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홀로 방센 숲(Bois de Vincennes)을 한참을 걸었다. 산책이었고 사색의 시간이었다. 자연과 하나되어 걸으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절로 컨템플레이션, 명상이 되는 신비로움이 있다.
겨울 햇살 아래 방센숲 호수 물결은 에머랄드처럼 반짝였고 백조들이 그 위에서 춤추었다. 마치 꿈꾼 듯했다. 평일 오후 3시쯤이었는데 숲은 한산했고 내가 걷는 길엔 러닝하는 몇몇 사람들만 있을 뿐 조용했다. 고요했다.
차가운 공기를 쐬니 그때 그 길이, 그 풍경이 떠올랐다. 뇌 속 어딘가에 분명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야물게 저장돼 있는 기억 저장소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생각은 내가 아니고 생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절로 일으켜지는 무작위한 기억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걸 보면 새삼 신비스럽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곧장 그 길로 구글앱을 켜곤 방센성(Chateau de Vincennes)에 갔다. 중세시대 역대 왕들이 살았고 루이11세 때에는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했다는데 서양사에 관심많던 나에겐 흥미로운 곳이었다. 당시 파리 시내 그리고 프랑스 일부 전역 박물관, 미술관을 줄서지 않고 횟수제한 없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카드가 있었는데 혹시나 하고선 방센성 매표소 입구에 들어가 카드를 보여줬더니 무료라고 했다. 그 시절 그토록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루브르와 오르세의 입장료가 얼마인지 실은 지금도 모른다.
파리의 겨울은 건조하다. 건조한데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은 부들부들 떨만큼 춥다. 그날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매표소를 제외하곤 인적 하나 없었다. 스산했지만, 고스트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싶었지만 무튼 용감하게 오른쪽에 장엄하게 있는 방센성으로 들어갔다. 왕들이 살았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화려함은 없고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인적하나 없이 홀로 방센성에 오르는 길, 서양사 중 중세사를 흥미로워하는데 정말이지 여긴 중세시대 어느 마을이 아닐까.착각할만큼 꼭 그러했다. 마치 중세에 와있는 것 같은 새로운 경험에 즐겁고 재밌고 설레면서도 무언가 무서움이 공존했던 순간이었다. 순간순간의 공포감은 무엇이었을까. 그 곳에서라면 별의별 상상을 하지 않고는 계단을 오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홀로 방센성 안에 갇힌 듯한 상상. 또 이런 경험을 살면서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내게 온 이 경험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방센성에 오르니, 내 눈 앞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맞은 편 웅장한 성당 하나가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바람이었지만 외려 그 바람에 그 순간을 더욱 히스토리컬하게, 웅장하게, 비장하게 했다.
순간의 공포는 돌연 아름다움과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황홀경이었다. 살면서 하게 되는 owe(경외감)의 경험들, 순간들은 내게 이토록 소중하다. 경외감의 순간들은 지속적이지 않아도 된다. 순간순간이고 찰나가 대부분이다.
"그러고보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사실이 그러하다. 무얼 많이 가져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겐 awe의 순간들이 많았고 여전히 시시로 수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잦을수록 행복감의 빈도도 잦다. 비례한다. 내게 awe의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다. 일순간 내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워보이는 마법이다.
자연과 함께 일 때, 더욱 쉽게 느낄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볼 때, 밤하늘의 달과 눈맞춤할 때, 바다에 갈 때, 오름에 오를 때, 산에 오를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B급 감성 유머의 것들로 배꼽 빠지도록 자지러지게 웃을 때... 실은 내가 경험하는 순간순간 속에 늘 살아 숨쉬고 있다.
8월 한낮 땡볕아래 고흐가 살던 오베흐 쉬오아즈에 찾아가 그가 걸었을 밀밭을 걸었을 때도 황홀경을 느꼈다. 알아차림의 순간들. 알아차림 그리고 경외감, 황홀경, 감탄, 감동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awe하기 위해.라는 대답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살아 보니ㅡ 인생이란 삶이란 내가 이렇게 살겠다고 또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삶은 살아지는 것이란 걸. 살다가 힘이 들면, 울적해지면 슬퍼지려 할 때, 나는 awe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땐, 그 순간들에 대한 타는 그리움이라기보다 "그때 참 그랬지. 그때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어. 너무 황홀했어. 너무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어. 이런 경험이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하는 마음부자의 부심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각자 자신 만의, 자기 만의 추억들이 가득할 것이다. 가슴 속 깊이 자기 만이 간직하고 싶은 추억들을 이따금씩 소환해 미소 지을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부쩍 추억은 방울방울해지는데 실은 이 상황이 나는 반갑다. 돌이켜보니 추억은 방울방울.의 순간들은 내겐 온통 awe의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어디에도 없는 지나간 나, 지나간 장소, 지나간 연인들, 지나간 시절인연들, 지나간 관계들에 미련은 없다. 집착은 더더욱 없다. 내가 할 일은 기꺼이 놓아주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만 있을 뿐. 지금 이 순간의 것들에 집중하면 실은 두렵지 않은 것이다.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몇 달 새,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동굴의 입구를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나를 생각한다. "왜 두려운 것 같아?" 실은 나는 잘 알고 있다. 또 다시 길을 잃을 수는 있다. 또 다시 방황할 수는 있다. 또 다시 헤맬수는 있다. 그치만 이유를 안다면 움직여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집착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 해, 파리 페흐 라셰즈 묘지에 갔었다. 쇼팽과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보기 위해서였다. 묘지가 묘지같지 않고 공원 같았다. 수많은 묘지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실은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눈떠있고 그들은 눈을 감았을 뿐, 나는 살아있고 그들은 잠들어 있을 뿐, 죽음은 결코 엄숙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었다. 묘지들에 둘러싸여 하염없이 걷는 순간도 내겐 분명 경외감의 순간이었다.
글쓰는 순간에도 경외감을 느낀다. 나 자신의 글에 대한 경외감이 아니라 나 자신에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마주할 때. 타는 듯한 경외감이 있다. 내가 글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사는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awe의 순간들이다. 경험들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이 많아지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내 안에서 살아 그 무엇도 날 파괴할 수 없도록 하는 그것. 언제든 내게로 오라. 두팔 벌려 열렬히 안아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