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클라우드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편지 파일을 발견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손편지 쓰는 것도 좋아하는 난 연애할 때 편지를 거의 찍어내듯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날 쓴 편지는 꽤 오래 고민한 편지였고, 생각을 정리하고 신중하게 손으로 옮겨 적은 기억이 난다.
10년 전의 난 B와 약 3년째 연애 중이었고, 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안녕? 편지는 늘 기념일에 맞추어 급하게 썼는데.ㅋㅋㅋ이렇게 생각 많이 하고 쓰는 편지는 처음인 것 같아. 미안(?)
오늘은 특별한 기념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만난 지 약 2년 11개월이 되었고,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너에게 고맙다고 갑자기 말하고 싶어져서 펜을 들었어.
사실 있지. 너를 처음 알게 되고 나서는 감정이 꽤나 들쑥날쑥했어.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너에게 설레면서도 이전의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덜 아물어 걱정되기도 했거든. 시간이 지나고 점점 친해지면서는 내 일상으로 스며드는 네가 낯설면서도 마냥 좋았어.
그치만 너로 인해 나는 더 따뜻해졌어. 너는 내가 무심코 조잘대는 말에도 귀 기울여주고, 반응해주고, 힘들었던 내 하루의 끝에 항상 힘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점점 좋아졌나 봐.
지나치게 가혹했던 2014년은 내 주변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주었어. 내 삶에 소중한 한 축이 사라지고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그때, 내 옆에는 소중한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네가 있었어. 기억나? 작년 12월 아빠의 사고 소식을 듣고 늦은 새벽 나를 위해 기숙사까지 와주었던 날.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때, 네가 없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도 못 하겠어.
장례식장에서 마음이 사무쳐 울지도 못하는 나를 알아봐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어 고마워. 네가 오고 나서야 눈물 흘리는 나를 깨닫고 네가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 그날이 지나고 친척언니가 그러더라고. 화장기 하나없이 퉁퉁 부은 나를네가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이야. 온전한 내 편이 생긴다는 게 이런 걸까 싶어.
너는 내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지만, 나도 종종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해. 우린 언제까지 서로의 현재가 될 수 있을까.
"일어났어", "점심은 초밥이야", "오늘 하루도 너무 고생했어."라며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을 쉼 없이 공유하는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로로 채우게 될까.
그냥 언젠가의 미래에도지금과 똑같아지자. 식당에서 움직이기 싫어서 "목마르다!"만을 말하는 나를 위해 변함없이 물을 가져다줘. 그럼 나도 깨끗한 숟가락을 네 앞에 놓아줄게. 탄 것을 싫어해서 항상 고기를 굽느라 바쁜 너에게 고기 한 점을 맛있게 먹여줄게.
어딘가로 이동할 땐 지금처럼 항상 서로에게 전화를 하자. 그리고 "어디 갈 때만 내가 생각나는 거야? 나 이용한거지!"라며 애정 어린 투닥거림을 하자. 투닥거리다가도 전화해 줘서 고맙다며 항상 서로를 고마워하자.
우리가 서로의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었던 날 기억해? 사실 우린 처음부터 활활 타오르지는 않았고, 천천히 따뜻해졌어. 이전과는 달라서 굉장히 특이했어.
너는 매일 나에게 꽃을 사다 준다던가,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한다던가 소위 말해 호들갑 떨며 사랑을 표현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정말 사랑하고 날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걸 말이야. 네 손길에서, 행동에서, 시선에서 어느 순간 깨달았어. 너에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고, 나에게 너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는 걸.
처음에는 나에 대한 너의 관심 하나하나가 무척 어색했어. 너도 알고 있지? 나는 칭찬받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많이 어색해한다는 걸 말이야. 그런 나에게 너는 끊임없이 사랑을 주었어. 그리고 너 덕분에 나는 더 활짝 피어났고, 많이 웃게 되었지.
B야, 끊임없이 서로의 이해타산을 셈하는 세상 속에서 대가 없이 나를 사랑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너의 따뜻한 품 안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 그리고 나는 아직도 변함없이 그것들을 모조리 느끼고 있어. 단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이야.
앞으로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내 중요한 목표가 하나 있어. 서로에게 해주는 것들이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기. 그리고 이건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는 먼 미래에도 서로에게 여전히 현재일 우리, 그때의 나도 기억할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해서 베풀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미래의 우리가 여전히 알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있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고맙다, 미안하다, 슬프다, 기쁘다는 마음의 말들을 많이 나누자. 매일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항상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자. 춥고 힘든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자. 긴 하루의 끝에서 언제나 서로를 보며 활짝 웃어주자.
나는 오늘도 너를 보며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곤 해. 그리고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도록 앞으로 더 노력할 거야. 처음부터 그랬듯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2014. 12. 16.
우리를 생각하며 사랑스러운A가
물셔틀 해달라는걸 저렇게나 당당하게 표현하다니. 양아치가 따로 없다.
어릴 때의 내가 쓴 편지라 비문도 많이 보이고 창피한 구절도 많지만 저때의 내 마음이 보여서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여전히 B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8년 연애, 4년째 결혼생활 중이지만 나름 편지에쓰인대로 생활 중인 것 같다. 어찌보면 저 편지대로 다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편지에 쓰인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는 연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저때 내 신조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과연 나는 내 생각을 잘 지키며 살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