었던 말들을 거의 들을 수 없게 됐다. 나이 들어 감에 따라 결혼 유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고스란히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을 경험하니 아주 가벼운 무게의 스트레스 정도였는데 더욱더 가벼워진 것 같다.
가족들은 어떤가. 엄마나 누나, 누구 하나 나보고 결혼을 해야 한다는 얘기나 걱정된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누군가 엄마한테 아들 결혼 못해서 어떻게 하냐고 했을 때 엄마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지 인생 지가 사는 거지.” 내가 엄마한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다. 누나의 경우는 결혼을 해라 마라가 아닌, 나와 대화를 하다가 “너도 결혼해 봐 그럼 알게 될 거야.”라는 표현을 가끔 쓰긴 하지만 결혼을 해라 말아라 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빠는 달랐다. 돌아가신 지 십수 년이 됐는데 아빠가 내게 했던 말 들이 간혹 가다 생각난다. 아마 평생 생각나겠지만, 그 말들 중에 하나가 결혼 얘기다. 그때 했던 말이 떠오를 때면 차라리 나한테 결혼하라는 말 자체가 항상 했었던 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빠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기억이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것도 이렇게 말을 한 게 마지막이어서 가끔 생각이 나면 슬프기도 하지만 생전의 소원을 들어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와 아주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생각날 때 복받치는 감정을 느끼기엔 이미 풍화된 상태가 되어버렸다.
“너, 얼른 결혼해. 아빠 소원이야. 너 결혼하면 아빠가 없어져줄게.”
아빠가 이렇게 말을 했었다. 이게 아빠랑 마지막으로 한 대화였었고, 처음으로 나한테 결혼하라고 했었던 말이었다. 화가 나는 건, 내가 아직 결혼 못했는데 왜 아빠가 먼저 없어졌을까이다. 결혼을 못할 것 같아서 먼저 없어진 건가. 왜 저렇게 내게 얘길 했는지 나중에 이 내용에 대한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가슴에 저릿한 느낌이 든다. 내가 결혼할 거니까 내 결혼식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아주 성대할 테니까 아빠는 남들 자식 결혼식에 부지런히 다녔었다. 아빠가 돈이 거의 없던 시절, 내가 주기적으로 용돈을 보내드렸는데 그것 가지고 모자랄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연락이 왔는데 물어보면 그 모든 사유가 지인 자녀 결혼식이었다. 아마 아빠가 간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아빠가 축복해 줬을 테니까.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나보고 얼른 결혼하라고 매일매일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미혼인 상태가 좋은 점이 많은지 나쁜 점이 많은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일적인 경험치를 쌓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 되었다. 미혼의 상태였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는 업무들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궂은일도 내가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게 의아할 수 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그랬다. 상황은 항상 그렇게 흘러갔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가는 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그런 때마다 반응을 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가끔 생각해 보면 화가 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지금은 이미 지난 일이라 많이 무뎌져 버렸다.
누구나 다 같은 시간인데, 와이프, 남편, 처가, 시댁, 아이 등에 소요되는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레벨이 한 두 단계 정도 높은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해야 하는 비즈니스는 다들 눈치만 보고 있어 내가 그냥 진행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당시 회사의 대표님은, 신사업이나 지방에서 비즈니스 할 일이 있으면 나를 시켰다. 물론 그냥 시켜도 했겠지만
“이거 누가 할래? 아, Rey가 해, 아직 장가 안 갔으니까 지방가도 괜찮잖아.”
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이런 말을 들어도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냥 조금 화가 날 뿐, ‘그래 그냥 내가 다하자, 어이구’ 정도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은 원래 내가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내가 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직원들 데리고 업무 진행시키고 그래야 하니 사정이 있는 직원들도 있었을 텐데 나와 지방을 같이 가야 하는 직원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회사는 나를 시키는 게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는데 나는 직원들 일 시키는 게 왜 미안해야 하는 일인지는 그때부터 나름대로의 리더십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당시 일하던 회사 상황이 한 번에 바뀌게 됐다. 내가 맡았던 가장 큰 클라이언트와 여러 가지 문제로 계약이 종료되었다. 물론 당시 회사와 나는 잘못이 없었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회사는 아무런 손해도 없었다.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종료 시점까지의 수익을 정산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손해가 아닌 미래의 리스크를 한 번에 처리하고 수익을 벌어들인 셈이다. 한 가지 과제만 생겼을 뿐이다. 몇 년간 그 비즈니스가 진행되어야 했는데 없어졌으니 신규 비즈니스를 찾아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말이 지나고 있어 송년회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건배사를 하게 됐는데, 새로운 비즈니스를 진행시키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건배사를 했었는데 그 후 며칠 뒤 권고사직 얘길 들었다. 그럴 거면 미리 얘길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난 회사의 창립멤버였다. 신규비즈니스는 무조건 도맡아서 진행을 했고 회사에서 초석, 시금석 역할을 했던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결정에 수긍했다. 그 결정에 수긍한 이유도 그렇게 결정된 이유도 내가 미혼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요 업무를 진행한 임원 및 직원들은 다 기혼인 상태였고 나만 아니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주임이 나가야 하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 결혼 못한걸 딱 한번 후회했었다. 만약 내가 미혼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무튼, 이런 계기로 회사 대표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의 이 결정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직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직원의 문제는 어떻게 대비하고 처리를 해야 할지 이때 경험 했던 것들이 이후 내가 조직을 관리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관련된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대표는 나중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난 최대한 도움을 줬었고 명절에 선물도 보냈다. 내가 사심 없이 도와주고 신경을 써주니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더 큰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고 다 용서했다고 믿었는데 마음속에 찌꺼기 같은 게 남았었나 보다.
회사에서의 여러 복리 후생 중에 결혼과 관련된 혜택 및 자녀관련 된 혜택을 사회생활을 이렇게 오래 했는데 당연히 한 번도 받지를 못한다. 내가 받질 못하는 대신 누가 받았다고 하면 같이 기뻐해주는 일은 아주 많이 했다. 언젠가 근속연수가 오래된 미혼인 직원과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직원의 불만이 바로 복리후생이었다. 비슷하게 입사를 한 동기들은 자녀 교육비 다 지급받아 대학졸업 시키고 결혼식까지 다 지원받았는데 본인은 그런 게 하나도 없어서 그게 가장 억울하다고 얘길 했다. 그 직원은 나도 결혼을 못해서 받은 혜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얘길 하니 동조해 주길 바랐던 걸까. ‘아 그래? 나도 그래'라고 하고 싶었지만 다독여주고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다.
업무상 트러블이 있었을 경우 '그러니까 결혼도 못했지'라고 말만 안 했지 얼굴에 드러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의도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부부와 자녀얘기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별히 생각나는 직원들이 몇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얘길 하면 내가 못 알아들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나중에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말았다.
결혼을 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니 최대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그래서 나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생겼다. 절대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결혼한 사람보다 많았으니 그들보다 편하게 살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못한 상황은 나에게 또 다른 생각의 확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앞으로 결혼을 할 건지 말건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오래전에 써놓은 글이 있다. 지금은 이 글은 고쳐야 할 때다. ‘앞으로 결혼을 할 건지 말건지가 아니라 못할 것 같다.’로 말이다.
이제 난 사람들의 관심에서 많이 벗어나있다. 그간의 관심이 서서히 걷어지니 나한테 관심을 좀 가져달라고 얘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벗어나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이게 싫지 않다. 내 인생 여러 과정 중에 하나를 또 진행하고 있으니 잘 마무리하고 또 다른 퀘스트를 받으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여러 날을 지내던 중 나를 궁금해하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생겼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보는 같은 아파트 사시는 분이다.
“궁금한 게 두 가지가 있어요. 왜 이제 끔 결혼 안 했어요? 그리고 왜 결혼 안 해요? 내가 중매해 준다고 어머니한테 말씀드렸는데 대답이 없으시네요.”
“지금은 별 볼일 없어요. 그리고 일하다 보니 세월이 그냥 간 것 같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누군가를 만나게 됐을 때, 생각해 보면 외로워서 찾은 적은 없었고 온전히 혼자 잘 있는 상태에서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나타났었다. 지금은 나타난 지가 꽤나 오래돼서 그게 문제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외로워서 사람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른 사람을 이용해 두려움에서 벗어나거나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일일 텐데 그런 일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혼인 상태에서 이와 관련된 얘기를 꽤나 길게 했다. 나는 이미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을 해서 문제가 없는데 현재 한국은 혼인률이 급감하고 있는 상태이다. 혼인률은 출생아 감소로 연결이 되는데 이 부분은 많이 암담하다. 결혼 적령기의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결혼을 할 수 있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환경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