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이자 뮤덕이 말하는 <위키드>가 영화로 나와야 했던 이유
“핑크랑 초록색이 잘 어울리네”. 영화 속 주인공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는 서로의 상징색인 핑크색과 초록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색상환의 정반대 편에 있는 두 색의 보색 관계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글린다와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라온 엘파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많은 것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의외로 어울리는 매력을 보여준다.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위키드>(2024)는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전혀 다른 ‘엘파바’와 ‘글린다’가 우정을 쌓으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뮤지컬의 1막의 내용만을 담고 있어 두 사람의 학교생활과 ‘마법사’의 초대로 에메랄드 시티에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것은 원작이 있는 영화의 숙명이다. 특히 <위키드>는 2003년 초연부터 전 세계 6천만 명이 관람했고, <겨울왕국>의 엘사로 유명한 ‘이디나 멘젤’ 등 수많은 배우가 거쳐 간 뮤지컬이기에 이번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부담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부터 노래까지 전부 ‘오즈메이징’ 할 정도로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영화 속 ‘신시아 에리보’와 ‘아리아나 그란데’는 새로운 엘파바와 글린다의 탄생이라 말하고 싶다.
원작 뮤지컬에서는 많은 착장 중 넘버 ‘Popular’로 유명한 핑크 드레스 한 벌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비해 영화의 ‘글린다’는 첫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핑크 그 자체로 등장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핑크색의 글린다는 자칫하면 과하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아리아나 그란데는 더욱 주변을 핑크색으로 가득 채우며 자신의 러블리함을 표현했다. 넘버에서도 글린다의 통통 튀는 느낌이 묻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강점인 가성과 바이브레이션도 조화롭게 사용해 익숙하면서도 특별함을 가득 담았다. 시각부터 청각까지 관객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준 아리아나 그란데는 자신의 ‘Sweet Like Candy’ 향수 같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자신만의 연분홍빛 ‘글린다’를 만들었다.
그리고 별다른 기교 없이, 진심을 다해 이전 엘파바들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따라간 신시아 에리보의 정석적인 연기와 노래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2016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과 그래미상 뮤지컬 앨범상을 수상하고, 2019년 영화 ‘해리엇’으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경력에서 예상을 하고 갔음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넘버 ‘The Wizard and I’와 ‘Defying Gravity’를 듣다 보면 영화관이 아니라 극장의 OP 열에 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량을 보여줬다.
피예로 역은 조나단 베일리가 맡았는데, 영화에서 딱 하나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피예로의 남자주인공적 면모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피예로의 솔로 넘버인 ‘Dancing Through Life’에서 뮤지컬의 백바지에 빨강 조끼를 입은 강렬한 모습이 아닌 검은 옷을 입어 주변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도 이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나단 베일리는 탄탄하면서 깔끔한 노래 실력과 <브리저튼>의 앤소니와 또 다른 매력으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쫀득쫀득한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담 모리블 역의 양자경도 노래에서는 약간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에서 ‘주연보다 인상 깊었던 연기를 보여줬다’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모두에게 존경받지만, 알 수 없는 속내를 가진 마담 모리블이 되어 영화에 깊이감을 더해주었다.
사람들이 뮤지컬의 영화화를 항상 반기는 것은 아니다. 영화 <레미제라블>(2012)처럼 성공적인 뮤지컬도 있지만, 영화 <캣츠>(2019)처럼 뮤덕들과 대중 모두에게 외면받기도 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위키드>는 광팬도, 모르는 사람도 사로잡았기에 성공했다 평가하고 싶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서사 확장의 영향력이 컸다. 원작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추가된 서사는 이해를 도와주었고,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물의 내면을 잘 보여주었다. 새로운 서사 중 하나인 어린 시절은 엘파바의 결핍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넘버 ‘Defying Gravity’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면서 ‘내 안의 뭔가가 변했고 더는 예전 같지 않은’ 완전한 모습이 된 엘파바의 비행을 더욱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끝없이 추락했지만 결국 중력을 거스른 엘파바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화 <나우 유 씨미 2>(2016)의 감탄이 나왔던 카드 패스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와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화려한 장면을 만드는 존 추 감독만의 연출은 영화에 새로움을 불어넣었다. 그중 시계 모양의 책장들이 안무에 맞춰 돌아가는 넘버 ‘Dancing Through Life’의 연출은 뮤지컬에서 할 수 없던 영화만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현장에서만 웃길 수 있는 뮤지컬의 유머 코드들을 쓰지 않거나 알맞게 각색하며 재미를 더한 것도 한몫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영화 <위키드>가 만들어졌다.
아마 원작 뮤지컬을 본 사람이라면 ‘존 추 감독이 진짜 위키드 덕후구나’라 생각이 계속 들었을 것이다. <위키드>에 대한 존 추 감독의 사랑이 영화에서 뚝뚝 떨어진다. 과감히 생략할 수도 있었던 서곡(overture)을 영화에서 빼지 않은 것부터, 추가적인 서사 외에는 원작 순서와 똑같이 진행되는 넘버들과 장면, 세세한 디테일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원작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줬다.
넘버 'One Short Day'에 나온 상상 속의 ‘에메랄드 시티’를 재현하는 데도 엄청 진심이었다. 무대 밖을 벗어난 영화의 ‘언리미티드’한 특징과 존 추의 상상력이 더해진 수많은 사람, 건물, 구경거리가 가득한 세트장에서 촬영한 에메랄드 시티의 동적이고 화려한 모습은 두 주인공은 물론 관객의 눈까지 사로잡았다.
영화에서는 마법사의 열기구를 타고 날아가려다 실패하는 장면이 짤막하게 등장한다. 뮤지컬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열기구에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왜 넣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더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왜 마법사가 타고 온 열기구를 탄다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지?”라는 과몰입한 덕후의 질문이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물론 이것은 뇌피셜일 뿐이지만) 뮤지컬을 보고 혼자서 곰곰이 고민하다가 자문자답하는 존 추 감독을 상상해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면서도 동감될 것이다.
덕후들만 알 수 있는, 정확히는 과거에 대한 존경도 많이 숨어 있었다. 그중 가장 놀랐던 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아봤을 전설이라 불리는 엘파바 역의 ‘이디나 멘젤’과 글린다 역의 ‘크리스틴 체노웨스’, 두 사람의 카메오 출연이었다. ‘오즈의 초대 마녀를 연기하는 배우들’ 역으로 아주 짧게 등장했지만, 말 그대로 초대 마녀로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아우라를 뿜으며 엘파바와 글린다를 따스하게 맞이해 엘파바와 글린다의 세대교체를 알렸다.
그리고 아마 1930년대 스타일의 올드한 ‘타이틀’과 마지막의 ‘To be continued’를 보고 당황했던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이는 1939년에 개봉한 영화 <오즈의 마법사> (1939)의 타이틀을 오마주한 것이다. 또 원숭이를 돕기 위해 처음으로 마법 주문을 외울 때, 검은 배경에 악당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엘파바를 익스트림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오즈의 마법사>(1939)의 오마주였다.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마법을 쓰는 서쪽 마녀는 잔악했지만, 같은 모습인 <위키드>(2024) 속 엘파바는 선한 의도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속 오마주였다. 신발을 고르던 글린다가 집어 든 ‘빨간 루비 구두’ 같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오마주도 있었다. 영화 전반적으로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넣으면서도 관객들에게는 알면 알수록 더욱 재밌어지도록 이스터에그를 넣어두려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게 느껴졌다.
초반의 초록색과 핑크색은 보색관계라는 설명과 덧붙여 보색 관계는 두 색을 합할 때 흰색 또는 검은색이 되는 관계라는 것도 설명하고 싶다. 두 색을 섞어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함께 에메랄드 시티에 왔지만, 마법사에게 대항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엘파바와 오즈에 남아 있는 선택을 한 글린다의 관계와 닮아있다. 그리고 두 색을 섞은 실제 결과로 RGB 가산혼합에서 흰색, CMYK 감산혼합에서 검은색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결말도 만났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만나기도 훨씬 이전에 선과 악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은 누가 선과 악인지도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채로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파트 2(2025년 예정)에서 존 추 감독만의 색으로 어떻게 물들여갈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