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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May 05. 2024

1호선의 화난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인생 목표 중 하나는 지하철 1호선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할아버지가 되지 않기. 누군가에게 지르는 고함인지알지 못하는, 내용도 중구난방인,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공공장소에서 쏟아내고 있는 인간이 되기 싫다. 하지만 내 안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가고,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렸을때는 화가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공교육이 폭력으로 뒤덮인 시절, 아무없이 한대 맞고 시작해서 하루종일 온갖 핑계로 쥐어 터지다가 집에 가는 중학교를 거치며 내 안의 분노가 커졌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이유없이 맞으며 내 안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나는 화가 많은 성인으로 자랐다. 독립영화 중에 폭력의 되물림을 다루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내가 그 폭력을 겪어봤기 때문일 거다. 폭력으로 쌓인 분노를, 나는 폭력으로 풀지 않고, 불합리함을 찾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형식으로 풀었던 것 같다. 나는, 불만이, 많다. 


회사를 그만둔지 10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같이 일하기 좋은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나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했을 지를.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의 불합리함을 잘 참지 못한다. 잘못된 점을 왜 고쳐야 하는지 논리를 쌓아 따져들었다. 얼마나 피곤한 인간이냐.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던 조직에 와서 잘못된 점만 찾아서 지적하는 사람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용인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반동분자가 끼어든 것이다. 하얀 종이에 빨간 물감 하나가 떨어져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거다. 윗사람들은 항상 나를 달랬다. 폭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은 일반적인 회사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모 대기업 재벌집 자제들은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도 코미디다. 여튼 내가 다닌 회사는 폭력이 용인되지 않았고, 윗사람들은 말로 나를 달래려고 했다. 문제는 내가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위해 논리를 아주 탄탄히 쌓은 다음 말을 했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내 말이 모두 맞다. 반박이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맞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이상적인 조직이나 시스템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도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걸 통칭 '유도리'라고 부른다. 내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 쓰던 수첩을 보면 '그놈의 유도리'라는 말과, '그놈의 레퍼런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내가 낸 창작 아이디어를 듣고 레퍼런스를 가져오라는 말에 지쳐 레퍼런스 혐오증이 걸릴 지경이었는데, 그 정도의 분노를 '유도리'에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유도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놈의 유도리를 발휘하지 못해 내가 점점 분노에 가득 찬 노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최근 2주간 공적자금이 투입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신진 영화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고, 내 나이에 신진 감독으로 참여하는게 좀 아닌 것 같지만 서도 나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지원했고 합격했다. 역시나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영화판이 고사했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너무 어렵다. 반토막이 난 영진위 독립영화 제작비 지원 프로그램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엄청난 감독들이 지원한다고 하니, 나만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독립영화 제작지원 시장은 칸느 저리가라의 경쟁률이다. 당연히 상업판에 있어야 할 양반들이 경쟁하고 있으니까.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 있으니까. 내가 이런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거고, 그러니 프로그램을 잘 참여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불합리함을 찾아내는 사람이고, 역시나 이번 프로그램도 진행이 될 수록 불만에 가득 찼다. 그래서 1주가 지나고 나서 주최측에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프로그램이 개선되어야 할 점을 따졌다. 한마디로 들이 받은 것이다. 내가 했던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같이 참가한 참가자들이 대신 질러줘서 고맙다고 개인 연락이 왔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내 별명은 혁명가, 반골, 저항군으로 불렸다. 주최측은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내가 지적했던 부분에 대해 개선된 것 같느냐며 뒷끝을 보였고, 나는 내가 들이받은 것에 대한 막심한 후회를 했다. 고작 2주를 참지 못했다. 유도리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 해당 단체에서 하는 향후 어떤 프로그램에도 나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2주동안도 분노를 참지 못했기 때문에. 


불만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고 한다. 모두가 만족하고 사는 나라는 전체주의자가 독재를 할 확률이 100프로에 수렴한다. 나는 그런 믿음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해왔다. 젊었을 때는 치기로, 패기로 받아들여졌지만, 나이가 들어 발언의 무게가 달라진 지금에는 과연 내가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들이 받은 이후에 확실히 담당자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참가자들이 불만을 가질만한 것을 한번 더 살펴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로 인해 다른 참가자들은 분명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 남는 것은 반동분자라는 별명 뿐이다. 나보다 젊은 사람이 들이받고, 주최측은 나이가 많은 나에게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견을 묻고, 그것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한 후 참가자들을 모아 앞으로 이렇게 하자 라는 중재 역할을 해야했다. 나는 그런 나이다. 나이에 맞게 역할을 변화하지 못하면 나는 1호선의 화난 노인이 된다. 나랑 일했던 제작자들이 단순히 내 능력부족때문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게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나와 일했던 제작자 중 한 명은 '감독님, 너무 똑똑해서 같이 일하기 힘들어요. 논리적으로 맞다고 다 정답은 아니에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칭찬을 가장했지만, 지적이었다. 내 인생 목표를 달성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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