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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나 Nov 13. 2023

3. 소녀는 지옥에 있었다

마지막 희망은 우습게도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였다. 늦은 새벽 찾아온 딸을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일단 씻으라는 말 한 마디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고 재빨리 가방에서 울고 있는 고양이를 꺼내주었다. 낡아빠진 고양이용 가방은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축 늘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잔뜩 겁 먹은 고양이를 소녀는 꽉 끌어안고 흐느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두고 온 첫째 고양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으나 지금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나갔던 소녀를 곱게 보내줄 작자가 아니었으니. 소녀는 오래 전 자신의 방이었던 공간이 창고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유일하게 그대로 남은 남동생의 방에 고양이를 풀어놓았다. 자신의 부재가 오래되었던 만큼, 이들의 마음 속에도 소녀의 공간은 없었다.


소녀는 정말 오랜만에 느긋하게 몸을 씻을 수 있었다. 못, 공구, 스프레이 통, 수도용 테이프 등이 널부러져 있지 않은 깨끗한 욕실이 오랜만이었다. 마트에서 구매한 싸구려 샴푸가 아닌, 향기로운 샴푸와 린스가 오랜만이었다. 당장에라도 '뭘 그렇게 오래 물을 쓰냐'며 윽박지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이런 느긋함이 낯설어 눈물이라도 흘렸을테지만, 소녀는 이런 감상에 젖어 울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차려져 있는 아침밥을 보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찬 두어 개, 흰 쌀밥, 가지런히 놓인 수저, 그 옆에 놓인 물병. 정말 평범한 밥상이었으나 왠지 소녀는 목이 메였다. 일찍이 출근한 탓에 어머니의 '밥 먹어', 하는 목소리도 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이전으로 돌아간 듯 싶었다. 소녀는 천천히 밥상 앞에 앉았다. 편의점 도시락.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로 분류된 것을 밥이랍시고 먹었던 전날이 떠올랐다. 퍽퍽하고 푸석한 밥알, 다 말라서 씹기도 힘든 반찬, 상한 냄새가 나는 김치, 편의점 도시락 특유의 냄새, 그리고 그것조차 눈치보며 먹었던 날들. 어떤 날은 도시락도 없어 남자가 남긴 밥을 꾸역꾸역 먹어야만 했다. 가끔 남자가 기분 좋은 날이면 외식을 하기도 했고, 배달 음식을 먹기도 했으나 남자의 속도에 맞추어 허겁지겁 먹어야 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자 소녀는 밥 한 술 뜨기가 무서웠다. 네 주제에 무슨 이런 밥을 먹느냐고, 그런 타박을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소녀는 두 숟갈 정도 뜨고 나머지를 그대로 주방에 가져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소녀는 고양이 사료를 와르르 쏟아붓고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마음 편하게 있어, 알겠지? 어쩌면 고양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의자에 털썩 앉고 술을 텀블러에 가득 따랐다. 소녀는 여전히 그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집 옥상에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그 집 지하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진실을 알고 있으나 오랜 시간 폭력에 길들여진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그런 속을 달래는 건 오로지 술 뿐이었다. 매일 어머니께 손을 벌려 꼬깃한 만 원 짜리를 손에 들고 얼굴을 가린 채 집 밑 슈퍼에 가서 술 두 병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밥 대신에 술로 매일을 보냈다. 오전에 어머니가 출근시면 일어나 술을 마시고, 술 냄새를 감추기 위해 샤워를 하고, 오후 내내 방에 틀어박혀 아무 생각없이 컴퓨터만 보다 잠에 들었다. 그런 나날이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들은 직후였다. 소녀는 처음에는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끝에 가서는 오열했다. 목 멘 소리로 '내가 왜, 내가 왜...'라는 말을 반복하며 온 몸을 긁었다. 짧게 깎인 손톱에 상처조차 쉬이 나질 않자, 이번에는 소녀가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점점 커지고 소녀는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를 말렸으나 큰 소리로 말릴수록, 손목이며 어깨를 잡아 저지할수록 소녀의 비명과 몸짓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발작증세의 시작이었다.


소녀는 결심이 섰다. 통장에 조금 남은 돈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계산을 마친 뒤 소녀는 집 근처 모텔로 향했다. 술병을 가방에 넣은 채였다. 소녀는 모텔 침대에 앉아 술 한 병을 비운 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저는 오늘 죽을 거예요. 이건 제 마지막 유언이고, 술을 좀 마셨지만 여전히 제정신입니다. 저는 모텔이고, 방 문 손잡이에 끈을 달아 목을 매어 죽을 거예요. 굳이 그런 방법을 선택한 건, XXX, 그 새끼 때문입니다. 이전에 본인이 좋아하고 따르던 아는 형이 그렇게 죽었으니, 저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 거예요. 그러면 더 오래 기억에 남겠죠. 저는 20XX년 2월 1일, 그 새끼랑 사귀기 시작한 날 부터 지금까지 지옥에 살았어요. 뭘 잘못하면 맞았고, 뭘 잘못하지 않아도 맞았어요.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으로 맞았습니다. 맞아서 머리를 다쳐 꿰맨 적도 있고, 온 몸에 멍이 들기도 했어요. 제게 성매매를 시키려고도 했고, 이전에 강간당한 사건을 들먹이며 협박도 했습니다. 부모님과 억지로 의절을 시켰고,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못 하게 했어요. 집에 널린 못과 철가루로 아토피가 생겼고, 그것 때문에 다리를 긁으면 긁는 소리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며 발로 찬 적도 있어요. 싸우면서 배를 발로 차여서 하혈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핸드폰은 부숴버렸고, 자고 있는 저를 때려서 깨우기도 했어요. 밖에선 사람 좋은 척을 하며 외출하고 돌아온 날은 제가 한 말실수들을 꼬투리잡으며 절 때렸어요. 계속 맞았어요, 7년 간. 처음엔 제 잘못이겠거니 했지만 지금은 아닌 걸 알아요. 제가 왜 그렇게 맞아야 했을까요? 단순히 이전에 많은 사람을 사귀어서? XXX랑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과 연락해서? 저는, 저는 헤어지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그 집을 벗어나려고 대출도 받았고, 그렇게 새 집도 구해서 혼자 살려고 한 적도 있어요. 근데 쫓아오더라고요. 제 핸드폰에 위치를 추적하는 어플을 설치했었대요. 그렇게 쫓아와서 협박하고, 돌아오라고 때리고, 또 반복됐어요. 걔 친구들은 다 제가 잘못한 줄 알아요. 그렇게 맞는 동안 경찰을 불러도 여기 XX시의 경찰들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XXX의 언변에 홀려 단순한 연인사이의 싸움이라고 단정짓고 절 타일렀어요. 다른 사람이라고 달랐을까요? 걔 친구들은 저한테 그랬어요, 제가 잘못해서 맞는 거라고. 잘못하면 맞아도 되는 거라고. 되려 저를 탓하더라고요. 부모님이라고 달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제 편은 이다지도 없네요. 아직 만나지 못 한 걸까요. 27년 동안 없었다면, 앞으로도 없는 게 아닐까요. 그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매달려 더 살아가는 건 제게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요. 제가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웃고 있겠죠. 정말 부러워요. 저도 그런 때가 있었을텐데. 아니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텐데. 후회만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아마 너도 듣게 되겠지, XXX. 잘 들어. 난 너 때문에 죽는거야. 너 때문에 힘들었고, 그래서 너 때문에 자살하는 거야. 평생 되새김질하면서 괴로워 해. 어차피 넌 그러지도 않을 사람인 거 알지만, 마지막 내 욕심이야. 평생 힘들어하고 평생 자책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라도 널 저주하고 죽고 싶게 만들거니까. 내가 왜 이렇게 목을 매서 죽는 줄 알아? 넌 알겠지. 니가 그렇게 좋아죽던 그 XX삼촌, 그 사람이랑 똑같이 죽을거야. 내가 죽은 꼴을 네가 가장 먼저 봤으면 좋겠어. 못 볼 꼴이겠지. 못생겼겠지. 남들은 마지막까지 예쁘게 죽고 싶어한다는데, 난 안 그래. 내 끔찍한 모습이 니 머릿속에 콱 박혀서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새로운 여잘 만날 때 내 모습이 그 여자한테 겹쳐졌으면 좋겠다. 니가 그랬지, 난 누굴 만나든 옆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걸레년이라서 남들 힘들게 만든다고. 아니? 내가 아니라 니가 그럴거야. 내 생각이 나서 옆 사람을 때릴거고, 내 생각이 나서 옆 사람을 의심할거고, 내 생각이 나서 옆 사람한테 죄책감 가질거야. 알겠어? 모두 니가 이렇게 만든 거라고. 누가 알아? 그 사람도 니가 그렇게 만든 걸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 XXX. 난...나는, 나도 살고 싶었어. 나도 죽는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나도 집이 있었으면 했어. 내가 있어도 되는 집이 필요했어. 지금도, 지금도 살고 싶어.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울고, 화내고, 놀고, 일하고, 쉬고...그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랬는데...모르겠어. 모르겠다, 이제. 이렇게 얘기해서 뭘 하겠어. 이제 끝인데...고양이만, 우리 고양이만 챙겨주세요. 우리 애기, 못난 엄마 만나서 눈도 다치고, 아프고 그랬으니까. 나 말고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고양이만 부탁드립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동안...죄송했어요. 장례는 치르지 않으셔도 돼요. 여유가 되신다면 그냥 태워서 바다에 뿌려주세요. 저는 늘 바다를 그리워 했어요. 어머니도 바다를 좋아하셨잖아요. 바다의 짠 냄새가 좋다고. 싫어도 닮는걸까요, 저도 바다가 좋아요. 탁 트인 바다를 보고 바다 냄새를 맡으면 제가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다른 건 더 바라는 게 없어요. 남긴 것도 없는 삶이었으니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얘들아. 멋대로 연락 끊어서, 너희 말 안 듣고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내 친구들, 보고 싶다. XX야, XX아, 미안해. 고마웠다고 연락하고 싶었는데, 내가 겁이 많아서 못 했어. 미안해. 잊고 지낼 것 같지만, 그래도 너희 많이 보고 싶었어. 안녕히 계세요."


소녀는 끈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렇게 꽉 맸는데, 그렇게 튼튼한데 이유없이 끊어질 리가 없었다. 숨이 멎어가던 그 때 툭 끊어진 끈은 마치 저보고 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문득 소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빛을 보짇 못 한 오빠가 떠올랐다. 살다가 한 번씩 생각나 그를 위해 기도 올리던 모든 순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제가 살아보지 못 한 세상을 조금만 더 살아보라고 다독이는 듯 했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는 세상이 미웠으나 이내 남은 술을 죄 마셔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래, 어머니께 모든 걸 말하고 좀 더 살아보자.


"그러게 왜 남자에 미쳐서 따라갔노."

"니가 다 자초한 거지. 울지 마라."

"니가 무슨 정신병이고? 니가 원래 성격이 예민해서 그렇지, 정신병은 아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소릴 했노? 니 잘못이다."

"옆 사람 생각해서라도 발작이니 뭐니 그런 것 좀 하지 마라."

"엄마가 뭘 더 해줘야 하노? 니 오기 전까지는 엄마도 편히 살았다."

"그 고양이 좀 갖다 버리라.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고양이까지 내가 키워줘야 하나?"

"아사리 입원하는 게 어떻겠노?"

"엄마도 피곤하다, 그만 좀 해라."

"그럴 거면 나가라. 내 집이다."


소녀는 고양이를 가방에 다시 넣었다. 답답한지 고양이가 끊임없이 울어댔다. 나가라는 말을 들었으니 더 있을 곳도 없었다. 살아보자고 생각한 것이 바로 어제인데 소녀는 그새 또 죽고 싶어졌다. 중학생 때 소녀의 손목에 있던 자해 흔적을 모른 체 하던 그 때부터 큰 기대는 않았지만 막상 이리 되니 정말로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 같았다. 텀블러에 술을 가득 채우고 소녀는 주차장에 털썩 앉았다. 야옹, 야옹, 야옹. 계속해서 우는 고양이가 그저 큰 짐이어서, 소녀는 무턱대고 죽을 수도 없었다. 아침에 간신히 알아낸 친구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보던 소녀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XX야, XX야..."

"---"

"나 있잖아, 다시 XXX한테 갈 거야."

"---"

"엄마가, 엄마가 나가래. 나 이제 갈 곳이 없어. 고양이도 갈 곳이 없어."

"---"

"근데 우리 고양이 살아야 하잖아. 그래도 거기 가면 고양이 화장실도 있고, 밥도 있고, 물도 있고..."

"---"

"알아, 아는데. 근데, 난 얘 엄마잖아. 엄마는 자식 버리면 안 되잖아."

"---"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그냥, 그냥 거기가면 또 연락 안 될 거니까..."

"---"

"연락 안 돼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했어. 미안해. 미안해."


소녀는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째 최근에 울지 않는 날이 없는 것 같았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그 집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할 수 없을 것 같아, 텀블러에 있는 술을 죄다 마셨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온 참이었다.

"저 지금 정말로 멀쩡해요. 괜찮다구요. 이것 좀 풀어주세요."

"술 드셔서 안 됩니다."

"술 마신 건 맞는데, 멀쩡하다니까요. 제 고양이 지금 어딨어요?"

"조용히 하세요."

"제가 무슨 술 마셨는지, 얼마나 마셨는지도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발음도 멀쩡하잖아요. 제 고양이 지금 물이라도 마셔야 해요, 어딨냐구요."

"조용히 하시라구요."

"알겠으니까, 이거 안 풀어주셔도 되니까 제 고양이 물이라도 주시라구요. 돈도 드릴게요, 네? 돈 드릴테니까 옆에 편의점에서 애 먹을 거라고 좀 사서 주세요. 수갑 찬 채로 경찰관 분 동행해도 되니까, 제가 가서 사 오는 것도 괜찮아요. 아니면 제발 좀 애 밥이라도 주세요.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걔."

"안 됩니다."

소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소녀를 잡고 있는 줄과도 같았다.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인 자신을 붙잡고 있는, 유리조각이 틈틈이 박힌 동앗줄. 붙잡을 수록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살리고 있는 단 하나뿐인 생명. 그런 고양이가 종일 굶고 있는데다 가방 속에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고 있는 그 상황이 괴로웠다.

"제가 뭘 잘못했냐구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술 마시고 사람을 때렸어요, 욕을 했어요? 제가 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이렇게 묶여 있어야 하냐구요!"

"조용히 하세요."

"말 좀 해 보세요! 제가 사람을 찔렀냐구요! 제가 뭘 했어요! 그냥 주차장에서 술 마시고 있었잖아요, 그게 뭐가 잘못이예요!"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올 줄을 몰랐으나, 소녀는 그렇게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것을 먹지 못 한 소녀는 울 기력도 없어 축 쳐졌다. 뒤늦게 올라온 술 기운과 무력감이 뒤섞여 몽롱한 상태로 어딘가에 끌려갔다. 한참을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어머니께 그렇게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에는 문턱조차 보기 힘든 곳이 눈 앞에 떡하니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도 어엿한 성인일진대 동의도 없이 끌고 온 경찰관과 소방관이 증오스러웠다. 등이며 어깨를 밀치며 진료를 억지로 받게 한 후 나온 결과는 '알코올 중독증'이었다. 단지 제가 지금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진단도 없이 그렇게 정의내려진 소녀는 또 한 번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밀쳐지고 끌어당겨져 정신병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간이 변기와 세면대, 작은 침대가 있는 독방에서 소녀는 오로지 분노에 차 있었다. 독방에 갇히기 전 맞은 진정제 때문에 사리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소녀는 배식도 거부하고 침대에 누워 계속해서 잠만 잤다. 핸드폰도 빼앗긴 마당에,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렇게나 잡힌 손목과 어깨가 멍이 들어 욱신거렸지만, 어디에 항의할 수도 없었다. 왈칵 쏟아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머리카락을 푹 적셨다.


소녀는 꼬박 하루가 넘도록 그 독방에 갇혀 있었다. 소녀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고양이 안부를 확인하고 그 길로 모텔에 향했다. 어머니의 집은 더 이상 자신이 갈 곳이 아니었고, 친척 이모가 데리러 왔음에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또 그 곳에서 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낸 소녀는 모든 걸 전해들었다. 신고한 것은 전화하고 있던 친구라는 것. 친구는 다시 XXX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던 것. 경찰의 과잉진압은 예상치 못했다는 것. 고양이는 당시 연락하고 지내던 친구가 전화로 계속해서 부탁했다는 것. 고양이는 현재 어머니의 집에 있다는 것. 정신병원은 어머니가 들어가게끔 조치했다는 것까지. 소녀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소녀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 결정했다. 그래, 이 곳을 떠나자.


소녀는 흔들거리는 기차를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난다는 결정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중의 돈도 넉넉치 않았다. 완전히 떠날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돈도 못 되었다. 딱 3일. 3일만 서울에 있다가 오자. 그 뒤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결정내린 소녀는 잠시 눈을 붙였다. 긴장감에 잘 수는 없었지만, 내도록 뜨고 있던 눈이 뻑뻑했다. 흔들흔들,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는 몸을 따라 생각도 흔들렸다. 고양이-고향-술-멍-7년-흔들흔들-친구-서울-해방-죄책감-원망-흔들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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