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느끼는 맑음. 포근함. 따스함이었다. 집밖을 나서자마자 불어오는 온기. 11월 여느 날 같지 않았던 오늘. 내겐 봄 같았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봄 그 특유의 언어. 공기. 말들 같았다. 봄이 오려면 겨울이 지나야 하는데, 오늘 날씨가 봄처럼 느껴졌다니. 달콤한 브리즈는 내게 봄을 그리워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년 봄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나는 봄에게서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걸까?
분명한 건, 나란 사람은 겨울보단 봄, 여름... 따스한 계절에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 활동적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겨울이면 자칫 이토록 게을러지기 십상인 몸과 마음을 지녔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누워 있기를 좋아하고 늘어지면 한없이 늘어지고야 마는, 게으름, 나약함, 취약함이 있다. 그래서 육체가 쓰러질 때면, 정신이 쓰러질 때면 어김없이 눕는다. 모든 걸 다 잊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든 걸 리셋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딱 그 마음으로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러곤 일순간 잠들고 만다.
일어나면 환생일까.싶을 만큼. 꿈꾼 것일까.싶을 만큼 그렇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접하고 벌떡 일어나 다시 일상을 회복하곤 한다.
낮잠을 한 두 시간 자고선 일어나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언제 잠든 것일까. 묻지도 따지고 할 것 없이 무튼 이토록 잘 자고 일어났구나!. 회복된 느낌인 걸.! 일어나보자구!. 잠 하나로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일이 이토록 쉬운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와 이승우 작가의 책을 덥석 물었다. 실은 이 책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 적확한데, 본격적으로 읽기 전, 걸어오는 길에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그리고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 첫 장을 읽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처럼,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릴 것 같은, 타는 몰입감을 경험할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이들이 내게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나는 또 어떤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지. 어떤 영혼과 영혼과의 만남일지. 그렇게 기대할 수 있었다.
하루에 단 몇 줄이라도, 단 몇 장이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어떤 거창한 철학내지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책이 주는 위로에 매료된지 꽤 되었고 영혼과 영혼의 대화에 흠뻑 빠지기를 주저 않기 때문이다. 습관이라기 보다 내겐 책이란, 어떤 정서에 가깝다. 분위기. 아우라. 카리스마. 그 자체.
집 앞 도서관은 주말 오후 6시까지만 하는데, 마감 10분 전에서야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책을 읽고 나면 어쩜 이토록 삶의 의지가 현현되는 걸까? 이 세상 모든 책 속엔 마법 가루라도 뿌려져 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해서겠지. 검고 짙은 활자를 읽어내려가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지구별 여행자.라는 걸 대체적으로 실감한다.
그 순간 날 옥죄던 불안과 두려움, 우울도 사라져버린다. 이만한 마법이 없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오늘이 몇 요일인지 까맣게 잊는 날. 낮잠을 자고 나서일까. 나는 도서관에서 빠져 나오고 나서야 "오늘 토요일이네!. 일요일인 줄 착각했네. 내일이 월요인줄..."했다.
정신줄을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도무지 왜 착각했을지.모르겠는 상황이 있다. 오늘이 토요일인 걸 알아차리자 내심 안도했다.
여느 토요일 오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느 것 하나 모나지 않은, 막 즐겁지도 막 신나지도 막 슬프지도 막 우울하지도 않은 정말이지 일직선 지평선 같았던 하루. 이런 날들이 모여 내 삶이 되는 거겠지. 내 안의 막연한 것들도 실은 내 안의 욕심 때문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이토록 말랑말랑한 순간들이 내 앞에 펼쳐지는데 시시로 우울감과 절망감에 빠지길 반복하는 내게서 나는 나의 모순을 알아차린다.
목화토금수. 오행. 불현듯 떠오른 직관적인 것이 제목이 됐다. 생뚱맞지만 그 생뚱함 속에서 또 다른 사색과 사유의 꽃이 피어난다. 글쓰기가 실은 어렵지 않은 이유는, 내게 삶이 된 이유는 이토록 시시한데, 절로 이는 사색과 사유와 감정을, 느낌의 서사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내게 감각되어지는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을 언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서다.
순간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느껴진 것들을 언어로 표현할 때, 실은 나의 내적 경험과 체험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 것에 대한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조각조각 그 틈을 맞춰나가는 일은 내게 주어진 숙명처럼 이토록 구구절절하고 절실한 것이 되었다.
내 안에 글쓰기 요정.이 사는 건가. 글쓰기 괴물.이 사는 건가 싶을만큼. 우당탕탕 키보드 소리와 함께 문장들에 마침표를 찍고나면, 그 순간 직감한다. "과연 나인가." 꼭 내가 아닌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쓴 것 같은 기분이 나를 더욱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한다.
목화토금수.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자연의 법칙을 생각하면 이토록 짙고 농밀한 순수일 수가 없다. 마흔 앞에 다가와서야 나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달까. 여전히 파도에 휩쓸렸다 생존했다 또 다시 급류에 휩쓸려가곤 하지만. 이 또한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생의 의지도 있다.
"무엇이 두렵다니. 무엇이 날 가로막는다니. 너는 알고 있지..."
위풍당당하게. 나답게. 그러나 초라하지 않게.
시시로 달라지는 것들에 초연하기.
내면에 침잠할 수록, 고독할수록 나 자신을 알게 된다.
그 길이 험난할지라도 지독하게 지리멸렬하게 외로운 것일지라도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