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환의 발병은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 그리고 습관적 요소가 적절하게 조합이 되었을 때 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물에 있어 ‘프로그래밍(programming)’이란 발달의 중요한 시기에 환경 자극이나 손상에 노출되어 기관의 기능과 대사에 영구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최근에는 심혈관질환, 고혈압, 당뇨병, 비만, 암 등 성인에게 발병하는 여러 질환과 조현증 등 심인성 질환의 원인이 자궁 내 태아 시기의 영양 상태, 외부인자에 의한 손상된 유전자에 있다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임신 중 태아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태아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거대한 자본을 들여서 이러한 연구들을 수십 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일정한 시기(각 장기가 발달하는 과정의 시기)에 일정한 비정상적인 자극이 지속하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 위에 열거한 질환들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연구입니다.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은 데이비드 바커(Barker's hypothesis)라는 영국의 역학자에 의해서 처음으로 언급이 되었습니다. 아기의 출생체중은 자궁 내 태아기 동안 부적절한 영양 상태로 변화된 신체 구조, 기능, 대사에 의해 결정됩니다. 저체중 태아는 생존을 위해, 췌장, 콩팥을 희생시켜 그 구조와 기능을 감소시키고, 뇌와 같은 중요 기관을 보호한다는 “절약 표현형(thrifty phenotype) 가설"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적응 반응은 태아의 생존 기회는 증가시키지만, 췌장, 콩팥의 기능이나 조직의 반응성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출생 후 또는 성인기에 영양적으로 풍요로워졌을 때도, 췌장과 콩팥이 기능을 잘하지 못해 질환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Hales & Barker. 1992).
절약표현형 가설에 의하면 생리적인 측면에서 엄마의 영양이 부족하게 되면 태아에게 포도당, 아미노산의 공급이 감소합니다. 태아는 영양 결핍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엄마로부터 받는 혈액량을 늘어나도록 조종하여 포도당을 흡수하고, 생명 유지에 기본적인 에너지만 사용하게 됩니다. 이때는 뇌 검약 효과(brain-sparing effect)가 나타납니다. 뇌 검약이란 가장 중요한 뇌에만 에너지를 공급하고 다른 췌장, 콩팥, 근육 등에는 에너지 공급을 최소화로 하는 현상입니다. 이로 인하여 태아는 저체중, 장기들의 발달 장애가 생기게 되고, 출생 후에 영양적으로 좋은 환경이 되었을 때도 췌장, 콩팥, 근육 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대사성 질환, 심혈관계 질환 등의 성인병 및 조현증 등의 심인성 질환에 노출될 위험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영양 과다 상황에서는 태아는 췌장, 콩팥, 근육 등의 장기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태내에서 장기들의 기능이 발달하지 못하고 출생 후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성인병에 이환될 위험이 큽니다. 해서 영양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적절하고 좋은 정보를 태아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후생유전학적으로 바람직합니다.
장기뿐만 아니라 유전자기능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임신 중의 엄마의 영양 상태가 유전자의 변이 없이 기능의 변화가 유발됩니다(후생유전학, Epigenetics). POMC(Proopiomelanocortin)라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주로 체내 지방의 분해에 관여하는 유전자입니다. 이 유전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지방이 분해되지 않고 쌓여 비만에 이르게 됩니다. 열악한 임신 상황으로 태어난 저체중의 아이들은 공통으로 바로 이 POMC 유전자기능이 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양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부닥쳤던 태아가 에너지를 축적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POMC 기능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생후에도 POMC의 기능은 회복이 되지 않고 저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다른 아이들의 성장을 따라잡습니다. 하지만 출생 후 영양적으로 좋은 상황에서도 POMC의 기능이 잘 안 되어, 이 아이는 비만이 발생하게 되고 당뇨에 이환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연구된 것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네덜란드 대기근(Dutch famine)에 관한 연구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11 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약 6개월간 서부 네덜란드로 가는 모든 교역로가 독일에 의해서 차단되었습니다. 고립된 네덜란드의 극심한 굶주림의 시기에 임신한 아이들을 추적한 연구입니다. 이때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비만이나 당뇨, 심장질환 등 성인병과 조현병의 비율이 유독 높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이들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때 태어난 이들은 부모에게는 없었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유독 그때 태어난 이들만이 성인병에 쉽게 걸렸습니다. 그 발병 원인을 꼭 유전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보여준 차이는 자라온 환경도 같았으므로 환경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태아로서 경험한 극심한 굶주림이 이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임신 8~15주 사이에 방사선에 노출이 많이 되는 태아는 성인이 되어서 백혈병 등의 혈액암의 위험도가 높아집니다. 또 하나의 예는, 엄마의 자궁 내에서 영양 결핍이거나, 반대로 고혈당에 노출된 태아들은 태어나서도 당을 좋아하게 되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겨 당뇨병의 위험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태아 프로그래밍’이란 이러한 비정상적인 자극을 임신 중에 최소화하여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장기적 예방프로그램입니다.
일부에서는 비윤리적으로 사용하여 우성학적 결과를 만들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태아 프로그래밍은 미래를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최근에는 아토피와 천식과 같은 알레르기 질환, 노화에 따른 인지기능 장애와 같은 질환들도 태아 프로그래밍 가설을 도입한 연구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양적 요인 외에도 내분비 교란 물질이라 불리는 환경 호르몬과 태아 프로그래밍과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들도 보고되고 있어, 태아 프로그래밍에 관여하는 요인이나 질병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특히 임신 중 태아의 발달에 중요한 시기는 임신 초기이므로 태아 프로그래밍 관점에서 태아기 건강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임신 초기, 더 나아가서는 임신 계획 시기(가임기)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건강관리가 시작되어야 하고, 계획 임신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비만은 그 자체가 질환을 프로그래밍하는 위험 요소이므로 가능한 임신 전 적절한 체중을 유지하고, 건강한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엽산을 매일, 꾸준히 복용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임신 기간 적절한 열량과 균형 잡힌 식사를 하도록 하고, 흡연, 술, 환경 호르몬과 같은 유해물질에 대한 노출은 최대한 줄이도록 합니다. 다음 세대의 건강은 현세대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어머니와 아버지 될 사람은 건강 향상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