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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lievibes Nov 08. 2024

글쓰기는 내적 투쟁의 소산

<데미안>을 다시 꺼내들었다. 내가 꼭 기억하는 문장들이 알알이 박힌 페이지만 다시 읽어내려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이런 방식으로 나는 시시로 들여다본다. 나는 정말이지 그것을 살아보려 하는가? 왜 주저하고 있는가? 정말이지 그것을 살아볼텐가? 그것을 살아보려고 단 한 번이라도 노력한 적 있던가?... 혼란스러울만치 갖은 질문들이 나에게로 쏟아진다. 그 질문은 내게서 나와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차가운 계절 아침 산책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의지를 잃는 순간 여명을 볼 순간을 놓치고 생의 기운을 받을 순간을 놓친다. 나가기가 어렵지 집밖을 나오면 금세 생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솟아난다. 혈관들도 덩달아 기지개를 켠다.  


하.하고 불면 입김이 나온다. 그 입김이, 차가운 바람의 입맞춤이 내 걸음을 응원한다. 그저 날 살게 한다. 날 일으킨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밤산책보다 아침산책이 확실히 생과 사, 삶과 죽음이 하나란 걸 분명하게, 실감하게 한다.


산책 길에 들어선 나무와 풀, 바람, 공기, 하늘, 해... 자연은 늘 그렇듯 말이 없다. 말이 없어서,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라서. 나도 자연과 꼭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실은 자연과 내가 하나란 걸 알면서도. 늘 그렇게 나는 자연을 닮고 싶어한다.


삶의 의미를 찾거나, 생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것보단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 내겐 더욱 유익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나는 분명 죽는다.는 문장이 하루에도 여러번 내게 온다. 그것은 만트라나 자기 주문 같은 것은 아니어서, 그러나 절로 일으켜지는 것.이 됐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의도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죽음이 떠오르는 삶이란!.  


날 가두는, 옥죄는 수많은 생각들, 그리고 그 생각은 내.가 아니란 걸.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이었구나. 결국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구나, 자신이 그 여정에 올라와 있구나, 실은 늘 그 위에 있었단 걸, 어쩌면 이 지구별에 온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그렇게 알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써온 내 글을 몇 개씩 쭈욱 읽어내려갈 때가 있다. 그땐 내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참 이때였구나.싶어 자기 만의 우수에 젖기도... 내 글이 결국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단 걸, 내 안의 것에 불을 지피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 투쟁이었단 걸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때론 어떤 글에서는 내 안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어떻게서든 살려보겠다는 당시의 내가 떠올라 눈물이 핑 돌때가 있다. 그럴수록 고독의 시간을 잘 견디고 살아온 내 자신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다.


자기 글을 쓴다는 건, 실은 어떤 고백이 아니라 실은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글은, 어떤 목적의식이나 의미 없이도 생명력이 있다. 나의 경우 방황하는 내 마음을, 자꾸만 제 집을 나가는 내 마음을, 내.가 아닌 생각이 자꾸 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총제적 난국을, 지독한 내적 외로움과 고독, 삶에서 오는 것들에서 이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글을 통해 나는 어떻게서든 살아보려고 했다. 글쓰는 순간 자유로워짐을. 어떤 기교가 필요없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안에서 조각조각으로 쉼없이 난사되는 언어들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글을 통해 나 자신과 닿는 길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었다.


어떤 문장들을 만날땐,  자신이 기특하기도 했다. 대학시절엔 언론사 시험 합격을 목표로 논술과 작문을 썼는데, 누구도 글쓰는 법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글쓰기란 과연 배우는 것일까. 배워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호기롭던 시절이기도 했고 나는 그렇게 도서관에 앉아 늦은밤까지 혼자 글쓰기를 하고 집에 갔다.


대학교 1학년이던 때, 정치외교학 대학원 수업을 1년을 청강했는데 그때 타학교 교수님께서 내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물리가 트이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기억이 선명한데, 글쓰기도 그랬다.


시사상식은 내가 공부하면 되는 것인데, 암기하면 되는 것인데, 글쓰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때 깨닫게 됐다. 아, 정말 하다보면 되는구나. 물리가 트이는구나. 그 해, 어느 순간 지원하는 언론사마다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다른 것보다 글쓰기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았구나.싶은 것들이 있었다. 데스크들의 실무면접에서나, 최종면접에선 "여기까지 온 친구들 모두 실력은 다 똑같다고. 최종합격은 결국 우리 회사와 맞는 것인지의 차이라고." 했다.


갑자기 이 순간에 그때 그 시절, 그토록 열정 넘쳤던 호기롭던 내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땐 참 그랬는데,싶으면서도 그렇게 밝은 초아 어디갔니... 다시 돌아올 순 없겠니? 웃고 만다.


아주 가끔 그때 내 운명이 방송사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그때 최종합격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할 때가 있다. 나는 과연 잘 해냈을까?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고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나는 그때도 그랬고 여전히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 실은 나는 본래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만이 살아있다.


나의 내적 투쟁은, 내면의 투쟁은 운명이었다. 필연이었다. 나의 길이었다.

분명한 변화가 필요한 이 시점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구절을 몇 십번 곱씹은 건 정말이지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그것.이 피어오르는 기분이다.

내 안의 그것.이 여지껏 날 가둔 두려움과 불안보다 그 세기가, 그 세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걸 목격하고 있다.


데미안도, 피스토리우스도, 에바 부인도... 싱클레어에게 그들이 그토록 알게 해주고 싶었던 그것.!

싱클레어가 결국 알게 되었던 것처럼.

두려워도 불안해도 나는 내안의 그것.을 이제는 기어코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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