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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씨 Jul 04. 2023

한민족의 역사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한민족의 역사책에 대한 나의 생각

<친절한 한국사> 심용환

‘나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역사 공부‘

-이러한 부제목에 대한 나의 생각

역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대부분의 현실은 현 사회체제와는 동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사회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역사의 부정적인 면만 보일 수도 있다. 또한 현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 이념을 갖고 있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주요 쟁점

1, 봉건제 국가로써의 조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세종대왕 등 조선 국왕들의 민생을 향한 태도의 본질.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 기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조선의 시민의식.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삶.

-결론

2, 이념에 따른 조선, 대한민국

-반공주의(영웅사관 등도, 5.18=국민화합추진위원회)

-영웅사관

-유교, 성리학

-결론

전체 결론

—1—

-세종대왕 등 조선 국왕들의 민생을 향한 태도의 본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의 왕 세종은 성군으로써 존경받는 인물이며 현대에 와서까지도 그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친절한 한국사>를 통해 이러한 관념을 깨부수고자 한다.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아래 사회적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조선은 봉건제를 통한 왕을 섬기는 국가가. 즉, 이데올로기적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민생정책 등은 민주주의, 민본주의도 아닌 봉건주의적 국가를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통치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었다고 본다. 물론 한민족 뭉치기를 위한 민족주의의 우상화에 따라 세종대왕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봉건시대임에도 백성을 위한 각종 정책을 펼친 성군이라고 주장한다.  세종대왕이 봉건제 안에서의 성군이었고 그의 업적은 실제로 당시 사회에 여러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고종과 같은 인물도 개화기에 어찌 보면 민중에 대한 억압을 세종대왕 더 완화시켰지만 이것의 이면에는 군주제를 유지를 목표로 한 사회 권력층으로써의 입장이 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왕들이 봉건제 안에서 다른 왕과는 차별화된 정책을 펼쳤다는 것은 인정하되 이것을 지금 현재 역사에 바로 대입하기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조선의 시민의식

어찌 보면 이 소재목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조선시대에서 시민의식이라니 ‘. 물론 나도 이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봉건제 국가들은 나라의 혼란기에 민중의 봉기 등에 의해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로 거듭난다. 따라서 나는 조선의 혼란기를 담고 있는 영화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민중의 시민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표적은 영화로는 명량 등이 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자신을 희생해 가며 국가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에서 나는 의문을 가진다. 당시 조선에서 일반 군인이라고 한다면 이는 직업군인이라기보다는 일반 백성들이 농번기가 끝난 후 참여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계급주의 사회에서 최하층이라고 불리는 천민보다는 한 단계 높지만 그들도 결국 지배계층에게는 천민과 같은 단계에 있는 이들이다. 당시 조선의 국왕과 대부분의 신하들이 도망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맹목적인 국가에 대한 헌신은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이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이러한 국가적 혼란기 이후 봉건제를 버리고 혁명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장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이것보다는 민중들의 의병활동이었다. 물론 의병의 경우 대부분 지휘관이 양반 등 사회적 명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주로 맡았지만 대부분의 인원이 일반 백성이었고 이들의 수가 적지도 않았기에 이들 세력이 반란, 혁명군으로 발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 속에 끝내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작게나마 유추해 보자면 이는 유교국가로써 조선이 갖는 유교적 문화(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덕으로 여기는 전통적 유교사회)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민중들의 삶에 녹아들었고 이는 왕이 백성을 버린 상황에서 하나의 마지막 끈으로 백성들의 의병 활동과 같은 집단행동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삶

조선의 근간은 유교, 성리학에서 왔으며 조선의 마지막도 유교로 끝난다. 더욱이 이러한 유교 문화는 약하게나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유교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듯이 조선의 유교는 가부장적 문화를 최고의 덕치로 여기며 이를 통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조선에 살고 있던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도 모른 체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남편을 모시는 것을 덕으로 알며 살아왔다. 따라서 외도와 같은 것도 유교윤리에서 보면 남녀 그 누구도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남성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되었고 여성의 경우에는 큰 처벌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차별받았다. 또한 결혼 후의 삶에 대해서도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개인적인 활동아 사라지고 집에 머물며 남편을 보필하는 일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여성은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았기보다는 재산, 사회적 인정과 같은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와 별개로 일부학자들은 조선시대의 여성보다 고려시대의 여성의 권리가 더 높았다는 것을 예시로 들며 조선여성들의 삶의 고난함을 더 강조시키고 고려라는 나라의 체제의 융통성을 보여줄라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어떤 나라든 중세의 여성의 권리는 낮았고 이는 고려로 넘어가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독립운동을 통한 여성들의 활동이 늘어나고 그 역할도 중요해졌다.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면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남성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러한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단순히 조국의 해방을 위한 것도 있지만 하나의 혁명으로써 자신들의 권리 향상을 위한 운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외국 선교사에 의한 여성 개몽활동도 활발하게 벌어졌고 이에 대한 대표적 예시로 보구여관 등의 교육기관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그들은 간호사로써 사회적인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회든 이러한 예시들이 쌓이다 보면 재판에서의 선례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것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선례를 쌓는 일련의 과정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론

-민족주의는 주로 사회가 불안정한 국가에서 국가의 본질적 문제인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이를 외부, 다른 이슈로 돌리기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지만 현재 터키, 과거의 나치 독일과 같이 국가적 혼란을 민족적 우월성을 내세워 해결한 사례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현 사회를 살아가는데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대입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역사 간에 거리를 두고 과거의 역사에서는 봉건주의를 전제로하여 대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전통적 공동체주의 중 하나인 품앗이, 장터와 같은 문화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문화들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2—

-반공주의

반공주의라 함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6.25 전쟁, 군부 독재 정권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반공주의에 따라 정치적 흐름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표적으로 북한과 남한 사이의 무력 충돌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으며 자칭 보수는 이를 국민들의 안보불안을 만들어내는데 활용했고 이는 장기적으로 보아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물론 대한민국이 이러한 사회주의에 처음부터 부정적 시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종 당시에는 국가의 체제 자체가 봉건제였기에 계급투쟁을 통해 혁명을 완성하는 사회주의는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자체도 민중의 평등을 요구했기에 하나의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고 실제 사회체제의 변화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기에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렇듯 혹독한 봉건제 속에 살아왔던 일반 대중에게는 이렇게 완벽하지만 평등한 이데올로기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로 넘어오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활용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둔 싸움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미군정이 들어오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는 당시 남한이 사회주의화가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던 미군의 입장을 잘 보여주며 해방 이후 공장을 스스로 관리하던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위원회도 이 과정에서 대부분 해체되거나 탄압받았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점점 반공주의라는 사회적 이념에 너무나도 큰 의미를 두는 사회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현재를 살아가며 역사를 교육받는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이는 역사교과서에 특히 잘 드러나는데, 나의 경우 지금껏 12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역사를 교육받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조선,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운동 및 이념에 대한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보도연맹 등의 사건도 배우지 않거나 지나가는 주제 중 하나로만 존재할뿐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의 과정이 그렇듯 대한민국도 노비제도에서 지금의 노동자로까지 많이 발전한 모습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를 위한 커먼즈와 같은 개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이러한 반공주의도 서서히 사라져야 할 역사의 한 면이 아닐까 생각하며 독립운동가들이 그 시대를 살며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것과 같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이러한 사회의 한 면을 변화시켜 나간다면 사회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웅사관

영웅사관은 우리나라의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예시로 들 수 있으며 과거의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어 대중의 민족의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든다. 책에도 나와있듯이 세종대왕은 왕으로써 훌륭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봉건제라는 사회체제 안에서만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동상은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서울의 정중앙에 상징성을 갖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것이 개인적인 생각으로 끝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민중에 의한 혁명, 변화가 아닌 외부세력의 개입에 의해 체제가 개입된 국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상징물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물론 해방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존재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군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사회체제의 변화에 있어 일반 대중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정책과 법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대중에 의한 혁명이 일어났기에 국가의 정책 및 법, 교육에 있어서도 노동의 중요성과 그들의 권리가 잘 반영돼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것이 아니기에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 노동자로써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을밀대 체공녀 강주룡과 같은 사례도 역사 교육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세종대왕과 같은 인물들이 봉건제의 대표적 인물일지라도 이러한 역사 기억하기 활동들이 쌓여간다면 나중에는 안중근, 김구, 유관순, 전태일과 같은 인물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동상으로 제작되어 광화문과 같은 곳에 전시된다면 일반 대중도 우리 역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외부의 개입에 의한 역사관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기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주체의식을 갖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 성리학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불교가 아닌 유교, 성리학으로 바꾸었다. 이는 고려라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조선을 세우기 위해 권력층이 선택한 것으로 이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대중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는 유교의 성질이 효를 중요시하며 왕을 어버이로 생각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더라도 신하들은 신하 된 도리로써 왕을 지키고 민중도 어느 정도 이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도 유교를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이용하는 것도 있단다. 이는 대표적으로 남녀관계가 있으며 남성은 외도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큰 압박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이는 중대한 범죄로써 처벌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또한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다시 재혼하지 못했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했다. 즉, 법이 있음에도 사회의 모든 정의 및 범죄에 대한 판단을 기본적으로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러한 유교 문화는 조선시대에서 끝나지 않고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로까지 이어져서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물론 요즘은 이러한 문화가 ’ 꼰대‘ 등의 용어로 치부하며 무시하려는 성향을 보이지만 아직까지도 사회 이슈에 대한 대중의 시선 및 판단에는 유교적 문화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론

-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우리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가 발전하고 정체되었었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부정적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적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교적 사상의 불평등함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갖고 역사를 바라보되 유교 문화를 통해 발전한 공동체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은 받아들여 앞으로의 사회 발전을 위한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전체결론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즉, 관점에 우리는 과거를 통해 공부하되 현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사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현재를 사는 나의 가치관 등을 반영한 나만의 주관적이지만 팩트에 바탕을 둔 관점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미래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역사라는 학문의 존재이유인 것 같다.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넌, 너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해.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출처] 죽은 시인의 사회 / N.H. 클라인바움, 카르페디엠 명대사 줄거리|작성자 방구석독서인

-친절한 한국사를 읽은 후 가장 마음에 와닿은 문장이다. 해당 문장을 통해 단순히 지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나의 주관을 갖되 이것이 역사적 팩트에 근거를 둔, 즉 거짓이 아니어야 된다는 확고한 가치관이 생긴 것 같다. 이것이 역사라는 주제에 대한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후기

아직은 글의 구조에서도 미숙하고 같은 내용도 반복되는 느낌이지만 이러한 글을 써보는 시도들이 쌓여 더 나은 글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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