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속에는 아직 말들이 돌고 있다
입을 다문 말들
너무 늦게 꺼낸 말들
마르고 나면 의미가 바래질까 봐
차마 던지지 못한 말들
한 번도 꺼내지 못한 사과
괜히 꺼내고 말았던 후회
말끝을 흐리며 집어넣은 침묵
그 모든 것들이
젖은 셔츠에, 수건에, 이불 사이에
뒤엉켜 돌아간다
나는 가끔
세탁기 앞에 앉아
문이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본다
말들이 안에서 부딪히고
섞이고
돌고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맴도는 걸 지켜본다
삶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빨래에 남긴다
피로한 날의 냄새
당신의 땀
우리가 겪었던 계절의 잔해들
그걸 지운다는 건
결국 닿지 않은 말들을 함께 털어내는 일이었다
때로는
세탁기가 멈췄을 때의 정적이
가장 많은 말을 품고 있다
무언가 말해보려다
마침내 멈춰버린 그 순간의 침묵
나는 문을 열고
아직도 따뜻한 수건을 꺼내며
그 안에 남아 있는 문장을 더듬는다
이미 말이 아닌 것들
하지만 여전히 내게 말을 거는 것들
바람에 널린 빨래들이
햇빛 아래 흔들릴 때마다
나는 가끔 그 속에서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말이 아니라
온기처럼, 바람처럼,
다시 나에게 스미는 것들
나는 오늘도
깨끗해진 옷들 사이에서
지워지지 않은 문장을
조용히 개켜 넣는다
다음 계절까지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