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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Jun 28.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것들

표면상으로 본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내에서 비재현은 다분히 의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비재현은 프레임 단위에서 회화적으로 일어나는 대신, 프레임과 프레임의 연결, 데쿠파주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수용소의 모습은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에 의해 고개를 돌리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 고개를 돌리는 주체는 다름 아닌 회스 중령입니다. 혹은 그의 자택에서 수용소를 바라보지 않는 나머지 모든 인물들입니다. 나치는 절멸이 이루어지는 수용소, 관심구역 내부에서는 어떠한 사진이나 영상의 촬영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공문서에서는 가스실, 소각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면에서 수용소의 모습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은 나치에 의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어진 비재현이라는 환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 속 나치에 의해 비재현으로밖에 다루어지지 않는 수용소는 그 형태로 방치되지 않습니다. 감독은 비재현의 상태, 보이지 않으며 은폐되고 또 더 나아가 잊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언가가 수용소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유출됩니다. 수용소를 가리는 것들을 비집고 넘어옵니다. 강물에는 유골들이 떠내려오고, 아이들은 유대인 사망자의 금니를 가지고 놉니다. 밤이 되면 하늘은 붉은빛으로 빛납니다. 무엇보다도, 영화 전체를 통틀어 소리가 수용소의 존재를 아우성칩니다.


새어 나오는 것들은 분명 힘을 행사합니다. 여기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 속 사례 하나를 끌고 와야겠습니다. 처음 해당 책을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연결지은 인터넷의 글을 읽었을 때,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책 속 호프만 대위라는 실존 인물은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학살에 가담하는 순간마다 심각한 위경련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의 의심스러운 위경련 발작시기는 이상스럽게도 그의 중대가 곤혹스럽거나 위험한 임무가 임박했을 때와 꼭 일치했다” 그러나 호프만 대위는 학살 행위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복통 사실을 숨기고 참아가며 부대에 남습니다. 정신은 나치에 충성했지만, 육체가 끝까지 그것을 거부한 겁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선은 의지적이며 정신적이며 영화가 아우슈비츠의 방향을 피해 프레이밍을 진행하는 것은 곧 정신적으로 그 풍경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나치의 의지를, 수용소의 어떠한 기록도 남겨놓지 않으려는 그 은폐의 시도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되었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완벽한 은폐란 있을 수 없음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보여줍니다.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귀는 모든 방향의 소리를 듣습니다. 담장으로 수용소와 회스의 저택을 분리해 놓아도, 소각로의 불빛에 붉게 물든 하늘은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수용소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들은 정신과 의지의 영역 바깥에서 신체로 흘러들어옵니다. 이따금 귀를 강타하는 총성. 또는, 신체의 형태로 도착합니다. 금니와 유골들. 회스 중령의 정신은 어느 누구보다 나치에 충직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흘러나온 것들이 쌓여감에 따라 점차 반항합니다.


결론적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비재현의 필연적 실패를 말합니다. 현재에 이르러 많은 학자와 비평가들이 참사의 비재현에 어떠한 윤리성이 깃들어 있다 여기더라도, 누구보다 수용소의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형체를 숨기려 들던 것이 나치란 사실은 계속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한 비재현으로의 일관, 그리고 재현 불가능성의 끝없는 재증명이 과연 옳은 일인가. 아니, 그것이 가능한 것이기는 한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이미지들은 일차적으로 비재현을 시도하지만,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은 비재현의 불가능성을 노골적으로 역설합니다. 그러한 불가능성이 공격하고 지적하는 것은 나치이자, 현재의 평단과 관객들입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무언가는 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어 나온 것들은 몸에 천천히 쌓여갈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병에 걸린 것은 회스 중령만이 아닙니다. 영화 초반, 화면은 문득 붉게 물듭니다. 전자음이 고동치는 소리가 두 번 들려옵니다. 회스 중령이 보인 두 번의 구토. 그와 평행선상에 위치한 영화의 각혈. 재현 불가능이라는 무책임함이 병들게 할 것은 결국 영화 이미지의 신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비재현 담론의 자리에 제시하는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요.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고 기이한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영화에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폴란드 소녀의 모습이 두 번 등장합니다. 암흑 속 그녀의 존재는 너무 옅어서, 열화상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촬영하기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영화는 암흑을 뚫고 그녀의 존재와 행위를 강조하고 추적합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나와 노동을 이어나갈 낮에, 그들이 조금이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길 사이사이 사과를 숨겨놓습니다. 어둠 속에서 탐지된 희망. 재현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블랙홀 속에서 보인 일말의 희망. 그럼에도 재현되고, 보여야 하는 것. 영화는 어둠에서 시작해 어둠으로 끝납니다.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빛나는 영화. 영화가 빛나는 모습이 폴란드 소녀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무리일까요. 어쨌거나 이미지는 불가능성을 능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소녀의 희미한 빛남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나긋이 말하는 재현 이미지의 가능성, 참사를 어둠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무릅쓰 빛나야만 하는 이미지의 역량을 향한 일말의 믿음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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