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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류학자 Dec 02. 2023

솟아나라 아이디어

오늘도 언제나처럼 '흠, 어떡하지?'에 직면했다. 대학원생을 가로막는 이 친구는 언제 어디서나 나타난다. 실험 디자인 설부터, 실험 수행, 분석, 논문 작성, 수정 단계 어디서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대학원 초창기에는 직면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이전에 나온 유사한 논문을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똑같은 실험 디자인이 아니기에 사막에 덩그러니 놓인 나를 구해주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고 '구글 학술 검색'에 키보드 공격을 하고 있으면 오히려 샛길로 빠지기 일쑤였다.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고, 그나마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다.


가장 자추 취하는 액션은 바로 산책이다. 산책은 특히나 짧은 시간 내에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적합하다. 딱히 준비할 필요 없이, 그냥 건물 밖으로 나가 사람이 없는 쪽에서 걸으면 된다. 생각 과부하로 집중이 어려울 때 계속 앉아있는 행위는 시간 낭비였다. 또한, 실험이 잘 풀리지 않아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도 잠깐 하는 산책은 더러워진 속을 정화하기 딱 좋았다. 5~10분 정도의 산책은 지금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상기하여 다시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편의점에 가서 달달한 것을 먹는다. 사실 연구실에 있으면 혼자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깊게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한다면 직접 돌파는 아니더라도 대안이 떠오를 수 있다. 그렇기에 편의점으로 향한다. 총총 내려가면서 직면한 문제를 머릿속에서 문장형으로 만든다. 떠오른 문장의 단어들 중 대체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해 본다. 그러면 편의점에 도착한다. 이제 무엇으로 당을 충전할지 고민한다. 보통은 허쉬 음료나 과일을 고른다. 쫍쫍 먹으면서 다시 연구실 쪽으로 향한다. 가끔씩 대안이 떠오른다.


지도교수님을 괴롭힌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고민에 고민 끝에 지도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매우 쉬운 해결 방식을 주신 적이 많다.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교수님의 어깨에 올라 다시 그 문제를 들여다보자. 경험이 주는 부드러움이 있다. 주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한 다음 교수님 방으로 돌입하는 것이 잔소리를 방지할 수 있다.




대학원 초창기에는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것을 하고자 했다. 연구를 하다 보니 선배 연구자들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논문 저자 목록에 폼 나게 한 사람만 적혀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멋질 수 없었다. 나도 교수님께 받은 주제가 아닌, 나만의 아이디어를 연구해 보고 싶어졌다. 


남들을 뭘 하나 알기 위해 학술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늘렸다. Nature와 Science라는 과학학술지는 영향력이 큰 연구들을 싣는다. 그렇기에 우선순위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류학 분야에 유명한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 역시 챙겨 보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조류학자들의 논문도 주기적으로 확인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확인해야 할 논문은 끝없이 많았고 계속 나왔다. 열정을 누르는 일의 압박은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수개월 동안 그나마 재밌어 보이는 논문만을 골라서 보았음에도 많은 양에 스트레스와 압박은 여전했다. 재밌어 보여 시작했지만 노잼인 상황. 우연히, 봉준호 감독님의 수상 소감을 듣게 됐다.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입니다"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말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된 다른 논문을 정독하는 것이 아닌, 나의 것을 완성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영화와 연구는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유사점이 있다. 같은 주제와 시퀀스로 영화를 만들면 표절인 것처럼 논문 역시 그렇다. 또한, 이미 나온 유명 논문들은 이미 그 저자들이 매우 잘하는 것들이기에 같은 주제로 그들을 따라잡을 즈음, 그들은 다음 단계로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개인적인 흥미로 시작한 연구 혹은 지금 잘하는 연구들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고 경쟁력이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근, 같은 주제라도 창의적인 가설 혹은 신선한 방법을 통해 접근하면 새로운 의미 있는 논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굳이 논문을 전부 이해하겠다는 절절함은 필요 없다고 결론 지었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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