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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계절 단상

길의 뒷면

by 아이언캐슬


— 시간이 흐르는 길 위에서

길은 오늘을 펼치지 않습니다
먼지 위에 내려앉은 것은 어제
나는 어제를 밟고 걷습니다

오늘은 그 아래, 잎맥처럼 숨겨져 있지요


길은 오늘을 감추며
여러 겹의 햇살을 덮어둡니다
땅속 깊은 물줄기는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지나간 발자국들은
아직 돌아올 줄 모릅니다

풀들이 조용히 몸을 기울입니다
누군가 지나갔다는 신호
저는 그쪽을 보지 않습니다
이미 사라진 방향일 수 있으니까요

길 위에 남겨진 것들은
한때 제 이름을 가졌던 존재들


굳어버린 시간이 돌처럼 말없이 누워 있고
그 이야기들은 바람 속에서만 숨을 쉽니다

작은 벌레 하나
등에 흙 한 줌을 얹고 지나갑니다
그 흙엔 오래전 잊힌 계절이 담겨 있을지도 몰라요
계절은 그들을 잊고
그들은 다시 길을 따라 떠납니다

별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길은 그들을 기다리며 숨을 고릅니다
그 숨결은 바람 속에 섞여
제 어깨에 잠시 머물다 떠납니다

길은 저를 압니다
하지만 제가 걷는 길은 언제나 저를 지나칩니다
저는 그 속에서 저를 찾지 않습니다
길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남겨두는 것들을 읽습니다

시간은 늘, 길 뒷면에 있습니다

길은 오늘을 펼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천 개의 어제가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제들은
길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다시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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