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읊던 나에게 B가 슬쩍 말한다. 끄덕이는 B가 나에게 붙여준 수많은 애칭 중 하나이다.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큰 리액션을 해가며 듣는 것이 귀엽다며 붙여주었다. 평소 같으면 놀리지 말라고 했겠지만 이날은 슬쩍 고개를 끄덕거렸다.
친구를 만나러 홍대로 가던 길, 둘째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해외여행 간다며?"로 시작한 전화는 무수한 걱정의 향연이 되어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가 떨어지면 어떡하냐, 언니가 물이 안 맞아서 고생하면 어떡하냐, 소매치기당하면 어떡하냐, 힘들어서 형부랑 크게 싸우면 어떡하냐, 거기가 맘에 들어 언니가 이민한다고 하면 어떡하냐 등등. 걱정의 종류가 다양한 것이 웃겨 다 들어주었다.
친구를 만나서는 친구의 고민을 들었다. 이날 우리의 주된 대화 주제는 친구의 직장 내 인간관계였다.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얼마 전 가게를 개업한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축하 화환을 보내줘서 고맙단 말을 하며 자영업의 어려움과 걱정들을 말했다. 손님들이 맛없어하면 어떡하지, 장사가 안되면 어떡하지 등이었다.
세 번째 상담(?)을 하고 나자 나는 내 대답에 패턴이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진심을 담은 경청이 전제 조건이다.
보통 대부분의 고민은 추측과 부정적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한 것 같은데."에서 파생되는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 간다.
관찰을 좋아하는 나는 그만큼 상대의 눈치도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추측 기반의 고민도 굉장히많이 한다. 여기에 부정적 생각이 더해지면 하나의 고민이 탄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 표정이 안 좋으시네. 나 실수했나?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가?'와 같은 흐름이다.
늘 사서 고민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려고도 해 봤고, 남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도 해 봤다. 떠오르는 생각을 제어하긴 어려웠고, 남을 잘 신경 쓰는 내 성향을 고치긴 어려웠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노력하다가 찾은 방법 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이 "사실 관계 생각하기"였다.
방금 그럴싸하게 말을 만들어 붙였지만 간단하다. 눈덩이 같이 고민이 커질 때마다, 부정적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그 증거가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다.'증거 있어?'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증거는 없다.
증거가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눈덩이 같이 커졌던 고민은 한순간에 작아진다. 나의 고민이 실체 없음을 깨닫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 맞아, 증거 없지.
사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걱정을 분석하는 기본 기술 중 1번이 "사실을 파악하라."이다. 세상 걱정의 절반은 결정을 내리는 데 기초가 될 만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어렴풋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권위 있으신 분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니. 그런데 정말 동의하는 구절이다. 증거가 있는 다른 고민들도 쌓이고 쌓였는데 사실이 아닌 것들까지 미리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상담의 날에 나는 둘째 동생과 친구에게는 "증거 있어?"라고 대답했고 지인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모두의 반응은 맞아 맞아였고, 친구는 내가 자신의 피톤치드라며 기분이 상쾌해졌다며 극찬을 해 주었다. 뿌듯.
인생은 짧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만 하기에도 모자라다. 그렇기에 내 소중한 사람들은 "증거 있어?"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