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기분
벌써 12월이라니 매번 생각해 봐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세월이 정말 빠르구나’ 하면서 충고를 들을 때만 해도 대체 어느 정도 빨리 가길래 저런 말을 달고 살까.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시간이 좀 빨리 가게 해달라고 바란 적이 많다.
어떤 게 가장 후회되냐고 물어본다면 난 이때 시간 좀 빨리 가게 해달라고 아무 신들에게나 바랬던 게 가장 후회가 된다. 그간 살면서 문제가 있었던 일들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 실수니까 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좀 빨리 가게 해달라고 기도 했었던 일은 내 실수 중 가장 큰 실수로 느껴져 후회가 된다.
어렸을 때 누가 나한테 ‘나이 들수록 정말 시간이 빨리 가니까 조심해라’라고 수도 없이 말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갈 줄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 알게 되었으니 경험을 꼭 해봐야 하는 일이 있다면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가는 걸 경험하기’ 이런 체험들을 VR 같은 걸로 만들어서 필수교육과정에 정규과목으로 포함해서 아이들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것 같다. 12월이 되니 이런 공상들을 자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올해는 몸이 아프거나 해도 걷기 운동이라도 꼭 할 정도로 운동을 빠짐없이 했다. 연초에는 발가락 골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발가락 쪽에만 힘이 안 가도록 해서 로잉머신을 열심히 했다. 이렇게 운동을 이어나가던 중 달리기를 꾸준히 해봐야 되겠다 싶어서 아주 느리지만 꾸준히 뛰었다. 동네 근처 산길도 뛰고 공원도 뛰고, 뛰어봤자 한 삼사십 분쯤 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뛰는 게 나에겐 엄청나게 뛰는 거니 뿌듯하기도 하고 오로지 내 몸으로만 하는 운동이니 기분 좋았다.
기분 좋게 몇 개월을 천천히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내 양쪽 무릎이 다 아프게 되고 특히 왼쪽 무릎은 자다가 아파서 깰 정도로 통증이 생겨버렸다. 정말 살살 뛴다고 생각했고 시간도 길지 않으니 몸에 무리가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 통증은 그냥 지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원래 몸에 배어있던 데로 생각을 해서 탈이 난 것 같다. 머리와 마음과 몸이 각각 서로를 받쳐줘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시기가 나는 이미 지났는데 아주 조금 욕심낸다는 게 몸이 아픈 걸로 나타났다. 내 몸이라도 어느한곳 과하게 치우침 없이 적절하게 대해줬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된 것 같다.
결국 병원에 갔다.
“관절염이 시작될 나이가 된 것 같아요.”
그간 너무 생각이 어렸나, 이런 얘길 들으니 꼭 비자발적 퇴직통보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하는 얘기니 귀담아듣고 앞으로 조심해야지 싶었고 주사치료와 물리치료를 계속하면 좋아지니 걱정 말라고 얘길 해줬다.
불현듯 ‘장자’의 말이 생각났다.
‘텅 빈 마음으로 세상에 순응하라’
뜻이 이와 비슷하지 않지만 모든 걸 받아들이는 느낌은 비슷하니 또 한 번의 경험으로 배우게 됐다.
그렇게 무릎이 아파서 두 번의 일요일을 그냥 보내고. 오늘이 세 번째 일요일 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목이 좀 아프고 두통이 있는 게 감기였다. 코로나 시기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기 기운을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다. 안 그래도 먹는 약이 많은데 감기약을 먹는 것보다 한 껏 쉬어주는 게 좋겠다 싶어 원래 쉬고 있는데 더욱더 적극적으로 푹 쉬었다. 그래서 좀 괜찮아졌는데 어제저녁에 잠깐 나갔다 올 일이 있어서 집에 오는 길에 너무 추워서 한 500m 정도 뛰어서 집에 왔다. 찬 공기가 깊숙이 들어와서일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는 지끈지끈하고 목구멍은 박하사탕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싸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으로 한파주의보 경보음이 연신 울려댔다. 날씨를 보니 영하 10도였다. 아마 체감온도는 더 하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오늘 뛰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처음 겨울이고 가장 추운 날이니 한번 나가서 뛰어보면 감기기운도 같이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상상을 하다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겨울에 러닝을 해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겨울용 복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러 겹 겹쳐있으면 될 것 같아서 하나씩 겹쳐 입었다. 장갑은 면장갑을 두 개 끼고 비니로 귀를 가리고 버프로 코와 목을 감싸고 반팔티, 긴팔티, 플리스, 러닝재킷 이렇게 입으니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곤 바로 나갔다.
무릎이 아직 다 회복이 되질 않은 상태이다. 병원에서는 통증이 없는 한도 내에서 운동은 괜찮다고 했으니, 아프면 집에 다시 오면 되니까 하는 생각이었다. 막상 영하 10도라도 여러 겹으로 입으니 춥진 않았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이 시렸는데 이건 조금 뛰면 괜찮아질 것 같아 바로 뛰기 시작했다. 원래는 1km 정도만 뛰고 좀 걷다가 와야지 싶었다. 그런데 뛰니까 뛸만했다. 중간에 오른쪽 무릎에 간헐적으로 통증이 있긴 했지만 그건 오랜만이라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이내 통증은 사라졌다. 버프로 코를 감싸니 숨을 쉬기는 약간 벅찼지만 그래도 찬 공기를 빨아들이니 마치 겨울철 야외 노천탕에서 머리만 내놓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2km만 뛰어야지 싶어 그 정도 뛰고 난 후 집까지 뛰어서 들어왔다. 2.61km가 찍혀있었다.
추울까 봐 얇은 플리스재킷을 입은덕에 그 정도 뛰었어도 땀이 좀 났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따뜻하게 샤워를 했는데 기분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있을까. 샤워하고 속옷을 조물조물 빨아 꽉 짜놓은 후에 머리를 말리고 감기기운이 있었으니 최대한 빨리 몸을 꽁꽁 싸맸다. 콧물이 나던 건 멈췄지만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조금 더 아픈 느낌이다. 감기가 얼어 죽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은 탓에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나 보다.
공원에는 온통 나보다 스무 살, 서른 살쯤 많아 보이는 분들만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운동하는 분들을 뛰면서 지나질 때마다 ‘오래오래 건강들 하시길’ 하면서 한번씩 바라본다. 나를 보는 느낌은 어땠을까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사람은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니 그 오만가지 생각을 하느라 별 생각이 없었을 것 같다.
잠깐이지만 그래도 뛰고 오니 상쾌했다. 더운 날도 마찬가지지만 추운 날도 운동하러 나가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막상 나가면 뭘 하게 되는데, 인생이 원래 그런 것 같다. 그냥 나가면 뭘 하는데 그냥 나가기가 가장 힘겹다.
상쾌한 기분을 다시 매일 느낄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