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량진행 1호선 전철
올해 초, 나는 노량진행 전철을 탔다.
63세. 공직 생활 30년을 마치고 일반 기업에서 7년을 더 일했다. 연금으로 살 수 있었지만, 나는 다시 강단에 섰다.
대학 겸임교수 시절의 향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심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노량진의 한 군무원 시험 전문학원에서 통신공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첫 출강 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내렸다. 아침 7시 반. 역 계단을 오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학원가로 향했다.
그때 나는 알아차렸다. 이들의 눈빛이 내가 공직에서 만났던 수많은 공무원 지망생들과 똑같다는 것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37년 전 나 자신의 눈빛과 같다는 것을.
그 눈빛에는 희망도, 열정도 없었다. 오직 '통과해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있었다.
2. 강의실의 풍경
내가 맡은 반은 '통신공학 심화반'이었다. 수강생은 30명.
첫 수업 전, 나는 출석부를 훑어봤다. 서울 소재 대학 졸업생 20명, 지방대 졸업생 10명. 이들은 이미 한국 교육 시스템의 '승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가?
수업을 시작했다. "여러분, 왜 군무원이 되려고 합니까?"
침묵이 흘렀다. 30초쯤 지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안정적이니까요.“
"안정 말고 다른 이유는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 군무원으로서 이루고 싶은 비전 같은 게 있습니까?"
다시 침묵. 이번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날, 깨달았다. 이들에게 군무원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명문대를 나왔지만 대기업은 40대면 구조조정당하고, 중소기업은 불안정하고, 창업은 위험하다. 그래서 유일한 선택지는 공무원이나 군무원 같은, 소위 철밥통으로 불리는 직업이었다.
한 달 후, 나는 수강생 한 명 한 명과 면담을 시도했다.
29세 김 모씨.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2년 근무 후 퇴사했다. "교수님, 회사에서 미래가 안 보였어요. 과장만 돼도 경쟁에서 밀려나면 나가야 하더라고요. 제가 40대, 50대가 됐을 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군무원이 낫죠.“
32세 이 모씨. 지방대 출신. 4수째다. "교수님, 저는 꿈이 없어요. 그냥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군무원만 되면 안심하실 것 같아서요.“
27세 박 모씨. 서울 명문대 사회학과 졸업. "교수님, 진짜 하고 싶은 건 NGO 활동이에요. 근데 그걸로 먹고살 수 있나요? 일단 군무원 되고, 나중에 여유 생기면 그때 하려고요.“
면담을 하면 할수록,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들은 모두 한국 교육의 '성공작'들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열심히 공부했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다시 고시원에 앉아, 사지선다형 문제를 풀고 있었다.
3. 37년 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그들
나는 1962년생이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대학을 나왔다. 그때 나에게 교육은 계층 상승의 유일한 사다리였다. 나는 악착같이 공부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공직에서 30년간 성실히 일했다.
나는 한국 교육의 수혜자다. 교육이 나를 가난에서 구했다.
그런데 지금 노량진에서 만난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나처럼 가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들은 승자였다. 그런데 왜 다시 수험생이 되어야 하는가?
어느 날 수업 후, 한 학생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도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힘들었어요?"
"물론이지. 나도 2년 준비했어.“
"그럼 공무원 생활은 어땠어요? 보람 있었어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글쎄... 보람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은 반복적인 업무였어. 창의적인 일은 별로 없었고.“
학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교수님은 왜 공무원이 되신 거예요?“
나는 답했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3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선택지가 없어서' 공무원이나 군무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차이가 있다면, 1980년대에는 가난 때문이었고, 2025년에는 불안 때문이라는 것.
4. 대학에서 본 또 다른 풍경
나는 2000년대에 2년 간 서울의 한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통신공학을 가르쳤다.
대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업 첫 시간 오리엔테이션 때, 나는 물었다. "여러분은 왜 대학에 왔습니까?“
한 학생이 대답했다. "좋은 직장 가려고요."
"좋은 직장이란?"
"대기업이요. 아니면 공무원이요.“
"그럼 여러분의 전공인 통신공학에 관심이 있어서 온 건 아닌가요?"
학생들은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한 학생이 솔직하게 말했다. "교수님, 솔직히 전공은 중요하지 않아요. 학점 잘 받고, 토익 점수 올리고, 스펙 쌓는 게 중요하죠.“
나는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배우러 오는 게 아니라, 학점을 받으러 온다.
수업 첫날, 학생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교수님, 학점 잘 주세요?"였다. "이 수업에서 뭘 배울 수 있나요?"라고 묻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중간고사 후 한 학생이 찾아왔다. B+ 학점에 불만이었다.
"교수님, 제가 대기업 지원하려면 평점 3.8은 넘어야 해요. 이 학점 때문에 떨어지면 어떡해요?“
나는 물었다. "그럼 자네는 내 수업에서 뭘 배웠나?"
학생은 당황했다. "그게... 뭐 여러 가지요...“
"구체적으로?"
"음... 기억이 잘...“
학생은 내 수업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A학점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날 나는 허탈했다. 나는 교육자가 아니라 학점 자판기였다.
5. 교육의 성공, 인간의 실패
학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종종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한국 교육의 수혜자다. 교육이 나를 가난에서 구했고,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만들었다. 나는 두 아이를 대학까지 보냈고, 지금은 넉넉지 않지만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숫자로만 보면, 한국 교육은 엄청난 성공이다. 1960년 대학 진학률 5%에서 2025년 70%로. 문맹률 거의 0%.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교육열. 세계 최고 수준의 학업 성취도.
그런데 왜 우리는 불행한가?
노량진에서 만난 20대, 30대들.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생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대신 그들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험에 붙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학점을 받을까?“
우리는 '어떻게'만 배웠지, '왜'는 배우지 못했다.
내 공직 생활을 돌아본다. 3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상사의 지시를 따랐다. 규정을 준수했다. 승진했다.
그런데 나는 행복했는가? 나는 내 일에 의미를 느꼈는가?
솔직히 말하자. 아니다.
나는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성실했지만 열정적이지 않았다. 나는 공무원이었지만, 내가 진짜 원했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내 자녀들에게 똑같은 길을 권했다. "너희도 안정적인 직장 가라. 공무원이나 교사 되면 좋겠다.“
나는 내가 불행했던 삶을 내 자녀들에게도 물려준 것이다.
6. 시스템의 포로
노량진에서 6개월을 가르치며, 나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개인이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문제다.
학생들은 게으르지 않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한다. 하루 12시간씩 공부한다. 주말도 없다. 친구도, 연애도, 취미도 포기한다.
학부모들도 나쁘지 않다. 그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한다. 내 친구는 자녀 둘의 학원비로 월 300만 원을 쓴다.
교사들도 최선을 다한다. 내가 대학에서 만난 교수 동료들, 중고등학교 교사 친구들. 모두 헌신적이다.
그런데 왜 모두가 불행한가?
우리는 모두 시스템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좋은 대학을 가려면 수능 점수가 높아야 한다.
수능 점수를 높이려면 더 많이, 더 오래 공부해야 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에 간다.
좋은 직장이란 대기업 또는 공무원이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신은 '실패자'가 된다.
내가 만난 한 학생은 음악을 좋아했다. 기타를 잘 쳤다. 그런데 부모는 말했다.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니? 일단 대학 가고, 안정적인 직장 구한 다음에 취미로 해.“
그 학생은 지금 노량진에서 군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기타는 고시원 한구석에 세워져 있다. 먼지가 쌓여 있다.
우리는 '나중에'를 위해 '지금'을 포기한다. 그런데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7. 질문 없는 사회
대학 강의 중 한 번은 이런 실험을 해봤다.
"오늘은 여러분이 질문만 하세요. 제가 답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학생들은 당황했다. 5분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한 학생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교수님, 이거 시험에 나와요?“
나는 웃었다. "아니, 그런 질문 말고. 여러분이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통신공학의 진짜 의문점에 대해, 아니면 사회에 대해, 인생에 대해.“
또 침묵.
결국 그날 수업은 실패했다. 학생들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군무원 시험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내게 답을 요구했다. "교수님, 이 문제 답이 뭐예요?" "교수님, 이렇게 외우면 되죠?“
한 번은 이렇게 물어봤다. "여러분, 한국 ICT 기술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한 학생이 답했다. "교수님, 그거 작년 기출에 나왔어요. 답은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예요.“
"아니, 내가 묻는 건 기출 답안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이에요.“
"...저희 생각이요?"
학생은 진짜 당황했다. 20년 가까이 교육을 받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 교육은 정답을 찾는 법만 가르쳤다. 질문하는 법, 사고하는 법, 의미를 만드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공직에서 30년을 일했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왜'라고 물었을까?
솔직히 거의 없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왜 이 정책을 시행해야 하나?"라고 묻는 대신, "어떻게 빨리 처리할까?"만 고민했다.
그것이 일 잘하는 모범 공무원이었다.
8. 63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주, 한 학생이 합격 소식을 전했다. 3년 만에 9급 군무원에 붙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합격했어요!“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이 학생은 27세다. 앞으로 30년 넘게 군무원 생활을 할 것이다. 그는 행복할까? 그는 의미를 느낄까? 아니면 나처럼, 안정적이지만 공허한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이제 공직에서 물러난 지 7년째다. 연금으로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강단에 섰을까?
처음에는 '아직 할 수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속죄하고 싶다.
나는 30년간 이 시스템의 일부였다. 나는 규정을 만들었고, 정책을 집행했고, 후배들을 키웠다. 나는 "이게 현실이야. 적응해"라고 말했다.
나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니,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제 노량진에서, 대학에서, 젊은이들의 죽은 눈빛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무너진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가고, 안정적으로 살면 행복할 거라는 약속.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믿었고, 내 자녀들에게도 그 약속을 강요했고, 이제 젊은 세대도 그 약속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나는 말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9. 핀란드에서 온 편지
작년에 내 친구의 조카가 핀란드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친구 조카는 교환학생으로 헬싱키 대학에 있었다.
"삼촌, 여기는 정말 다르네요. 학생들이 시험 점수에 연연하지 않아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공부해요. 어떤 애는 철학책 읽고, 어떤 애는 프로그래밍하고. 시험 기간에도 여유가 있어요. 카페에서 친구들이랑 토론하고, 주말엔 숲에 가요. 그런데 성적은 한국 학생들보다 딸리지 않아요. 신기하죠?“
나는 답장을 썼다. "네가 부럽구나. 삼촌이 너희 나이였을 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어.“
그런데 문득 생각했다. 정말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불가능한 걸까?
핀란드 인구는 550만 명. 한국은 5천만 명. 핀란드 GDP는 한국의 1/8.
그런데 핀란드 학생들은 행복하고, 한국 학생들은 불행하다. 왜?
자원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의 문제다.
핀란드는 교육의 목적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학생을 점수로 평가하지 않는다. 시험도 적고, 서열도 없다.
우리는? 우리는 학생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운다. 0.1점 차이로 인생이 바뀐다.
나는 이제 안다. 우리가 핀란드처럼 될 수 없는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해서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지금 시스템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작동하잖아?" "갑자기 바꾸면 혼란이 올 거야.“
하지만 지금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작동하지만 잘못된 결과를 낸다. 높은 성취도, 낮은 행복도. 이게 우리가 원한 결과인가?
10. 작은 실험
만약 내가 다시 학원에 출강한다면, 나는 수업을 조금 바꿀 생각이다.
매주 하루, 마지막 30분은 '질문의 시간'으로 정할 것이다. 시험 문제 풀이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 토론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는 시간.
"한국 정보통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군무원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어떤 군무원이 되고 싶은가?“
처음에는 어색할 것이다. 학생들은 "이런 거 시험에 안 나오는데 왜 해요?"라고 불평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한 명, 두 명씩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 작은 불씨가 다시 타오를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합격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들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단지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작은 변화다. 30명의 학생, 주당 30분.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믿는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고.
11. 남은 시간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의사가 말했다. "건강하시네요. 10년은 더 거뜬히 일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10년.
나는 생각했다. 남은 10년을 어떻게 쓸 것인가?
편하게 은퇴 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취미 생활을 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편안함만으로는 이 무거운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37년 전 나처럼, 선택지가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자녀들처럼, 안정은 있지만 열정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남은 10년, 나는 이 시스템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겠다.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정책 결정자가 아니고, 영향력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노량진 학원의 시간강사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만큼은 말해줄 것이다.
"여러분은 시험 점수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고, 질문하고, 꿈꿀 자격이 있습니다. 안정도 중요하지만, 의미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위선일지 모른다. 나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살지 못한 삶이기에,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