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말이 없었다
다만
시간의 결을 따라 깊숙이 침묵을 저장했다
냉장고는 모든 걸 기억한다
묵은 김치, 시든 채소, 절인 무 한 조각,
희미한 식초 냄새 속에 눌린 하루까지
잊힌 것이 아니라
그저 눕혀져 있는 것들
나는 자꾸 없는 사람의 밥그릇을 꺼낸다
젓가락도 놓는다
조용한 식탁 위로
수증기처럼 침묵이 번진다
그 침묵은 오래된 사진처럼 눌려 있고
아직도 따뜻한 자국을 품고 있다
유자청 병을 열면
당신의 글씨가 흘러나온다
“감기 조심” 라벨 너머
그 손길이 내 목젖 아래,
울컥하는 지점을 어루만진다
장미 무늬 식탁보
그 위에 기억들이 천천히 눕는다
아무도 먹지 않는 케이크는
오늘도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부재는 더 또렷해지고
그리움은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냄새가 되어
찬장 틈틈이 숨어든다
복숭아 주스 얼룩진 셔츠
당신이 웃으며 닦고 있는 그 마지막 여름
밥보다 기억으로 배가 부르고
반찬보다 침묵이 오래 씹힌다
나는 여전히 냉장고 앞에 선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처럼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문이 열릴 때마다
잠시, 당신이 다녀갔을까
바람이 인다
냉장고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잊지 못하는 모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