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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l 10. 2024

3월과 7월 어느 날

[Demian p.86] 운명과 마음

Fate and temperament are two words for one and the same concept (운명과 마음은 하나이면서 같은 개념인 거야.) - p.86, Demian, 1989, Perennial Library


표지부터 샅샅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데미안 원서 필사를 하고 있다. 작년 4월에 시작했다. 나는 읽은 책을 읽고 또 읽고 수없이 만지작거리며 한 문장씩 또 읽는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원서가 그런 책 중 하나다. 반이 지나는 날 자축 파티를 할 거다.


데미안과 함께 하는 새벽 영어 필사는 항상 특별하다. 내가 좋아하는 언어로 싱클레어가 걷는 길을 같이 걷는다. 그의 수치를 같이 느끼고 그와 같이 방황한다.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겹쳐져 필사를 멈추고 막막한 순간들에 그저 머물기도 한다.


특히나 왼손으로 하는 데미안 필사는 끊는 불안정의 상태에서 나를 끌어내려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명상이며, 운명의 틈을 벌려 속을 깊이 내려다보는 예언이며, 지금의 마음을 투사하며 참아내고 각인하는 특별한 일기이다. 눈으로 쓰고 손으로 쓰고 마음에 새긴다.


운명과 마음, 가볍지 않은 압박에 항상 나를 당황하게 하는 두 단어다.


마음이 많이 쓰라렸던 3월 어느 날 필사를 하지 못했다. 새벽 필사를 못했다는 사실마저도 하루종일 인지하지 못했다. 그 한 주 내내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 커서 겪는 싱클레어의 방황, 나는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운명이라 하고 부끄러움을 견딘다.


열이 끓었던 7월 어느 날 나의 새벽은 침대 시트 아래 묻혀 버렸다. 일어나자마자 차를 몰고 나가 한참을 헤매다 돌아와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몽롱한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필사를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이것도 운명이지, 그렇게 마무리했다.


나 자신과의 약속, 다짐, 루틴의 헐렁한 위태로움을 느낀다. 한 발 디뎌야 할 때라 여긴다.


오늘 싱클레어의 내적 방황은 자신으로 향했다. 타인인 줄 알았던 마음속 그림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 얼굴의 윤곽(the outlines of the face),

붉은 기운들 감도는 눈(the red-rimmed eyes),

밝게 빛나는 이마(the brightness on the forehead),

생기 있는 붉은 입술(the bright red mouth)


그런 모든 것들이 삶의 결정하는 실제의 자신이고 운명인 것이다. 그것이 그 운명의 소리이며 삶의 리듬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모습이 자기 자신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다.


오늘 나는 될 수 있는 한 아주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하루를 보낼 것이다. 운명인 것처럼 마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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