固定觀念(고정관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싱클레어가 방황에 빠져있을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中-
어렸을때부터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교육 받는다. 사춘기 시절 반항심이 가득했던 나는 더더욱 착해지기 싫었다. 누구 맘대로 인사잘하고 잠 빨리자는게 착한 일인가? 왜 게임하는 것을 나쁜 일라고 하는가? 등의 생각등을 하고 살았다.
사춘기가 지날 무렵 <데미안>을 읽고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통제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 그게 옳은 삶이구나”
“통제 속의 게임과 휴식 속의 늦잠은 아무 문제가 안되는구나“
”부모님의 잔소리는 먼저 이를 느낀 사람으로서의 충고였구나“
오늘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청년 시절 이야기“라는 부제에 맞게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담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왜 소설의 제목은 “데미안”일까? 주인공인 ”싱클레어“라고 적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해답은 <데미안>을 관통하는 주제에 있다.
데미안이 바로 헤르만 해세(에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말하는 주제이자, 이 글의 제목 ”선과 악 그 사이의 선은 누가 긋는가? “를 정확히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선(善)이라는 종교적 틀 안에서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보고 어떤 말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끼게 된다. 이후 선(善)과 악(惡)을 드나들던 싱클레어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통해 데미안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결국 단순히 선과 악을 좋고 나쁨으로 나눈 것이 아닌 스스로가 선(善)과 악(惡)을 통합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제야 데미안과 같이 ”진정“스스로 행동할 수 있게 되고 소설은 마무리된다.
우리의 삶은 아직도 수동적인 선(善)과 악(惡)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기준들이 타당할 수도 있지만 기준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 없이는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생각하기보다는 받아들이기를 선택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어떤 것이 착한 것이라는 여론이 생기면 그 일은 착한 일, 좋은 일이 되고 그 반대의 행동은 금기시된다.
일례로 초등학교 점심시간의 식판검사를 생각할 수 있다. 받은 걸 다 먹지 못한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먹는 게 장기적으로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식물을 줄여야 한다”는대의명분 아래서 “다 먹지 못한 것”은 나쁜 일이 된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을 대의 속에서 오랜 시간 묵인해 왔고 논의가 일어난 최근 들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민감할 수 있는 질문과 이야기들이 선(善)과 악(惡)을 논하며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령 남녀갈등이라던지, 세대 간 갈등, 정치적 논쟁등과 같은 것 말이다. 사람에 따라 주제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모든 형식의 논쟁과 생각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 이전에 다시 행해지는 ”가치판단“이라는 행위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점(傍點)을 결과가 아닌 행위에 찍어야 한다.
고정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는 것.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무엇이든지 상대적이라는 것.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선(善)과 악(惡)을 의심하며 둘을 통합하였다. 즉 선(善)과 악(惡)의 결과보다는 그 둘을 구별하는 과정을 품었다. 그 결과 세계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선(善)과 악(惡)을 함께 품어 스스로의 선(線)을 그으며 살아갔다.
이처럼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기준을 세우고 다시 생각하며살아가야 한다. 니체를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번혁하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불렀으며 초인을 인간을 넘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즉 데미안이 말했던
”알“은 ”선(善)과 악(惡)의 결과“
“알을 파괴하는 행위”는 ”선(善)과 악(惡)을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
“신“은 “진정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위에 적힌 <데미안> 속 구절을 해석해 보면 이렇게 된다.
“인간은 선악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선악은 인간의 결과이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선악의 결과에 얽매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
-데미안-
선(善)과 악(惡)의 선(線)은 누군가 그어주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각과 선(線)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
인간의 가치는 결과에 있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과정에 있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