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율 Nov 17. 2024

암병동, 간병인의 하루

종합병원 한 달 살기_둘째 날

  이곳은 암병동이다. 암수술 환자가 모여 있는 병실이다. 아버지는 11월 1일 입실하였다. 이곳은 4명의 암수술 환자가 있고, 간병인 4명이 함께 생활한다. 입실 순으로 치면 내 아버지가 말단 후임이다. 그러나 거동하는 것을 보니 아버지가 가장 연세가 많아 보인다. 세 분은 혼자서 걸어 다니고 그럭저럭 멀쩡해 보였다. 


  나 역시 간병이 처음이고 병실에 장기간 체류하는 것도 처음이라 잘 모르니 고참들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냥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세요'하며 고개를 끄떡했다. 4명 모두 나이 든 남자 환자들이고, 나를 뺀 세 분은 환자의 아내들 같아 보였다. 전문 간병인은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아버지는 아들이 간병인으로 왔고, 어머니는 집에 계신다. 아버지의 간병을 맡기엔 연세가 많으시다. 울 엄마도 짠하고 아버지도 짠하다. 내 마음도 짠하다. 아버지 간병을 맡겠다는 말을 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본질은 내가 해야만 한다. 아버지와 난생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하고, 눈을 마주치며, 손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 평생 이럴 날이 또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이다. 아버지는 내가 필요하다.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면 아버지는 든든하실 것이다. 난생처음 든든한 아들이 되어보자.



  암병실은 하루가 빨리 시작한다.

04:00 병상 커튼이 살짝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담당 간호사는 아버지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고, 영양제 주사액의 눈금과 줄이 꼬이지 않았는지 살폈다. 환자 수술부위의 옷 속을 들여다 보고, 대소변량과 물섭취량 등을 기록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 그 과정을 살폈다. 

"불을 켜드릴까요" 했더니 "괜찮아요" 했다. 

많은 과정이 2~3분 내에 끝났다. 아버지의 소변주머니를 비우고 간병인 침상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필까 했지만 남들 한참 자야 하는 새벽시간에 전등을 켜놓기가 좀 그랬다. 복도 쪽 창문으로 형광등 빛이 들어와 그림자를 만들었다. 병실 특유의 냄새가 지금에서야 느껴졌다.

 


  07:00 아침식사.

아버지는 허연 멀건 죽만 3분의 1 정도 드시고, 국물과 네 가지 반찬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남은 반찬은 내가 싹 다 먹었다. 병원 밥은 맛없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먹을만하다. 국은 약간 비릿했다. 아버지는 식욕이 없고, 음식물 넘김이 싫다고 하신다. 배고픔도 못 느끼고, 메스꺼움에  음식이 입에 당기지 않는 것 같다. 위암 환자가 수술 후 감당해야 하는 과정인가 보다.



  09:00 수술 담당 교수님의 회진시간이다. 

"어르신 어떠세요? 어디 불편하신데 있나요?" 아버지는  없다고 했다. 

"잘 먹고 운동만이 살길입니다. 꾸준히 걸으세요."라고 내 얼굴을 보며 말씀하셨다. 간병인이 여기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인지시켜 주는 듯했다. 건강의 원리는 단순하다. 환자도 일반인도 정답은 잘 먹고 적당히 운동하는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10:00 간식이 나왔다. 

식사 시간이 끝난 두세 시간 이후 하루 3번 주기적으로 간식이 나온다. 오전 간식은 뉴케어 100cc와 크래커 5조각이다. 오후 간식은 크림수프 3분의 2와 황도 2분의 1쪽이 나왔고, 저녁 간식은 마시는 야그루트와 오렌지 반쪽이다. 역시나 아버지는 싫다고 고개를 흔드신다. 내가 먹었다. 아버지는 먹지 않으니 몸무게가 매일 줄었고 나는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모두 챙겨 먹으니 영향상태가 더 좋아졌다.



  10:30 걷기 운동. 

병동 세 바퀴를 돌았다. 한 바퀴 돌고 휴게실에서 휴식, 그리고 또 한 바퀴, 오후에는 네 바퀴 돌자고 각오를 다녔다. 아버지는 다리에 힘이 없다. 근육량이 너무 줄었다. 몸무게도 줄고 기력도 많이 떨어졌다. 이래서는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퇴원을 하더라도 엄마가 힘들 것이다. 최소한 대소변은 아버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걸어야 한다. 집에는 3주 전 응급실로 실려오기 전에 타던 사륜오토바이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운동만이 살길이다.



  12:00 점심식사. 

죽 3분의 1만 드시고 모든 반찬은 손을 대지 않았다. 뭇국, 고등어조림 반 토막, 고사리 무침, 삶은 청경채, 두부조림, 사과 반쪽을 내가 먹었다. 아버지는 못 드시는 데, 나는 입맛이 더 난다. 빈 그릇만 보면 "암수술 환자가 왜 이리 잘 먹냐"라고 오해할 듯하다. C병실 간병 아주머니께서 삶은 고구마 2개와 김장김치를 주셨다. 

"김장을 벌써 담그셨나요?"

"아, 사둔 댁에서 김장 담았다고 보내왔어요. 좀 맛 좀 봐요."

저분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13:00 수술부위 소독. 

아버지의 갈비뼈가 다 드러날 만큼 말랐다. 몸무게가 53.5 킬로그램 주변에서 바늘이 움직인다. 저울 위에 지지대 없이 서 있기도 힘들어하신다. 이를 어쩐다. 아버지는 57킬로그램에서 살이 빠졌다고 혼잣말로 궁시렁 거린다. 어떻게 살을 찌울 수 있을까? 먹는 양을 늘려야 하는데, 먹지도 않고 먹을 시도조차 안 하니, 내 마음이 조려 온다. 간병 기간이 끝나는 한 달간 아버지 혼자서 걷고, 일상생활을 하셔야 한다. 내가 간병을 맡은 이유다.



  13시 이후는 좀 여유가 있다. 

오후 간식시간 전까지 가장 한가롭다. 나는 어제 병원에 들어왔으니, 지금 '종합병원 한 달 살기' 딱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11월 2일 오후 2시다. 아버지와 한 몸이 되어 간다. 3일간은 간병인 수습과정이라고 혼자 위로했지만,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큰 실수 없이 잘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이 또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좋은 추억은 나 스스로 선택해서 실천해 갈 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가 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결혼하지 않은 동생들과 처자식 4남매를 책임저야 했다. 그 시절 먹이고 입히고 가리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4남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아버지도 내 나이적에 고민하고, 노력하고, 근심걱정이 많았을 몸이. 그 50년 세월 고단했을 몸이 내 앞에 누워계신다.



  23:30 교대근무, 간호사들이 분주하다.

몇몇은 남고, 몇몇은 퇴근한다. 교대근무가 시작되는 시간인 것 같다. 일상복을 입고 엘리베이터에 타니 간호사인지, 직원인지, 일반인인지 분간은 안 되지만 이 시간에 서너 명이 병실을 나서는 것을 간병인의 입장에서 보면 신선하게 느껴진다. 


  표정들이 밝다. 남들 자는 시간에 업무를 마치고 퇴근이라니, 낯선 풍경이지만 직장을 벗어난다는 신남은 똑같아 보인다. 그냥 집으로 갈까? 아님 한잔 하러 갈까? 이런 궁금증도 든다.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 한잔이 직장생활의 큰 위로가 되던 때가 있었다. 이들도 그럴까? 물어보고 싶다. 


"저기요 한잔 하러 가면 나도 좀 껴주면 안 돼요?" 

하하 이런 상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도 고생이 많다. 20대 중반부터 30대로 보이는 여성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로서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근로자로서 직장에서 고된 하루를 보냈다. 늦은 퇴근길을 보면서 안쓰러움 반, 부러움 반이 들었다. 왜일까? 내 젊은 시절 야근하고 퇴근할 때가 생각났다. 혼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째다. 오늘 밤은 그때가 그립게 다가온다. 


내일 밤엔 나도 퇴근하자. 내일은 식사할 곳도 알아보고, 커피도 한잔 사 먹자. 책 읽을 공간도 찾아보자. 이 넓은 종합병원 어딘가에는 나만의 공간이 있을 것이다. 내 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잠깐씩은 사색의 시간을 갖자. 내일은 병원 탐방을 해봐야겠다. 


'시작이 반이다.'란 말처럼, 간병인의 하루를 잘 완료했으니 내일은 좀 더 발전하길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아버지 간병을 해야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