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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May 08. 2023

<메모리아>


[정적]

타이틀이 지나간다


쿵! 


소리가 들린다.


제시카 홀랜드의 두개골을 울린 둔탁한 소음.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무언가 떨어진 건지 확인한다.

소음의 원천은 발견되지 못한다.

흐르는 사운드는 오직 앰비언트뿐이다.

그렇기에 쾅! 소리는 하나의 기이한 사건이고, 제시카로 하여금 그에 이끌려 극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끔 한다.

쾅! 소리는 한순간에 발생하고,

사라진다.


제시카는 정적 속에 남아있는 쾅! 소리의 옅은 흔적, 그 진동을 따라간다.




제시카는 소리를 재현하고자, 첫 번째 에르난을 찾아간다.

그의 작업실에서 에르난은 제시카가 묘사하는 소리의 언어적 재현을 듣고, 사운드로 치환한다.


무거운 구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금속으로 된 우물 바닥에.

주변에는 바닷물이 있어요.

소음이 발생하고, 잦아들거든요.

마치 지구의 핵심에서부터 진동하는 울림 같아요.


에르난은 그녀의 말을 사운드로 구현한다.

처음의 쾅! 소리는 수면장애로 인한 화학반응이었고,

이미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에르난에게 그 소리를 묘사하는 제시카의 말은 텍스트,

다시 그 텍스트를 사운드로 구현하는 에르난의 쿵! (2) 소리는 물리적 재현이다.

둘은 끝내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며칠 후 에르난은 재현한 소리를 그가 만든 음악 속에 넣어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실종된다.



첫 번째 에르난이 사라진 후, 제시카는 또 다른 에르난을 강가에서 만난다. 대화는 에르난이 초면인 그녀의 집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시작된다. 서로를 모르는 둘의 대화는 처음이 아닌 마지막으로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에르난은 자신이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의 기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돌에는 한 소년의 기억이 남아있다. 소년은 친구 둘에게 두들겨 맞고 돈을 빼앗겼다. 돈을 되찾으러 뛰어갔지만, 더 심하게 구타당하고 그의 점심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 조약돌에 남아있는 소년의 진동을 에르난은 느낄 수 있다.

에르난은 자신을 기억저장장치라 묘사한다. 언제 발생했는지도 모를 소음들의 옅은 진동들에 귀 기울이는 기억저장장치.


첫 번째 에르난이 쾅 소리와 함께 발생하고, 실종되어 잦아든 후, 두 번째 에르난이 진동처럼 강가에 남아있었다. 에르난은 처음에는 소음, 두 번째에는 진동의 형태로 제시카에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제시카와 쿵! 소리는 하나의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이고 에르난 두 명은 방법론이다. 첫 번째 방법론은 물리적 재현과 오마주/재창조, 두 번째 방법론은 과거의 진동 자체를 보존하는 방식일 것이다. (기념품 혹은 사진과 같은)


소음의 개념을 모든 존재들로 확장시켜야 한다. 모든 존재들은 소음과 공유하는 아픔이 있다. 시간 그리고 그에 따른 일시성의 불안.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발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산다는 건 붐비는 식당의 소음처럼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요소들이 발생을 정지하면 사람은 조용해진다. 모든 소음 또한 언젠가 잦아든다. 그러면 남는 것은, 그곳에 사람이, 그곳에 소음이 한때 존재했음을 귀띔해 주는 작은 진동이다. 소음과 존재는 발생할 때 살아있고, 잦아들었을 때 죽기에 일시성이라는 슬픔을 나눈다.


첫 번째 에르난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에 집중. 제시카가 부탁했던 것은 이미 발생하고 잦아든 소음의 재현이다. 그리고 보존이다. (제시카는 그 소리를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 했다)  그 둘은 그 소음을 비슷하게나마 재구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에르난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소음을 자신의 음악 속에 넣어 아예 새로운 소음을 발생시킨다. 소음은 발생-소멸의 필멸성을 지니고 있기에, 제시카와 에르난의 재현 작업은 그 필멸성에 대한 소소한 저항이다. 첫 번째 에르난은 실패한다. 소음의 물리적인 재현 (제시카의 말을 듣고 재현한 쿵! 소리)과 전혀 다른 소음의 창조 (제시카에게 선물한 음악) 두 방법 모두 제시카에게 들렸던 쿵! 소리, 과거에 발생하고 잦아들어버린 소음을 다시 살려내려는 목적을 빗겨나가 버린다. 과거의 무언가가 그리워 그 존재를 물리적으로 재형성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에게는 부질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첫 번째 에르난, 존재의 일시성을 이겨내기 위한 첫 번째 방법론은 결국 소음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대로, 소음처럼 발생하고 잦아들어버린다. 에르난은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시카는 두 번째 에르난을 만난다. 첫 번째 에르난이라는 소음이 실종된 후 그가 남긴 진동. 두 번째 에르난의 방법론은 다르다. 그는 진동을 수집한다. 무언가를 새로 창조하지 않는다. 오로지 과거의 진동들을 모아둔다. 첫 번째 에르난이 어떤 순간을 다시 느끼기 위해 그때 했던 행동들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그가 그 순간 보았던 것을 그림으로 다시 그려보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에르난은 그저 그때 찍었던 사진 그 당시의 감정을 적어놓은 글들을 조용히 서랍 안에 보관하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둘 모두 저항하고 있다. 제시카의 부탁에 의해, 에르난은 소음이라는 존재에게 주어진 일시성의 운명을 우회하려 시도한다. 두 번째 에르난 또한 그 자신은 실패한다. 기억저장장치가 아무리 홀로 사물들에 남아있는 진동을 음미하고 보관한다 한들, 그 자신 또한 시간 위에 존재하는 소음에 불과하지 않기에, 발생-잦아듦의 필멸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제시카가 에르난을 만났다. 제시카는 두 번째 에르난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보관하던 사물들의 진동을 느낀다. 무엇보다 제시카는 둘의 우연한 만남 끝에서 에르난의 손을 살포시 잡는다. 에르난의 진동을 느낀다. 진동의 진동. 에르난이 기억저장장치라면 제시카는 안테나다. 제시카는 에르난의 진동에서 에르난의 기억들을 보았다. 또한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제시카와 에르난은 소음의 허무한 굴레를 잠시나마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고, 나는 믿는다. 혹은 모든 소음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거대한 소음이 발생했다. 그 순간 영화에서는 아무 소리도 흐르지 않는다.


 아무런 대사 없이 몇 개의 화면이 보인다. 정글 속 잠들어있던 우주선이 처음의 쾅!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고고학자는 라디오를 듣고 있다. 두 번째 에르난은 앉아서 흐느끼고 있다. 군인은 고속도로에서 부동의 자세로 차들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 빗소리. 시간에 대한 환기이다. 시간은 흐른다. 제시카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가 갈망하던 해답을 얻어냈기에, 더 이상 쿵! 소리를 내던 우주선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시간 위에서 소음으로 존재하는 이상 완전한 불멸성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다. 하지만 소음의 얕은 진동이 다른 소음에게 기억될 때, 소음이 다른 소음과 공명할 때 발생하는 거대한 정적 혹은 화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소음 홀로는 한없이 무력하다. 하지만 여러 개의 소음이 동시에 발생할 때, 그 소리는 재즈세션이 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 진동을 또 다른 무언가가 기억해 줄 거란 희망이 있기에, 소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된다. 6천 년 전 소녀의 진동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느껴지고, 기억저장장치의 진동은 안테나에 의해 느껴졌다. 소음들에게 있어 존재하기란 기다림이다. 진동을 남겨가며 누군가 그 진동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일. 제시카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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