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고, 우간다에 다시 온 지 20일이 지났다.
괜찮을까 했던 걱정 그대로- 전혀 괜찮지 않았다.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사했지만, 일단 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고,
덩달아 약해진 마음은 그 반응에 무너지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날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리라, 단단해지리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중이다.
_다시 우간다로 돌아온 어느 날에 일기
환경이 바뀌면 좋아지는 경험인 줄 알았다. 마련된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평소라면 너무도 좋아했을 빗소리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스릴러로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 시간부터 다음날 아침이 되기까지는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밤의 모든 작은 소리가 공포였고, 두려움 자체였다. 누웠다가도 창밖을 내다보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때가 가장 많이 신의 이름을 불렀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움으로 다가왔던 건 사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위로 섞인 말이었다. “강도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니잖아요, 덜 무섭지 않아요? 바쁘고 정신없이 일을 해봐요, 어머! 울어요?” 그릇된 의도가 담긴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겁을 내거나 눈물을 보이는 일을 그만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인 것 같아, 마음과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러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남편이 지인을 통해 미국에 심리학 박사 한 분을 연결해 주었고, 줌으로 처음 만난 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소리 내 울기만 했었다. 진정이 되자 나지막하게 건네는 선생님의 “같은 일이라도 무서움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달라요.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아요.”라는 말. 상담 이후 이 나라를 떠나 전혀 다른 환경에 머무르고 싶은- 전혀 괜찮을 수 없었던 마음을 남편과 나눴고, 홀로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게 됐다.
한국에서 머문 곳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원룸 형태의 집이었다. 한국은 공기부터 다른 느낌이었지만, 우간다에서 가져온 경험과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밤마다 문은 잘 닫았는지 창문이 열리는 건 아닌지 사고가 나면 경찰이 곧바로 오는지 등등 확인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잠에 들었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 이틀이 지나고 두 달이 되어갈 때쯤 어깨에 붙이고 있던 긴장감도 풀린 데다 사고 당시 이야기를 편하게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우간다로 돌아갈 시간이 왔구나 생각했다. 물론 의무감에서였지, 가고 싶은 의지력은 조금도 없었다.
나에게는 한국이 집이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언제든 편히 만날 수 있는 곳인 데다 당장 뭐라도 시작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까지 들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한국은 엄마가 느끼는 만큼의 공간일리 없었고 집에 언제 가, 친구들 보고 싶은데, 아빠도 보고 싶어 라며 우간다에 대한 그리움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절대 가지 말라고 굳게 잡아 앉히는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주저 없이 정착했을 나였다. 하지만 그 한 명이 없어(?) 결국 우간다로 돌아갈 비행기 티켓 날짜를 정하고야 말았다.