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라는 종의 특성 중 하나는 ‘애도하는 인간’이다. 타자의 죽음을 비통해하고, 남은 사람과 슬픔을 나누며 위로를 건넨다. 죽음은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생자필멸은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다.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이의 죽음은 ‘호상(好喪)’이라고 한다. 한쪽에선 상주가 문상객을 맞고 곡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가까이서 멀리서 한자리에 모여 고인을 추억하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게 우리네 전통적인 상가 풍경이었다. 장례는 산 자와 망자의 영결 의례이자, 망자가 산 자들을 불러모아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리다.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사촌뻘인 화석인류 네안데르탈인이 죽은 이를 매장했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밝혀졌다. 최근에는 그 매장이 애도의 뜻을 담은 장례문화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 증거도 나왔다. 2020년 2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고고학 연구팀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산악지대의 샤니다르 동굴 유적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추가로 발굴했다. 두 팔을 가슴에 포갠 채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유골의 주변 토양에선 꽃가루 화석도 추출됐다. 연구팀은 다양한 분석을 토대로 그 꽃가루가 설치류 동물이나 곤충이 바깥에서 묻혀온 ‘오염’된 증거가 아니라 망자를 기리는 뜻으로 헌화한 ‘꽃 매장’의 증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들이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추상적인 사고능력과 망자에 대한 동정심, 나아가 상실감과 추모 감정을 가졌음을 시사한다”고 봤다.
사람이 아닌 포유동물도 애도 의례를 한다. 코끼리가 죽은 가족이나 동료의 곁을 지키는 습성은 잘 알려져 있다. 어미 돌고래가 죽은 새끼의 사체를 등으로 떠받쳐 업고 다니는 동안 무리가 호위하거나, 어미 침팬지가 죽은 새끼를 오래도록 안고 다닌 사례도 마찬가지다. 얼룩말, 기린, 늑대 무리에서도 ‘애도’로 해석되는 행동이 관찰됐다. 인간과 동물은 비슷한 환경에 노출되면 같은 호르몬을 분비한다. 죽음의 충격과 슬픔은 적절한 애도를 통해 완화되고 치유될 수 있다. 동물의 의례행위를 연구한 미국 동물행동학자는 “애도 의례는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한다. (…) 모르는 사람이 죽었을 때조차 슬픔을 느끼는 능력은 생존 기술로 진화했다. 익명의 집단이 한꺼번에 슬픔을 표현할 때 우리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한다.(케이틀린 오코넬,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중에서)
죽음을 세대를 넘어 집단 기억으로 전승하고 기념하는 동물종은 현생인류가 유일하다. 그 대상이 꼭 공동체의 존경과 신망을 받은 유명 인물에 한정되는 건 아니다. 자연재해, 범죄, 학살, 사회적 참사, 국가폭력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한 ‘애도’는 망자의 넋을 달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애도는 지인과 공동체가 받은 충격과 상처의 치유, 비극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다짐과 약속이다. 애도의 원초적 바탕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다.
자연사나 병사처럼 불가항력의 죽음이 낳는 정념은 슬픔·애틋함·미안함이 대부분이다. 수긍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별에 대한 순정한 감정이다. 그러나 의도된 죽음,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은 슬픔에 더해 분노·원망·불신·두려움·복수심 같은 다른 격정을 동반한다. 가해(혐의)자, 또는 예방책임자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충분한 애도,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 같은 치유와 회복이 필수적이다. 그런 과정이 없는 해원과 상생은 불가능하거나 불씨가 꺼지지 않은 껍데기일 뿐이다.
미국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2016년 저작 <분노와 용서>(우리말 번역본은 2018년 출간)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의 본디 이름은 에리니에스였다. 아버지 우라노스와 어머니 가이아 사이에 태어난 세 자매는 흉측한 몰골을 한 ‘저주와 복수’의 여신이다. 명계에 살면서 죽은 자의 재판 결과에 따라 무시무시한 벌을 준다. 에리니에스의 다른 이름인 ‘퓨리’다. 영어 단어 ‘퓨어리’(fury, 분노·격분)의 어원이다.
퓨리들은 지혜·전쟁·문명·법과 정의를 관장하는 아테나 여신이 오레스테스에 대한 재판에서 자신들에게 못마땅한 판결을 하고 형 집행을 방해하자 격분해 아테네 땅 전역에 저주를 퍼붓고 날뛴다. 아테나 여신은 퓨리들을 달래려 “좋은 일을 하고 상냥한 감정을 품고 표현하면 제대로 대접해주고 영예롭게 기억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거래가 성사되고, 퓨리들은 ‘평온한 성품’을 드러내며 “보편적 사랑이라는 사고방식을 통해 서로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퓨리는 에우메니데스가 된다.
누스바움은 이 서사를 “정치적 정의란 그저 분노를 가둬놓은 울타리를 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분노 자체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용서의 길은 타인에게서 부당행위를 당한 누군가가 끔찍한 분노를 겪는 데서 시작하며, 대면과 고백, 사과, 탐색 등이 포함된, 보통은 가해자와 피해자 양자가 모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분노라는 감정의 부담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사회적 재난의 희생자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도 다를 게 없다.
2023년 4월5일은 모두 159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 159일째 날이었다. 온종일 부슬비가 내리던 이날 저녁, 유가족협의회는 서울시청 앞에서 추모대회를 열었다. 유족들은 먼저 떠나보낸 피붙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인 4·16합창단은 연대 공연을 했다. 야당 국회의원도 몇 명 참석해 특별법 제정을 거듭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유족의 호소와 절규를 들어야 할 윤석열 정부와 집권당 책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앞서 4월3일은 ‘제주 4·3’ 75주년이었다. 현재 제주 4·3에 대한 공식 정의는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다. 7년 7개월에 걸친 학살극으로 숨진 남녀노소 민간인 사망자 수는 공식 집계로만 1만4532명, 추정치는 3만명이나 된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제1관 ‘역사의 동굴’ 끝 지점에 들어서면 하얀 대리석 비석이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똑바로 세워진 게 아니라 누워 있다. 표면에는 아무런 글자나 문양도 새겨지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의 슬픔조차 담아내지 못한 ‘백비’다. 비석 앞 설명문이 사연을 말해준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제주 4.3 백비
꼭 20년 전인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2006년에는 역시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제주에서 열린 4·3 위령제에 참석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재임 5년 중 3차례나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2022년 추념식 때에는 현직 대통령 대신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맞은 올해 4·3 추념식에 가지 않았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념사에서는 의례적인 인사말에 더해 문화·관광 활성화, 아이티(IT) 콘텐츠와 디지털 기업 유치 지원 등 다소 뜬금없는 경제개발 공약으로 절반을 채웠다. 유족들이 “추념식장에서 할 얘기냐”며 고개를 흔들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앞서 3월31일 광주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5·18 학살의 주범 전두환씨의 손자인 전우원씨가 광주를 찾아가 유족과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로 군부독재에 맞서다 고통을 당한 광주 시민께 (…) 더 일찍 사죄의 말씀을 드리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전씨는 5·18 민주묘지의 희생자 묘역에서 또 무릎을 꿇고 양복 겉옷을 벗어 묘비를 하나하나 닦으며 울먹였다.
유족과 피해자들은 오히려 전씨의 등을 두드리고 음료수를 건네며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의 최후 항전에서 숨진 고등학생 문재학의 어머니는 “광주를 올 때 마음속으로 얼마나 두려웠겠어. 그래도 광주까지 와서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보니 마음이 풀립니다. 진실로 너무너무 고마워”라며 전씨를 보듬었다. 문재학군은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년)의 주인공이다. 전씨가 할아버지의 죄악을 대속해야 할 법적 책무는 전혀 없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사과는커녕 거짓말과 뻔뻔함으로 일관한 전두환씨를 대신해, “가족의 구성원” 자격으로 사죄한 우원씨를 광주 시민은 마치 용서에 목말랐던 사람들처럼 품어 안았다.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사죄와 용서란 그런 것이다.
전우원씨의 행동은 2021년 10월 국민의힘 대선주자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개 사과’와도 크게 대조된다. 당시 윤씨는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주장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또다시 파문을 일으켰다. ‘사과 따위는 개한테나 줘라’는 식의 희화화는 당사자의 품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1970년 서독 최초의 사회민주당 소속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무릎 사죄’는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장면의 하나로 회자된다. 12월7일 아침, 폴란드 바르샤바는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쌀쌀한 날씨였다.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비를 찾아 화환을 바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 독일의 정상이 첫 침공 국가였던 폴란드를 방문한 것도, 유대인 학살에 공식적인 참회를 표시한 것도 처음이었다. 브란트 총리는 잠시 묵념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예정에 없던 즉흥적 행동이었다. 총리의 무릎 사죄를 두고 독일에서도 처음엔 찬반 여론이 갈렸지만, 나치 범죄를 속죄하고 피해자 배상을 실현하는 물꼬를 텄다. 브란트 총리는 이후 저서에서 “(무릎 사죄는) 독일의 비참한 과거사와 살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가책으로 했던 일”이라며 “말로는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술회했다.
하물며 제주 4·3과 광주 5·18, 4·16 세월호와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는 자국의 국가폭력 또는 정부 당국의 중대과실과 무책임에 희생된 한국 시민이다. 무고한 목숨과 인권이 짓밟힌 과거사의 진실규명과 사과, 합당한 책임이 가해(책무) 당사자에겐 부인하고 싶은 곤혹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은 언변과 수사만으로 화합과 미래를 말하는 것은 미봉이자 기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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