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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Mar 12. 2024

당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있나요-'일인칭 단수'

[서평] 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처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던 것은 대학 시절 동경했던 K 선배 때문이었다. 나는 언니를 정말 좋아했다. 차분하게 말하는 목소리나, 따뜻한 눈빛 같은 것이 언니를 사랑하게끔 만들었다(당연히 인간적으로이다). 내가 졸졸 쫓아다녀서였는지 언니도 나를 꽤나 예뻐했고,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또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강아지보단 고양이를 좋아했고,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소맥보다는 와인을 좋아했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좋아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좋아하는 것을 하나하나 말해줄 때 빛나던 언니의 눈빛을 그때의 나는 동경했던 것 같다.


반대로 언니는 나를 흥미로워했다. 모든 것을 다 좋다고 하고, 모든 것을 다 괜찮다고 하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언니는 취향은 만들어가는 거라면서 나를 데리고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시켜주었다. 우습게도 언니는 내가 뭔갈 싫어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이름도 기억 안나는 지루한 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을 때나, 언니가 추천해 준 커피를 먹고 얼굴을 찡그릴 때, 혹은 내 취향이 아닌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고 할 때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언니는 눈에 띄게 즐거워했다. 이제 A도 취향이 생긴 거야!



언니의 여러 취향 중 하나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언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이었고, 언니의 광팬인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무라카미 하루키를 접한 것은 지금은 노르웨이 숲이라고 불리는 상실의 시대였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 권만 읽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뒤로 꽤 많은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변의 카프카도 읽었고 여자 없는 남자들도 읽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 하나 적립되었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인칭 단수』는 정말 오랜만에 집은 하루키의 책이었다. 신간이 나오고, 베스트셀러로 꽤 오래 서점에 머물러 있더라도 이미 내 취향이 아니어진 그는 내 눈을 잡아끌진 못했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 공항에서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면서 하루키의 이름을 보았고, K 언니가 떠올라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했다. 여행지의 즐거운 기억들이 하루키도 내 취향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책은 총 일곱 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와 일회성 관계를 맺고, 그 이후에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그중 가장 기억에 남고 재미있었던 것은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이라는 이야기였다.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하던 주인공은 허름한 료칸에 들어간다. 여유롭게 온천을 즐기고 있을 때 원숭이 직원이 나타나 말을 건다. "물 상태는 어떻습니까?" 주인공은 어리둥절해한다. 그렇게 말문을 튼 원숭이와 주인공은 주인공의 방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원숭이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저명한 교수의 집에서 자란 원숭이는 이미 인간 사회에 길들여져 원숭이 무리에 적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장 문제인 것은 바로 이성 관계였다. 원숭이는 암컷 원숭이가 아닌 인간 여성에게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육체이든, 정신이든 원숭이의 마음을 풀 길이 없기에 원숭이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건 바로 이름을 훔치는 것. 원숭이는 그 사람의 이름이 적힌 신분증, 운전면허증 등을 훔쳐 염력으로 상대의 이름을 의식 속으로 거둬들인다. 그렇게 상대는 원숭이의 일부가 되고 원숭이의 마음은 나름 충족이 된다. 이름이 훔쳐진 상대에게는 가끔 가다 자신의 이름을 까먹는 정도의 흔적만 남을 뿐이다.


주인공의 기이한 경험은 여행 이후 점차 잊히고 있었다. 그러다 비즈니스로 만난 편집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때의 원숭이를 다시 기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하루키다운 굉장히 불친절한 마무리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마무리이기도 하다. 사실 원숭이가 때를 밀어주는 충격적 경험이 아닐지라도 인생을 살며 여러 일을 겪는다. 우리네 인생은 소설이 아니기에 관찰자 시점에서 모든 정황을 수는 없다. 어떤 일이든 일인칭 시점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처 풀리지 않는 일들도 그저 자체로 하나의 기억이 뿐이다. 다만 그때 일이 맞았을까,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을 계속 곱씹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같은 일은 겪은 사람들일지라도 그 일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행복한 기억이 누군가에겐 가장 불행한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다만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나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행복해 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책의 뒷장에서도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라고 강조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듯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내 기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나도 좋은 기억의 조각이 되길 바란다.





그렇지만 하루키는 여전했다. 그를 정의 내릴 만큼 모든 책을 읽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은 거의 하루키 월드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와 일회성 잠자리를 가지는 삼십 대 남자, 굳이 필요할까 싶은 성적인 장면 묘사, 재즈, 클래식, 스니커즈를 신는 깔끔한 주인공. 그렇다 보니 책을 다 읽고 느끼는 감정도 비슷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하지만, 20대 초반에 찡그리며 읽었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왜인지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많이 있었고, 심지어 위에 쓴 것처럼 무엇인가를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입덕 부정기인가. K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아마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48쪽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147쪽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저는 이렇게 이 마음에 한때 연모했던 아름다운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 나름의 소소한 연료 삼아, 추운 밤이면 근근이 몸을 답히면서,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볼 생각입니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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